故丹溪先生朱公石表辭
돌아가신 단계선생 주공의 석표사
丹溪翁傳
단계옹전
上楊楚玉類集 《 心法 》, 中間水腫 、 虛腫 、 痛風 、 肢節痛 、 麻木 、 婦人小便不通等證 , 文多重出 , 又取別論附於其間 。 雖能補其缺略 , 不免混淆難別 , 致丹溪主病之旨不明 , 王季瓛因正論及附論中方未備載 , 又作附錄 。 如夢遺椿樹根丸 、 淋證六味地黃丸 、 婦人三補丸等 , 不錄丹溪原方 , 卻於他書取方名相同增入 , 藥味與病懸隔 。 (充)恐用者不察 , 反致有誤 , 今以丹溪原論 , 考訂遺誤 , 錄於症首 , 次附戴元禮辨症 , 次錄正方 , 以見正法不雜 , 其附論不去 , 題曰附錄 , 用存編者之意也 。 復盡載附論中方 , 題曰附方 , 恐人妄去取也 , 庶幾明白 。 又增入外科倒倉等法 , 以翼其未備 , 觀者詳焉 。
앞서 양초옥이 《심법》을 종류별로 모았는데, 그 가운데 수종·허종·통풍·지절통·마목·부인의 소변불통 등의 증은 글이 중복된 것이 많고, 또 다른 논의를 가져와 그 사이에 덧붙였다. 빠진 곳을 보충할 수는 있었으나 뒤섞여 구분하기 어려움을 면하지 못하여, 단계가 병을 다스리는 뜻이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왕계환은 정론과 부론 속에 처방이 다 실리지 않았다 하여 다시 부록을 만들었다. 몽유의 춘수근환, 임증의 육미지황환, 부인의 삼보환 등은 단계의 원래 처방을 싣지 않고 다른 책에서 이름이 같은 처방을 가져와 더해 넣어, 약미와 병이 크게 동떨어졌다. 충은 쓰는 이가 살피지 못해 도리어 잘못될까 염려하여, 이제 단계의 원론으로 빠진 것과 잘못된 것을 고증하고 각 증의 첫머리에 실었다. 다음에는 대원례의 변증을 붙이고 그 다음에는 바른 처방을 실어 정법이 섞이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덧붙인 논의는 없애지 않고 ‘부록’이라 이름하여 편집자의 뜻을 남겼다. 또 부론 속 처방을 모두 싣고 ‘부방’이라 이름하였으니, 사람들이 함부로 버리거나 취할까 염려해서이며 이로써 분명해지기를 바랐다. 또 외과와 도창 등의 법을 더 넣어 미비한 곳을 보완하였으니, 보는 이는 자세히 살피라.
成化庚子花朝日程充識
성화 경자년 화조일에 정충이 적다.
故丹溪先生朱公石表辭
고 단계선생 주공의 묘표문
丹溪先生既卒 , 宗屬失其所倚藉 , 井邑失其所依憑 , 嗜學之士失其所承事 , 莫不彷徨遙慕 , 至於灑涕 ! 濂聞之 , 中心尤摧咽不自勝 。 蓋自加布於首 , 輒相親於几杖間 , 訂義質疑 , 而求古人精神心術之所寓 。 先生不以濂為不肖 , 以忘年交遇之 , 必極言而無所隱 , 故知先生之深者 , 無逾於濂也 。 方欲聚厥事行 , 為書以傳來世 , 而先生之子玉汝 、 從子嗣氾 、 忽蹐濂門 , 以先生從弟無忌所為狀 , 請為表以勒諸墓上 。 濂何敢辭 ! 先生諱震亨 , 字彥修 , 姓朱氏 , 其先出於漢槐里令云之後 。 居平陵 , 至晉永興中 , 臨海太守泛 , 始遷今婺之義烏 。 子孫蟬聯 , 多發聞於世 , 郡志家乘載之為詳 。 當宋之季 , 有東堂府君者 , 諱良祐 , 懿然君子人也 , 蓋以六經為教 , 以弘其宗 。 府君生某 , 某生迪功郎桂 , 迪功生鄉貢進士環 , 先生之大父也 。 父諱元 , 母某氏 。 先生受資爽朗 , 讀書即了大義 , 為聲律之賦 , 刻燭而成 , 長老咸器之 , 已而棄去 。 尚俠氣 , 不肯出人下 , 鄉之右族咸陵之 , 必風怒電激求直於有司 , 上下搖手相戒 , 莫或輕犯 。 時鄉先生文懿許公 , 講道東陽八華山中 , 公上承考亭朱子四傳之學 , 授受分明 , 契證真切 , 擔簦而從之者亡慮數百人 。 先生嘆曰 :「 丈夫所學 , 不務聞道 , 而唯俠是尚 , 不亦惑乎 ?」 乃摳衣往事焉 。 先生之年 , 蓋已三十六矣 。 公為開明天命人心之秘 , 內聖外王之微 , 先生聞之 , 自悔昔之沉冥顛濟 , 汗下如雨 。 由是日有所悟 , 心扃融廓 , 體膚如覺增長 , 每宵挾朋坐至四鼓 , 潛驗默察 , 必欲見諸實踐 , 抑其疏豪 , 歸於粹夷 。 理欲之關 , 誠偽之限 , 嚴辨確守 , 不以一毫苟且自恕 。 如是者數年 , 而其學堅定矣 。 歲當賓興 , 先生應書秋闈 , 幸沾一命 , 以驗其所施 。 再往 , 再不利 , 復嘆曰 :「 不仕固無義 , 然得失則有命焉 。 苟推一家之政 , 以達於鄉黨州閭 , 寧非仕乎 ?」 先是府君置祭田三十餘畝 , 合為一區 , 嗣人遞司穡事 , 以陳時薦 , 然有恆祭而無恆所 。 先生乃即適意亭遺址 , 建祠堂若干楹 , 以奉先世神主 , 歲時行事 。 復考朱子家禮而損益其儀文 , 少長咸在 , 執事有恪 , 深衣大帶 , 以序就列 , 宴私洽比 , 不愆於禮 。 適意亭者 , 府君所造 , 以延徐文清公之地 。 先生弗忍其廢 , 改創祠堂之南 , 俾諸子姓肄習其中 。 包銀之不下 , 州縣承之 , 急如星火 , 一里之間 , 不下數十姓 , 民莫敢與辨 。 先生所居里 , 僅上富氓二人 。 郡守召先生 , 自臨之曰 :「 此非常法 , 君不愛頭乎 ?」 先生笑曰 :「 守為官 , 頭固當惜 , 民不愛也 。 此害將毒子孫 , 必欲多及 , 民願倍輸吾產當之 。」 守雖怒 , 竟不能屈 。 縣有暴丞 , 好諂瀆鬼神 , 欲修岱宗祠以徼福 , 懼先生莫己與 , 以言嘗之曰 :「 人之生死 , 岳神實司之 , 欲治其宮 , 孰敢幹令 ?」 先生曰 :「 吾受命於天 , 何庸媚土偶為生死計耶 ? 且岳神無知則已 , 使其有知 , 當此儉歲 , 民食糠核不飽 , 能振吾民者 , 然後降之福耳 。」 卒罷其事 , 賦役無藝 。 胥史高下其手 , 以為民奸 。 先生集同里之人謂曰 :「 有田則科徭隨之 , 君等人胥史餌而護相傾 , 非策之上也 , 宜相率以義 , 契其力之朒 , 嬴而敷之 。」 眾翕然從 , 每官書下 , 相依如父子 , 議事必先集 。 若苛斂之至 , 先生即以身前 , 辭氣懇款 , 上官多聽 , 為之損裁 。 縣大夫勸耕於鄉 , 將有要於民 。 先生愳其臨境 , 邪幅扉屨 , 往迎於道左 。 大夫驚曰 :「 先生何事乃爾耶 ?」 先生曰 :「 民有役於官 , 禮固應爾 。」 大夫曰 :「 勸耕善乎 ?」 先生曰 :「 私田不煩官勸 , 第公田生青芻耳 。」 是時圭田賦重 , 種戶多逃亡 , 故先生以此為風 。 大夫一笑而去 。 鄉有蜀墅塘 , 周圍凡三千六百步 , 溉田至六千畝而嬴 ; 堤壞而水竭 , 數以旱告 。 先生倡民興築 , 置坊庸 , 鑿為三竇 , 時其深淺而舒泄之 。 民食其利 。 後十年 , 山水暴至 , 堤又壞 , 先生命再從子漳力任其事 , 以嗣其成 。 縣令長或問決獄得失 , 先生必盡心為之開導 。 東陽郭氏父子三人 , 虐毆小民幾斃 , 又貫針鰌腹 , 逼使吞之 。 事移義烏鞠問 , 當其子父皆死 。 先生曰 :「 原其故殺之情 , 亦一人可償爾 。 一子從父之令 , 宜從未減 , 若皆殺之 , 無乃已重乎 ?」 事上從先生議 。 張甲行小徑中 , 適李乙荷任器來 , 幾中甲目 , 甲怒拳其耳而死 。 甲乙皆貧人 , 甲又有九十之親 。 先生曰 :「 貰甲罪則廢法 , 徇法甲必瘦死 , 親無以養亦死 。 乙屍暴於道 , 孰為藏之 ? 不若使竟其葬薶 , 且慰其親 , 徐來歸獄 , 服中刑耳 。」 或曰 :「 甲或逃奈何 ?」 先生曰 :「 若以誠待之 , 必不爾也 。」 縣如先生言 。 後會赦免 。 細民有斬先生丘木者 , 先生訊之 , 民弗服 。 先生聞於縣 , 將逮之 。 人交讓民曰 :「 汝奈何犯仁人耶 ?」 民曰 :「 計將安出 ?」 人曰 :「 先生 , 長者也 。 急舁木還之 , 當爾貸 。」 民從之 , 先生果真而不問 。 先生客吳妙湛院 , 尼刻木作人形 , 以為厭蠱 。 館客陳庚得之 , 欲發其事 , 尼懼甚 。 先生知之 , 以計紿陳出 , 碎其木刻 。 陳歸怒且詈 。 先生徐曰 :「 君乃士人 , 獲此聲於吳楚間 , 甚非君利 。 倘乏金 , 吾財可通用 , 勿憂也 。」 尼後輦金帛為謝 , 先生叱而去 。 方岳重臣及廉訪使者 , 聞先生名 , 無不願見 ; 既見 , 無不欲交章薦之 。 先生皆力辭 。 唯民瘼吏弊 , 必再三蹙額告之 , 不啻親受其病者 。 覃懷鄭公持節浙東 , 尤敬先生 , 以尊客禮禮之 。 眾或不樂 , 競短其行於公 。 公笑曰 :「 朱聘君盛舉諸公之長 , 而諸公顧反短之 , 何其量之懸隔耶 ?」 皆慚不能退 。 初 , 先生壯齡時 , 以母夫人病脾 , 頗習醫 。 後益研礦之 , 且曰 :「 吾既窮而在下 , 澤不能致遠 , 其可遠者 , 非醫將安務乎 ?」 時方盛行陳師文 、 裴宗元所定大觀一百九十七方 , 先生獨疑之 , 曰 :「 用藥如持衡 , 隨物重輕而為前卻 , 古方新證 , 安能相值乎 ?」 於是尋師而訂其說 , 渡濤江走吳 , 又走宛陵 , 走建業 , 皆不能得 。 復回武林 , 有以羅司徒知悌為言者 。 知悌 , 字子敬 , 宋寶祐中寺人 , 精於醫 , 得金士劉元素之學 , 而旁參於李杲 、 張從正二家 , 然性倨甚 。 先生謁焉 , 十往返不能通 。 先生志益堅 , 日拱立於其門 , 大風雨不易 。 或告羅曰 :「 此朱彥修也 , 君居江南而失此士 , 人將議君後矣 。」 羅遽修容見之 , 一見如故交 。 為言學醫之要 , 必本於 《 素問 》《 難經 》, 而濕熱相火 , 為病最多 , 人罕有知其秘者 。 兼之長沙之書詳於外感 , 東垣之書詳於內傷 , 必兩盡之 , 治疾方無所憾 。 區區陳裴之學 , 泥之且殺人 。 先生聞之 , 夙疑為之釋然 , 學成而歸 。 鄉之諸醫始皆大驚 , 中而笑且排 , 卒乃大服相推尊 , 願為弟子 。 四方以疾迎候者無虛日 , 先生無不即往 , 雖雨雪載途 , 亦不為止 。 僕伕告痛 , 先生諭之曰 :「 疾者度刻如歲 , 而欲自逸耶 。」 窶人求藥 , 無不與 , 不求其償 , 其困厄無告者 , 不待其招 , 注藥往起之 , 雖百里之遠弗憚也 。 江浙省臣往討閩寇 , 深入瘴地 , 遂以病還錢塘 , 將北歸 。 先生脈之曰 :「 二十日死 。 使道經三衢時召吾 , 可使還燕 , 然亦不能生之也 。」 如期卒於姑蘇驛 。 權貴人以微疾來召 , 危坐中庭 , 列三品儀衛於左右 。 先生脈已 , 不言而出 。 或追問之 , 先生曰 :「 三月後當為鬼 」, 猶有驕氣耶 。 及死 , 其家神先生之醫 , 載粟為壽 , 先生辭之 。 一少年病熱 , 兩顴火赤 , 不能自禁 , 躁走於庭 , 將蹈河 。 先生曰 :「 此陰證也 , 製附子湯飲之 」, 眾為之吐舌 。 飲已 , 其疾如失 。 先生治療 , 其神中若此甚多 , 門人類證有書 , 茲不詳載 。 先生孤高如鶴 , 挺然不群 , 雙目有小大輪 , 日出明 , 雖毅然之色不可凌犯 。 而清明坦夷 , 不事表儤 , 精神充滿 , 接物和粹 , 人皆樂親炙之 。 語言有精魄 , 金鏘鐵鏗 , 使人側耳聳聽 , 有蹶然興起之意 。 而於天人感應殃慶類至之說 , 尤竭力戒厲 , 反覆不厭 , 故其教人也 。 人既易知昏明強弱 , 皆獲其心 。 老者則愛慈祥 , 幼者則樂恭順 , 莫不皆知忠信之為美 。 固未能一變至道 , 去泰去甚 , 有足觀者 。 或有小過 , 深掩密覆 , 唯恐先生之知 。 凡先生杖屨所臨 , 人隨而化 。 浦陽鄭太和 , 十世同居 , 先生為之喜動顏面 , 其家所講冠婚喪祭之禮 , 每咨於先生而後定 。 蓋先生之學 , 稽諸載籍 , 一以躬行為本 , 以一心同天地之大 , 以耳目為禮樂之原 , 積養之久 , 內外一致 。 夜寐即平晝之為 , 暗室即康衢之見 , 汲汲孜孜 , 耄而彌篤 。 每見誇多鬥靡之士 , 輒語之曰 :「 聖賢一言 , 終身行之弗盡矣 。」 以為多 。 至於拈英摘豔之辭 , 尤不樂顧 , 且以吾道蟊賊目之 。 及自為文 , 率以理為宗 , 非有關於綱常治化 , 不輕論也 。 居室垣墉 , 敦尚儉樸 , 服御唯大布寬衣 , 僅取蔽體 ; 藜羹糗飯 , 安之如八珍 。 或在豪大姓家 , 當以肆筵設席 , 水陸之羞 , 交錯於前 。 先生正襟默坐 , 未嘗下箸 。 其清修苦節 , 能為人之所不能為 , 而於世上所悅者 ; 澹然無所嗜 , 惟欲聞人之善 , 如恐失之 , 隨聞隨錄 , 用為世勸 。 遇有不順軌則者 , 必誨其改 , 事有難處者 , 又導之以其方 。 晚年識見尤卓 , 嘗自括蒼還 , 道過永康 , 謂人曰 :「 青田之民囂悍 , 值此法弛令乖之時 , 必依險阻嘯聚為亂 。」 已而果然 。 又嘗告親友曰 :「 吾足跡所及廣矣 , 風俗澆漓甚 , 垂髫之童 , 亦能操狡謀罔上 , 天怒已極 , 必假手殲之 , 盍力善以延其胤乎 。」 時方承平 , 聞者咸笑先生之迂 。 言未幾 , 天下大亂 , 空村無煙火動百餘里 。 先生所著書 , 有 《 宋論 》 一卷 、《 格致餘論 》 若干卷 、《 局方發揮 》 若干卷 、《 傷寒論辨 》 若干卷 、《 外科精要發揮 》 若干卷 、《 本草衍義補遺 》 若干卷 、《 風水問答 》 若干卷 , 凡七種 , 微文奧義 , 多發前人之所未明 。 先生嘗曰 :「 義理精微 , 禮樂制度 , 吾門師友論著已悉 , 吾可以無言矣 。」 故其所述 , 獨志於醫為多 。 先生生於至元辛巳十一月二十八日 , 卒於至正戊戌六月二十四日 , 瀕卒無他言 , 獨呼嗣泛謂曰 :「 醫學亦難矣 , 汝謹識之 。」 言訖 , 端坐而逝 , 享年七十有八 。 娶戚氏 , 道一書院山長象祖之女 , 先三十五年卒 。 子男二 , 嗣衍 、 玉汝 , 嗣衍亦先三年卒 。 女四 , 適傅似翁 、 蔣長源 、 呂文忠 、 張思忠 。 孫男一 , 文椐 ; 女二 , 一適丁榆 , 一尚幼 。 其年十一月日 , 始葬先生於某山之原 。 卒後之五月也 , 先生所居曰丹溪 , 學者尊之而不敢字 , 故因其地稱之曰丹溪先生云 。 夫自學術不明於天下 , 凡聖賢防範人心維持世道之書 , 往往割裂摭拾 , 組織成章 , 流為譁世取寵之具 。 間有注意遺經 , 似若可尚 , 又膠於訓詁之間 , 異同紛拿 , 有如聚訟 。 其視身心 , 皆藐然若不相關 , 此其知識反出於不學庸人之下 。 於戲 , 秦漢以來 , 則或然矣 。 然而靈豸不鳴 , 孽狐之妖弗息 ; 黃鐘不奏 , 瓦缶之音日甚 。 天開文運 , 濂洛奮興 , 遠明凡聖之緒 , 流者遏而止之 , 膠者釋而通之 , 一期闓廓其昏翳 、 挽回其精明而後已 。 至其相傳 , 唯考亭集厥大成 ; 而考亭之傳 , 又唯金華之四賢 , 續其世胤之正 , 如印印泥 , 不差毫末 。 此所以輝連景接而芳猷允著也 。 先生少負任俠之氣 , 不少屈撓 , 及聞道德性命之說 , 遽變之而為剛毅 , 所以局量弘而載任重 , 寤寐先哲 , 唯日不足 , 民吾同胞之念 , 須臾莫忘 。 雖其力或弗支 , 苟遇惠利少足以濡物 , 必委蛇周旋 , 求盡其心 。 應接之際 , 又因人心感發之機 , 而施仁義之訓 , 觸類而長 , 開物成化 。 所謂風雨霜露無非君子之教者 , 要亦不可誣也 。 致思於醫 , 亦能搜隱抉秘 , 倡期南方之絕學 。 嬰疢之家 , 倚以為命 。 先生一布衣耳 , 其澤物有如此者 , 使其得位於朝以行其道 , 則夫明效大驗又將何如哉 ! 嗚呼 ! 先生已矣 ! 其山峙淵澄之色 , 井潔石貞之操 , 與其不可傳者 , 弗能即矣 。 徒因其遺行而誦言之 , 見聞不博 , 惡能得十一於千百之間哉 。 雖然 , 舍是又無足以求先生者 , 敢摭狀之概敘而為之銘曰 。
단계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종족은 의지할 바를 잃고 고을 사람들은 기댈 바를 잃었으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선비들은 모시고 배울 바를 잃었다. 방황하며 멀리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 염이 이를 듣고 마음속으로 더욱 비통하여 목이 메어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관례를 치른 뒤부터 선생의 궤장 곁에서 가까이 모시며 뜻을 논정하고 의문을 물어, 옛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쓰는 법이 깃든 곳을 구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나 염을 못난 사람이라 여기지 않고 나이를 잊은 벗으로 대하여, 반드시 말을 다하고 숨기는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선생을 깊이 아는 사람으로 나 염을 넘는 이가 없었다. 막 선생의 사적과 행실을 모아 글로 써서 후세에 전하려 하였는데, 선생의 아들 옥여와 조카 사범이 갑자기 조심스럽게 내 문에 와서 선생의 사촌 아우 무기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묘 위에 새길 표문을 청하였다.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선생의 휘는 진형이고 자는 언수이며 성은 주씨이다. 그 선조는 한나라 괴리령 운의 후손에서 나왔다. 평릉에 살다가 진나라 영흥 연간에 이르러 임해태수 범이 처음으로 지금의 무주 의오로 이주하였다. 자손이 이어져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이가 많으니, 군지와 가승에 자세히 실려 있다. 송나라 말기에 동당부군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휘는 양우이며 아름다운 덕을 지닌 군자였다. 육경으로 가르쳐 종족을 넓혔다. 부군이 아무개를 낳고 아무개가 적공랑 계를 낳았으며, 적공이 향공진사 환을 낳았으니 선생의 할아버지이다. 아버지의 휘는 원이고 어머니는 모씨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시원하여 책을 읽으면 곧 대의를 깨달았고 성률에 맞춘 부를 지을 때에는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재는 동안 완성하였으므로, 장로들이 모두 큰 그릇으로 여겼다. 그러나 얼마 뒤 이를 버렸다. 협기를 숭상하여 남 아래에 서려 하지 않았으므로 고을의 유력한 집안들이 업신여기면 반드시 바람처럼 성내고 번개처럼 격동하여 관청에 바른 판결을 구하였다. 위아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서로 경계하여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때 고을의 선생인 문의 허공이 동양 팔화산에서 도를 강론하였다. 허공은 위로 고정 주자의 네 대에 걸쳐 전해진 학문을 이어받아 전수 관계가 분명하고 깨달아 증험함이 참되고 절실하였으므로, 삿갓을 메고 찾아가 따르는 사람이 무려 수백 명이었다. 선생은 탄식하였다. “장부가 배울 때 도를 듣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협기만 숭상한다면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옷자락을 걷고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선생의 나이는 이미 서른여섯이었다. 허공은 천명과 인심의 비밀, 내성외왕의 미묘함을 밝혀 주었다. 선생은 이를 듣고 지난날 어둠에 빠져 뒤집히고 그릇되었던 것을 스스로 뉘우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로부터 날마다 깨닫는 바가 있어 마음의 문이 환히 열리고 넓어져 살갗마저 자라는 듯하였다. 밤마다 벗들과 함께 앉아 사경에 이르도록 은밀히 살피고 묵묵히 검증하여 반드시 실천에서 드러내려 하였으며, 거칠고 호방한 기운을 억제하여 순수하고 평탄함으로 돌아갔다. 천리와 인욕의 관문, 성실함과 거짓의 경계를 엄격히 분별하고 굳게 지켜, 조금도 구차하게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 학문이 견고하게 정립되었다. 향시에 인재를 천거하는 해가 되어 선생도 가을 시험에 응시하여, 다행히 한 벼슬을 얻어 배운 것을 시행해 보고자 하였다. 두 번 갔으나 두 번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탄식하였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의가 없는 일이지만, 얻고 잃는 데는 명이 있다. 한 집안을 다스리는 정사를 미루어 향당과 고을에까지 미치게 한다면 어찌 벼슬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앞서 부군이 제전 30여 무를 마련하여 한 구역으로 합쳐 놓았고 후손들이 번갈아 농사를 맡아 계절마다 제물을 올렸다. 그러나 정기적인 제사는 있어도 일정한 장소는 없었다. 선생은 이에 적의정의 옛터에 사당 몇 칸을 세워 선대의 신주를 모시고 세시마다 제사를 지냈다. 다시 주자의 가례를 살펴 의례 절차를 가감하였다. 젊은이와 어른이 모두 모이고 집사들은 공경하였으며, 심의와 큰 띠를 갖추고 차례대로 자리에 나아갔다. 친족끼리 잔치하며 화목하게 어울리되 예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적의정은 부군이 서문청공을 맞아들이려고 지은 곳이었다. 선생은 그곳이 폐허가 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사당 남쪽에 다시 세우고 여러 자손이 그 안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포은이 내려오지 않았으나, 주현은 이를 받들어 별똥별과 불길처럼 급하게 독촉하였다. 한 마을에서 수십 성씨에 미쳤으나 백성들은 감히 따지지 못하였다. 선생이 사는 마을에서는 부유한 백성 두 사람만 올렸다. 군수가 선생을 불러 직접 대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보통 법이 아닌데 그대는 머리가 아깝지 않은가?” 선생은 웃으며 말하였다. “태수께서는 관리이니 머리를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만, 백성인 저는 아끼지 않습니다. 이 해악은 장차 자손에게까지 독을 끼칠 것입니다. 반드시 많은 사람에게 미치게 하려 하신다면, 저는 제 재산으로 두 배를 내어 감당하겠습니다.” 군수는 노하였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현에 포악한 현승이 있어 귀신에게 아첨하고 모독하기를 좋아하였다. 대종의 사당을 수리하여 복을 구하려 하였으나 선생이 동의하지 않을까 두려워 말을 던져 시험하였다. “사람의 생사는 악신이 실로 관장하니, 그 신궁을 고치려 하는데 누가 감히 명을 어기겠는가?” 선생은 말하였다. “나는 하늘에서 명을 받았는데 어찌 흙으로 만든 우상에게 아첨하여 생사를 도모하겠습니까? 또 악신이 지각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지각이 있다면 이 흉년에 백성들이 겨와 부스러기도 배불리 먹지 못하니, 우리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이에게 비로소 복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그 일을 그만두었다. 부역에는 한도가 없었고 아전들이 제멋대로 농간을 부려 백성을 해쳤다. 선생은 같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말하였다. “토지가 있으면 세금과 요역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아전의 미끼에 걸려 서로 무너뜨리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마땅히 의리로 서로 이끌어 힘의 부족함과 넉넉함에 맞추어 나누어 부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따랐으므로 관청 문서가 내려올 때마다 부자처럼 서로 의지하고, 일을 논의할 때는 반드시 먼저 모였다. 가혹한 수탈이 닥치면 선생이 곧 몸소 앞에 나서서 말과 태도를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하였으므로 상관들도 많이 들어주어 줄이거나 덜어 주었다. 현령이 향촌에 권농하러 와서 백성들에게 요구하려는 바가 있었다. 선생은 그가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염려하여 다리싸개와 짚신을 갖추고 길 왼편으로 마중 나갔다. 현령이 놀라 물었다. “선생은 무슨 일로 이렇게 하십니까?” 선생이 답하였다. “백성이 관청을 위해 일할 때 예법상 본래 이렇게 해야 합니다.” 현령이 물었다. “농사를 권장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까?” 선생은 말하였다. “사유지는 관에서 권장할 수고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공전에는 푸른 꼴만 자랄 뿐입니다.” 그때 규전의 부세가 무거워 경작하는 가구들이 많이 도망하였으므로 선생은 이 말로 풍자한 것이다. 현령은 한 번 웃고 떠났다. 마을에 촉서당이라는 못이 있었는데 둘레가 모두 3,600보이고 물을 대는 밭은 6,000무가 넘었다. 둑이 무너지고 물이 말라 여러 번 가뭄을 호소하였다. 선생은 백성들을 이끌어 축조 공사를 일으켜 둑을 설치하고 세 물구멍을 뚫어 수심을 살펴 물을 내보냈다. 백성들은 그 이익을 누렸다. 10년 뒤 산에서 물이 갑자기 몰려와 둑이 다시 무너지자 선생은 재종질 장에게 그 일을 힘써 맡게 하여 완성된 사업을 잇게 하였다. 현의 관리들이 혹 재판의 잘잘못을 물으면 선생은 반드시 마음을 다해 깨우쳐 주었다. 동양의 곽씨 부자 세 사람이 힘없는 백성을 잔혹하게 때려 거의 죽게 하고, 또 미꾸라기 배에 바늘을 꿰어 억지로 삼키게 하였다. 사건이 의오로 이송되어 심문한 결과 그 부자가 모두 사형에 해당하였다. 선생은 말하였다. “고의로 죽이려 한 실정을 따져도 한 사람이 목숨으로 갚으면 됩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따른 것이니 따른 처지를 고려하여 감형해야 합니다. 모두 죽인다면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사건을 상신하자 선생의 의견을 따랐다. 장갑이 작은 길을 가는데 마침 이을이 짐을 메는 도구를 지고 오다가 거의 갑의 눈을 찌를 뻔하였다. 갑이 성내어 그의 귀를 주먹으로 쳐 죽였다. 갑과 을은 모두 가난하였고 갑에게는 아흔 살의 어버이도 있었다. 선생은 말하였다. “갑의 죄를 용서하면 법이 폐해지고, 법대로 하면 갑은 반드시 수척해져 죽으며 어버이도 봉양할 이가 없어 죽습니다. 을의 시신은 길에 드러나 있는데 누가 장사 지내겠습니까? 갑에게 그 장례를 마치게 하고 또한 어버이를 위로한 뒤 천천히 와서 옥에 들어가 중간 정도의 형을 받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어떤 이가 물었다. “갑이 달아나면 어찌합니까?” 선생은 “성의로 대하면 반드시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현에서는 선생의 말대로 하였고 뒤에 사면을 만나 면죄되었다. 한 백성이 선생 묘역의 나무를 베었다. 선생이 물었으나 그가 인정하지 않아 현에 알리고 잡아오려 하였다. 사람들이 번갈아 그를 꾸짖었다. “너는 어찌 어진 분을 침범하였느냐?” 그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사람들이 말하였다. “선생은 덕 있는 어른이다. 어서 나무를 메어 돌려드리면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가 따르자 선생은 과연 더 묻지 않았다. 선생이 오나라 묘담원에 머물 때 비구니가 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새겨 저주에 썼다. 그곳에 머물던 진경이 이를 얻어 폭로하려 하자 비구니가 몹시 두려워하였다. 선생은 이를 알고 계책으로 진경을 밖으로 내보낸 뒤 목각을 부수었다. 진경이 돌아와 성내고 욕하자 선생은 천천히 말하였다. “그대는 선비인데 오초 지방에서 이런 명성을 얻는 것은 그대에게 매우 불리합니다. 돈이 부족하다면 내 재산을 함께 써도 되니 걱정하지 마시오.” 뒤에 비구니가 금과 비단을 수레에 싣고 와서 사례하였으나 선생은 꾸짖어 돌려보냈다. 지방을 맡은 중신들과 염방사들은 선생의 이름을 듣고 만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만난 뒤에는 앞다투어 글을 올려 천거하려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생은 모두 힘껏 사양하였다. 오직 백성의 고통과 관리의 폐단만은 반드시 여러 번 이마를 찌푸리며 아뢰었으니, 몸소 그 고통을 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담회의 정공이 절동에 사신으로 왔을 때 특히 선생을 공경하여 귀한 손님의 예로 대하였다. 사람들 가운데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앞다투어 공에게 선생의 행실을 헐뜯었다. 공은 웃으며 말하였다. “주빙군은 여러분의 장점을 성대히 드러내는데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헐뜯으니, 그 도량의 차이가 어찌 이토록 큽니까?” 모두 부끄러워하여 물러서지도 못하였다. 처음 선생이 장년일 때 어머니께서 비의 병을 앓으셨으므로 의술을 꽤 익혔다. 뒤에는 더욱 연구하고 말하였다. “내가 이미 궁하여 낮은 곳에 있으니 은택을 멀리 미치게 할 수 없다. 멀리 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의술이 아니면 무엇에 힘쓰겠는가?” 당시에는 진사문·배종원이 정한 대관의 197방이 크게 유행하였다. 선생만은 의심하여 말하였다. “약을 쓰는 것은 저울을 잡는 것과 같아 물건의 무게에 따라 앞뒤로 움직여야 한다. 옛 처방이 새로운 증상과 어찌 늘 서로 맞을 수 있겠는가?” 이에 스승을 찾아 그 학설을 바로잡으려 하여 도강을 건너 오로 가고 다시 완릉과 건업으로 갔으나 모두 만나지 못하였다. 무림으로 돌아오자 누군가 나사도 지제를 말해 주었다. 지제의 자는 자경이며 송나라 보우 연간의 환관이었다. 의술에 정통하여 금나라 사람 유원소의 학문을 얻고 이고·장종정 두 집안의 학문도 두루 참고하였으나 성품이 몹시 거만하였다. 선생이 찾아갔으나 열 번을 왕래해도 만나지 못하였다. 선생의 뜻은 더욱 굳어져 날마다 그의 문 앞에서 공손히 서 있었고 큰바람과 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나씨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주언수입니다. 그대가 강남에 살면서 이 선비를 놓치면 사람들이 뒤에 그대를 비난할 것입니다.” 나씨가 급히 용모를 가다듬고 만나니 첫눈에 오랜 벗과 같았다. 의술을 배우는 요체를 말해 주기를, 반드시 《소문》과 《난경》에 근본을 두어야 하며 습열과 상화로 인한 병이 가장 많은데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다. 아울러 장사의 책은 외감에 자세하고 동원의 책은 내상에 자세하므로, 반드시 두 가지를 다 알아야 질병을 치료할 때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진씨와 배씨의 보잘것없는 학문에 얽매이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를 듣고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이 풀렸으며 학문을 이루고 돌아왔다. 고향의 여러 의사들은 처음에는 크게 놀라고 중간에는 비웃으며 배척하였으나, 마침내 크게 복종하여 서로 높이 받들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사방에서 병 때문에 맞아 가려는 이들이 없는 날이 없었으며 선생은 즉시 가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비와 눈이 길에 가득하여도 그만두지 않았다. 하인과 수레꾼이 고달픔을 호소하면 선생은 타일렀다. “병든 사람은 한 시각을 한 해처럼 보내는데 스스로 편하려 하겠느냐?” 가난한 사람이 약을 구하면 주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곤궁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에게는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약을 마련해 찾아가 일으켜 주었으며, 백 리가 멀어도 꺼리지 않았다. 강절의 성신이 민 지방의 도적을 토벌하러 갔다가 장기가 있는 땅에 깊이 들어가 병을 얻어 전당으로 돌아왔고, 장차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선생이 진맥하고 말하였다. “20일 뒤에 죽을 것입니다. 삼구를 지날 때 저를 불렀더라면 연경으로 돌아가게는 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살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고한 때에 고소역에서 죽었다. 권세 있는 귀인이 가벼운 병으로 불러 놓고 뜰 가운데 꼿꼿이 앉아 삼품의 의장과 호위를 좌우에 늘어세웠다. 선생은 진맥을 마치자 말없이 나왔다. 누군가 뒤쫓아 물으니 선생은 말하였다. “석 달 뒤면 귀신이 될 터인데 아직도 교만한 기운이 있는가?” 그가 죽자 집안에서는 선생의 의술을 신묘하게 여겨 곡식을 싣고 사례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하였다. 한 소년이 열병을 앓아 두 광대뼈가 불처럼 붉고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뜰을 조급하게 뛰어다니다가 강에 뛰어들려 하였다. 선생은 “이는 음증이다”라고 하고 부자탕을 만들어 마시게 하였다. 사람들이 놀라 혀를 내둘렀으나 마신 뒤에는 병이 씻은 듯 사라졌다. 선생의 치료가 이처럼 신묘하게 맞은 일이 매우 많으나 문인들이 증상별로 분류한 책이 있으므로 여기에는 자세히 싣지 않는다. 선생은 학처럼 고고하고 꼿꼿하여 무리와 달랐다. 두 눈에는 크고 작은 테가 있어 해가 뜨듯 밝았으며, 굳센 기색은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맑고 밝으며 평탄하고 너그러워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고, 정신이 충만하며 사람을 대할 때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므로 모두 가까이 모시기를 즐거워하였다. 말에는 정기와 기백이 있어 쇠붙이가 울리듯 쟁쟁하여 듣는 이가 귀를 기울이게 하고 분연히 일어나려는 뜻을 품게 하였다. 천인감응과 재앙·경사가 같은 부류에 따라 이른다는 설에 대해서는 더욱 힘을 다해 경계하고 되풀이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였으며, 어리석거나 밝거나 강하거나 약한 이가 모두 그 마음을 얻었다. 노인은 자상함을 좋아하고 어린이는 공손하고 순종함을 즐겨 모두 충신이 아름다운 덕임을 알았다. 한 번에 변하여 도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지나치고 심한 것을 없애어 볼 만한 것이 있었다. 혹 작은 잘못이 있으면 깊이 감추고 덮어 선생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선생의 지팡이와 신이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라서 교화되었다. 포양의 정태화는 열 대가 한집에 살았는데 선생은 이를 기뻐하여 얼굴빛에 드러났다. 그 집안에서 강구한 관혼상제의 예는 매번 선생에게 자문한 뒤 정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서적에서 고증하되 한결같이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한마음으로 천지의 큼과 함께하고 귀와 눈을 예악의 근원으로 삼아, 오래 수양을 쌓아 안팎이 일치하였다. 밤에 잠든 때에도 대낮에 행하던 바와 같고 어두운 방에서도 큰길에 드러나 있을 때와 같았으며, 부지런히 힘써 늙어서 더욱 돈독하였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고 화려함을 다투는 선비를 보면 곧 말하였다. “성현의 한마디는 평생 실천해도 다하지 못합니다.” 이것만으로도 많다고 여겼다. 아름다운 말과 화려한 표현을 골라 꾸미는 글은 더욱 돌아보려 하지 않았고 우리 도를 해치는 좀벌레로 여겼다. 스스로 글을 지을 때에는 대체로 이치를 종지로 삼았으며, 강상과 정치·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면 가볍게 논하지 않았다. 집과 담장에는 검소하고 소박함을 깊이 숭상하였다. 옷은 거친 베로 만든 넓은 옷뿐이어서 몸을 가리는 데만 뜻을 두었으며, 명아주국과 마른 밥도 팔진미처럼 편안히 여겼다. 혹 부유하고 큰 집안에 가서 연석을 펴고 산해진미를 앞에 가득 차려 놓아도 선생은 옷깃을 바로 하고 말없이 앉아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맑게 수양하고 어려운 절조를 지켜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담담하여 즐기는 바가 없었다. 오직 남의 선행을 듣고자 하여 놓칠까 두려워하였고, 들을 때마다 기록하여 세상에 권장하는 데 썼다. 법도에 따르지 않는 이를 만나면 반드시 고치도록 가르쳤으며,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또한 적절한 방법으로 이끌었다. 만년에는 식견이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괄창에서 돌아오다가 영강을 지나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청전의 백성들은 시끄럽고 사나우니, 이처럼 법이 느슨하고 명령이 어그러진 때를 만나면 반드시 험한 지형에 의지해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얼마 뒤 과연 그러하였다. 또 친지들에게 말하였다. “내 발길이 미친 곳이 넓은데 풍속이 매우 야박해졌습니다. 머리를 늘어뜨린 어린아이도 교묘한 꾀로 윗사람을 속일 줄 아니, 하늘의 노여움이 이미 극에 달하여 반드시 남의 손을 빌려 그들을 없앨 것입니다. 어찌 선행에 힘써 후손을 이어 가지 않습니까?” 그때는 태평하였으므로 듣는 이들이 모두 선생이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웃었다. 말한 지 얼마 안 되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텅 빈 마을에 밥 짓는 연기 하나 없는 곳이 걸핏하면 백여 리나 이어졌다. 선생의 저서로는 《송론》 1권, 《격치여론》 몇 권, 《국방발휘》 몇 권, 《상한론변》 몇 권, 《외과정요발휘》 몇 권, 《본초연의보유》 몇 권, 《풍수문답》 몇 권 등 모두 일곱 종류가 있다. 미묘한 문장과 깊은 뜻으로 앞사람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많이 드러내었다. 선생은 일찍이 말하였다. “의리의 정미함과 예악의 제도는 우리 문중의 스승과 벗들이 이미 모두 논하여 지었으니, 나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그 저술은 유독 의술에 뜻을 둔 것이 많았다. 선생은 지원 신사년 11월 28일에 태어나 지정 무술년 6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에 다른 말은 없었고 사범을 불러 “의학도 어렵다. 너는 삼가 기억하라”고만 하였다. 말을 마치고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8세였다. 척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도일서원 산장 상조의 딸이며 35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둘로 사연과 옥여이며, 사연도 3년 전에 먼저 죽었다. 딸은 넷으로 부사옹·장장원·여문충·장사충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하나로 문거이며, 손녀는 둘로 한 명은 정유에게 시집갔고 한 명은 아직 어렸다. 그해 11월 어느 날 비로소 선생을 어느 산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세상을 떠난 지 다섯 달 뒤였다. 선생이 살던 곳을 단계라 하였다. 배우는 이들이 존경하여 감히 자를 부르지 않았으므로 사는 곳을 따라 단계선생이라 불렀다. 학술이 천하에 밝지 못하게 된 뒤로 성현이 인심을 방비하고 세도를 유지하려고 지은 책을 흔히 갈라내고 주워 모아 문장을 짜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총애를 얻는 도구로 흘러가게 하였다. 간혹 전해진 경전에 뜻을 두어 숭상할 만해 보이는 이가 있어도 훈고에 얽매여 같고 다름을 어지럽게 다투는 모습이 여러 송사가 모인 듯하다.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해서는 모두 멀리 떨어져 서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니, 그 지식은 도리어 배우지 않은 평범한 사람 아래에 있다. 아아, 진한 이래로 혹 그러하였다. 그러나 신령한 해치가 울지 않으면 요사한 여우의 괴변이 그치지 않고, 황종을 연주하지 않으면 질그릇 두드리는 소리가 날로 심해진다. 하늘이 문운을 열어 염계와 낙양의 학문이 떨쳐 일어나 멀리 범인과 성인의 실마리를 밝히고, 흘러간 것은 막아 멈추게 하며 굳어 막힌 것은 풀어 통하게 하였다. 오직 어둠을 열어 걷어 내고 정명함을 되돌린 뒤에야 그치려 하였다. 그 학문이 전해짐에 고정만이 대성을 모았으며, 고정의 전승에서는 다시 금화의 네 현인이 정통을 이었으니 도장을 진흙에 찍듯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빛이 잇고 그림자가 이어져 아름다운 도가 참으로 드러났다. 선생은 젊어서 협기를 지니고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나 도덕과 성명에 관한 말을 듣자 곧 변하여 강직하고 굳세어졌다. 이로써 도량이 넓고 짊어진 임무가 무거워, 자나 깨나 앞선 철인들을 생각하며 날이 부족하다고 여겼고, 백성이 나의 동포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라도 은혜와 이익이 조금이나마 사물에 적셔질 수 있는 기회를 만나면 반드시 정성스럽게 주선하여 마음을 다하려 하였다. 사람을 응대할 때에는 또 그 마음이 감동하여 일어나는 계기를 따라 인의의 가르침을 베풀고, 부류를 미루어 넓혀 사물을 깨우치고 교화를 이루었다. 이른바 바람·비·서리·이슬 어느 것도 군자의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역시 거짓으로 돌릴 수 없다. 의술에 생각을 미쳐서도 감추어진 것을 찾고 비밀을 밝혀 남방에서 끊긴 학문을 일으켰다. 병든 이가 있는 집안은 선생에게 생명을 의탁하였다. 선생은 한낱 평민이었는데 사물에 은택을 미침이 이와 같았다. 만일 조정에서 지위를 얻어 그 도를 시행하였다면 뚜렷하고 큰 효험은 또 어떠하였겠는가! 아아, 선생은 이제 떠나셨다. 산처럼 우뚝하고 깊은 못처럼 맑은 모습, 우물처럼 깨끗하고 돌처럼 굳은 절조와 말로 전할 수 없는 경지에 이제 다가갈 수 없다. 다만 남긴 행실을 따라 말로 외울 뿐이니, 보고 들은 것이 넓지 못한 내가 어찌 천백 가운데 열이나 하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버리면 선생을 구할 길이 없으므로 감히 행장의 대강을 취하여 서술하고 명을 짓는다.
濂洛有作 , 性學復明 。 考亭承之 , 集厥大成 。 化覃荊揚 , 以及閩粵 。 時雨方行 , 區萌畢達 。 世胤之正 , 實歸金華 。 綿延四葉 , 益燁其葩 。 闢諸上尊 , 置彼逵路 。 隨其志分 , 不爽其度 。 有美君子 , 欲振其奇 。 血氣方剛 , 疇能侮予 。 七尺之軀 , 忍令顛越 。 壯齡已逾 , 亟更其轍 。 更之伊何 , 我笈有書 。 負而東遊 , 以祛所疑 。 非刻非厲 , 曷圖曷究 。 豈止惜陰 , 夜亦為晝 。 昔離其疃 , 今廓其蒙 。 始知人心 , 與宇宙同 。 出將用世 , 時有小利 。 孚惠家邦 , 庶享厥志 。 勤我祠事 , 以帥其宗 。 況有詩書 , 以陶以礱 。 以暢其施 , 期壽夫物 。 苛躬可捐 , 我豈遑恤 。 仁義之言 , 繩繩勿休 。 昭郎道真 , 釋除欲仇 。 上帝有赫 , 日注吾目 。 天人之交 , 間不容粟 。 聽者聳然 , 如聞巨鏞 。 有聲鏗鏘 , 無耳不聰 。 旁溢於醫 , 亦紹絕躅 。 開闡玄微 , 功利尤博 。 斂其豪英 , 變為毅弘 。 所以百為 , 度越於人 。 呫呫世儒 , 出入口耳 。 競藻鬥華 , 柝門殊軌 。 以經為戲 , 此孰甚焉 。 不有躬行 , 其失曷鐫 。 世塗方冥 , 正資揚燎 。 夢夢者天 , 使埋其耀 。 精神上徵 , 定為長庚 。 與造化遊 , 白光焞焞 。 表德幽墟 , 遵古之義 。 僉曰允哉 , 是詞無愧 。
염계와 낙양에서 학문이 일어나 성에 대한 학문이 다시 밝아졌네. 고정이 이를 이어 그 큰 성취를 모았네. 교화가 형주와 양주에 두루 미쳐 민과 월에까지 이르렀네. 때맞은 비가 막 내리니 땅속 싹이 모두 자라났네. 정통의 전승은 실로 금화에 돌아가 네 대를 이어 꽃이 더욱 빛났네. 비유하자면 훌륭한 술을 큰길에 놓아두어, 사람마다 뜻과 분수에 따라 알맞게 취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 것과 같네. 아름다운 군자가 있어 그 기이한 재주를 떨치려 하였네. 혈기가 한창 굳세니 누가 나를 업신여길 수 있으랴. 일곱 자 몸을 차마 넘어지고 벗어나게 하겠는가. 장년을 이미 넘었으니 서둘러 길을 바꾸었네. 바꿈이란 무엇인가. 내 책상자에 책이 있어 지고 동쪽으로 가서 의문을 없애는 일이네. 힘쓰고 가다듬지 않으면 무엇을 도모하고 연구하랴. 어찌 낮의 시간만 아꼈으랴, 밤도 낮으로 삼았네. 옛날에는 그 터전을 떠났으며 이제는 가려진 어둠을 넓게 열었네. 비로소 사람의 마음이 우주와 같음을 알았네. 나아가 세상에 쓰려 하니 때로 작은 이로움이 있었네. 은혜를 집안과 나라에 믿음직하게 펴서 그 뜻을 누리려 하였네. 제사를 부지런히 받들어 종족을 이끌었네. 더구나 시서가 있어 빚고 갈아 주었네. 베풂을 널리 하여 만물이 오래 살기를 기약하였네. 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어찌 돌볼 겨를이 있으랴. 인의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져 그치지 않았네. 도의 참됨을 환히 밝히고 욕심이라는 원수를 풀어 없앴네. 상제는 밝게 드러나 날마다 내 눈에 비치니, 하늘과 사람의 사귐에는 좁쌀 하나 들어갈 틈도 없네. 듣는 이들은 큰 종소리를 들은 듯 정신을 차렸네. 쟁쟁히 울리는 소리에 밝게 듣지 않는 귀가 없었네. 의술에까지 넘쳐 퍼져 또한 끊어진 자취를 이었네. 현묘하고 미세한 것을 밝혀 공효와 이익이 더욱 넓었네. 호방하고 영특한 기운을 거두어 굳세고 너그러움으로 바꾸었으니, 온갖 행위가 남들을 뛰어넘었네. 세상의 선비들은 중얼거리며 입과 귀로만 주고받고, 문채와 화려함을 다투며 문을 나누어 서로 다른 길로 가네. 경전을 놀이로 삼으니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몸소 실천함이 없다면 그 잘못을 어찌 깎아 내겠는가. 세상길이 막 어두워져 바로 횃불을 높이 들 힘이 필요한데, 어두운 하늘이 그 빛을 묻게 하였네. 정신은 위로 올라가 반드시 장경성이 되어 조화와 함께 노닐며 흰빛을 환히 비추리라. 어두운 무덤에 덕을 드러내는 것은 옛 뜻을 따름이니, 모두 참되다고 하여 이 글에 부끄러움이 없네.
丹溪翁傳
단계옹전
丹溪翁者 , 婺之義烏人也 , 姓朱氏 , 諱震亨 , 字彥修 , 學者尊之曰丹溪翁 。 翁自幼好學 , 日記千言 。 稍長 , 從鄉先生治經 , 為舉子業 。 後聞許文懿公得朱子四傳之學 , 講道八華山 , 復往拜焉 。 益聞道德性命之說 , 宏深粹密 , 遂為專門 。 一日 , 文懿謂曰 :「 吾臥病久 , 非精於醫者不能以起之 。 子聰明異常人 , 其肯遊藝於醫乎 ?」 翁以母病脾 , 於醫亦粗習 , 及聞文懿之言 , 即慨然曰 :「 士苟精一藝 , 以推及物之仁 , 雖不仕於時 , 猶仕也 。」 乃悉焚棄向所習舉子業 , 一於醫致力焉 。 時方盛行陳師文 、 裴宗元所定大觀二百九十七方 。 翁窮晝夜是習 , 既而悟曰 :「 摻古方以治今病 , 其勢不能以盡合 。 苟將起度量 , 立規矩 , 稱權衡 , 必也 《 素 》《 難 》 諸經乎 。 然吾鄉諸醫鮮克知之者 。」 遂治裝出遊 , 求他師而叩之 。 乃渡浙河 , 走吳中 , 出宛陵 , 抵南徐 , 達建業 , 皆無所遇 。 及還武林 , 忽有以其群羅氏告者 。 羅名知悌 , 字子敬 , 世稱太無先生 , 宋理宗朝寺人 , 學精於醫 , 得金劉完素之再傳 , 而旁通張從正 、 李杲二家之說 。 然性褊甚 , 恃能厭事 , 難得意 。 翁往謁焉 , 凡數往返 , 不與接 。 已而求見愈篤 , 羅乃進之曰 :「 子非朱彥修乎 ?」 時翁已有醫名 , 羅故知之 。 翁既得見 , 遂北面再拜以謁 , 受其所教 。 羅遇翁亦甚歡 , 即授以劉 、 張 、 李諸書 , 為之敷揚三家之旨 , 而一斷於經 , 且曰 :「 盡去而舊學 , 非是也 。」 翁聞其言 , 渙焉無少疑滯於胸臆 。 居無何 , 盡得其學以歸 。 鄉之諸醫 , 泥陳裴之學者 , 聞翁言 , 即大驚而笑且排 。 獨文懿喜曰 :「 吾疾其遂瘳矣乎 !」 文懿得末疾 , 醫不能療者餘十年 。 翁以其法治之 , 良驗 。 於是諸醫之笑且排者 , 始皆心服口譽 , 數年之間 , 聲聞頓著 。 翁不自滿足 , 益以三家之說推廣之 , 謂劉 、 張之學 , 其論臟腑氣化有六 , 而於濕熱相火三氣致病為最多 。 遂以推陳致新 , 瀉火之法療之 , 此固高出前代矣 。 然有陰虛火動 , 或陰陽兩虛 , 濕熱自盛者 , 又當消息而用之 。 謂李之論飲食勞倦 , 內傷脾胃 , 則胃脘之陽不能以升舉 , 並及心肺之氣 , 陷入中焦 , 而用補中益氣之劑治之 , 此亦前人之所無也 。 然天不足於西北 , 地不滿於東南 。 天 , 陽也 ; 地 , 陰也 。 西北之人 , 陽氣易於降 ; 東南之人 , 陰火易於升 。 苟不知此 , 而徒守其法 , 則氣之降者固可愈 , 而於其升者亦從而用之 , 吾恐反增其病矣 。 乃以三家之論 , 去其短而用其長 , 又復參之以太極之理 ,《 易 》《 禮記 》《 通書 》《 正蒙 》 諸書之義 , 貫穿 《 內經 》 之言 , 以尋其指歸 。 而謂 《 內經 》 之言火 , 蓋與太極動而生陽 , 五性感動之說有合 ; 其言陰道虛 , 則又與 《 禮記 》 之養陰意同 。 因作相火及陽有餘陰不足二論以發揮之 。 其論相火有曰 : 陽動而變 , 陰靜而合 , 而生水火木金土 。 然火有二焉 , 曰君火 , 曰相火 。 君火者 , 人火也 ; 相火者 , 天火也 。 火內陰而外陽 , 主乎動者也 。 故凡動皆屬火 。 以名而言 , 形質相生 , 配於五行 , 故謂之君 ; 以位而言 , 生於虛無 , 守位稟命 , 故謂之相 。 天生物 , 恆於動 ; 人有此生 , 亦恆於動 。 然其所以恆於動者 , 皆相火助之也 。 見於天者 , 出於龍雷則木之氣 , 出於海則水之氣也 ; 具於人者 , 寄於肝腎二部 , 肝屬木而腎屬水也 。 膽者肝之府 , 膀胱者腎之府 , 心胞絡者腎之配 , 三焦以焦言 , 而下焦司肝腎之分 , 皆陰而下也 。 天非此火不能生 , 人非此火不能以有生 。 天之火雖出於木 , 而皆本乎地 , 故雷非伏 , 龍非蟄 , 海非附於地 , 則不能鳴 , 不能飛 , 不能波也 。 鳴也 , 飛也 , 波也 , 動而為相火者也 , 肝腎之陰 , 悉具相火 , 人而同乎天也 。 或曰 : 相火天人所同 , 東垣何以指為元氣之賊 ? 又謂火與元氣不兩立 , 一勝則一負 , 然則如之何而可使之無勝負乎 ? 曰 : 周子曰 : 神發知矣 。 五性感動而萬事出 , 五者之性 , 為物所感 , 不能不動 。 謂之動者 , 即 《 內經 》 五火也 。 相火易動 , 五性厥陽之火 , 又從而扇之 , 則妄動矣 。 火既妄動 , 則煎熬真陰 , 陰虛則病 , 陰絕則死 。 君火之氣 , 經以暑與熱言之 , 而相火之氣 , 則以火言 , 蓋表其暴悍酷烈有甚於君火也 。 故曰 :「 相火元氣之賊 。」 周子曰 : 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 朱子亦曰 : 必使道心常為之主 , 而人心每聽命焉 , 此善處乎火者也 。 人心聽命於道心 , 而又能主之以靜 , 彼五火將寂然不動 。 而相火者 , 惟有扶助造化 , 而為生生不息之運用爾 , 夫何元氣之賊哉 ! 或曰 :《 內經 》 相火注 , 言少陰少陽矣 , 未嘗言及厥陰太陽 , 而吾子言之 , 何也 ? 曰 : 足太陽少陰 , 東垣嘗言之 , 治以炒柏 , 取其味辛 , 能瀉水中之火 。 戴人亦言膽與三焦 , 肝與胞絡 , 皆從火治 , 此歷指龍雷之火也 。 余以天人之火 , 皆生於地 , 如上文所云者 , 實廣二公之意耳 。 或曰 :《 內經 》 言火者非一 , 往往於六氣中見之 , 而言臟腑者未之有也 , 二公豈他有所據耶 ? 曰 : 經以百病皆生於風寒暑濕燥火之動而為變者 , 岐伯歷指病機一十九條 , 而屬火者五 , 此非相火為病之出於臟腑者乎 ? 考之 《 內經 》, 諸熱瞀瘛 , 則屬之火 ; 諸狂燥越 , 則屬之火 ; 諸病附腫 , 痛酸驚駭 , 則屬之火 。 又 《 原病式 》 曰 : 諸風掉眩 , 屬於肝火之動也 ; 諸風膹郁病痿 , 屬於肺火之升也 ; 諸濕腫滿 , 屬於脾火之勝也 ; 諸痛癢瘡瘍 , 屬於心火之用也 。 是皆火之為病出於臟腑者然也 。 噫 ! 以陳無擇之通達 , 猶以暖識論君火 , 日用之火論相火 , 是宜後人之聾瞽哉 ! 其論陽有餘陰不足 , 有曰 :「 人受天地之氣以生 , 天之陽氣為氣 , 地之陰氣為血 」, 然氣常有餘而血常不足 , 何為其然也 ? 天 , 大也 , 為陽而運於地之外 。 地居天之中 , 為陰 , 而天之大氣舉之 。 日 , 實也 , 屬陽而運於月之外 ; 月 , 缺也 , 屬陰而稟日之光以為明者也 。 則是地之陰已不勝夫天之陽 , 月之陰亦不敵於日之陽 。 天地日月尚然 , 而況於人乎 ! 故人之生 , 男子十六歲而精通 , 女子十四歲而經行 , 是有形之後 , 猶有待於乳哺水穀之養 , 而後陰可與陽配成乎人 , 而為人之父母 。 古人必近三十二十而後嫁娶者 , 可見陰氣之難於成 , 而古人之善於保養也 。 錢仲陽於腎有補而無瀉 , 其知此意者乎 。 又按 《 禮記 》 注曰 :「 人惟五十 , 然後養陰者有以加 」,《 內經 》「 年至四十 , 陰氣自半而起居衰矣 」, 男子六十四歲而精絕 , 女子四十九歲而經斷 。 夫以陰氣之成 , 止為三十年之運用 , 而竟已先虧 , 可不知所保養也 。 經曰 :「 陽者天也 , 主外 ; 陰者地也 , 主內 。 故陽道實 , 陰道虛 。」 斯言豈欺我哉 ? 或曰 : 遠取諸天地日月 , 近取諸男子之身 , 曰有餘 , 曰不足 , 吾已知之矣 。 人在氣交之中 , 今欲順陰陽之理而為攝養之法 , 如之何則可 ? 曰 : 主閉藏者 , 腎也 ; 司疏泄者 , 肝也 。 二臟皆有相火 , 而其繫上屬於心 , 心君火也 。 為物所感則易於動 , 心動則相火翕然而隨 。 聖賢教人收心養心 , 其旨深矣 。 天地以五行更迭衰旺而成四時 , 人之五臟六腑 , 亦應之而衰旺 , 四月屬巳 , 五月屬午 , 為火不旺 。 火為肺金之夫 , 火旺則金衰 。 六月屬未 , 為土大旺 , 土為水之夫 , 土旺則水衰 , 況腎水嘗藉肺金為母 , 以補助其不足 。 古人於夏月必獨宿而淡味 , 兢兢業業 , 保養金水二臟 , 正嫌火土之旺爾 。《 內經 》 又曰 :「 冬藏精者 , 春不病濕 」, 十月屬亥 , 十一月屬子 , 正元氣潛伏閉藏 , 以養其本然之真 , 而為來春升動發生之本 。 若於此時不恣欲以自戕 , 至春升之際 , 根本壯實 , 氣不輕浮 , 尚何病之可言哉 ? 於是翁之醫益聞 , 四方以病來迎者 , 遂輻輳於道 , 翁咸往赴之 。 其所治病凡幾 , 病之狀何如 , 施何良方 , 飲何藥而愈 , 自前至今驗者何人何縣裡主名 , 得諸見聞 , 班班可紀 。 浦江鄭義士 , 病滯下 , 一夕 , 忽昏僕 , 目上視 , 溲注而汗瀉 。 翁診之 , 脈大無倫 , 即告曰 :「 此陰虛陽暴絕也 , 蓋得之病後酒且內 , 然吾能愈之 。」 急命治人參膏 , 而且促灸其氣海 。 頃之 , 手動 , 又頃而唇動 。 及參膏成 , 三飲之 , 蘇矣 。 其後服參膏盡數斤 , 病已 。 天台周進士 , 病惡寒 , 雖暑亦必以綿蒙其首 , 服附子數百 , 增劇 。 翁診之 , 脈滑而數 , 即告曰 :「 此熱甚而反寒也 」, 乃以辛涼之劑 , 吐痰一升許 , 而蒙首之綿減半 。 仍用防風通聖飲之 , 愈 。 周固喜甚 , 翁曰 :「 病愈後 , 須淡食以養胃 , 內觀以養神 , 則水可生 , 火可降 , 否則附毒必發 , 殆不可救 。 彼不能然 , 後告疽發背死 。 浙省平章 , 南征閩粵還 , 病反胃 , 醫以為可治 。 翁診其脈 , 告曰 :「 公之病不可言也 」, 即出 , 獨告其左右曰 :「 此病得之驚後而使內 , 火木之邪相挾 , 氣傷液亡 , 腸胃枯損 , 食雖入而不化 , 食既不化 , 五臟皆無所稟 。 去此十日 , 死 。」 果如言 。 鄭義士家一少年 , 秋初病熱 , 口渴而妄語 , 兩顴火赤 , 醫作大熱治 。 翁診之 , 脈弱而遲 , 告曰 :「 此作勞後病溫 , 惟當服補劑自已 , 今六脈皆搏手 , 必涼藥所致 。」 竟以附子湯啜之 , 應手而瘥 。 浙東憲幕傅氏子 , 病妄語 , 時若有所見 , 其家妖之 。 翁切其脈 , 告曰 :「 此病痰也 , 然脈虛弦而沉數 , 蓋得之當暑飲酸又大驚 。」 傅曰 :「 然 ! 嘗夏因勞而甚渴 , 恣飲梅水一二升 , 又連得驚數次 , 遂病 。」 翁以治痰補虛之劑處之 , 旬浹愈 。 里人陳時叔病脹 , 腹如斗 , 醫用利藥轉加 。 翁診之 , 脈數而澀 , 告曰 :「 此得之嗜酒 , 嗜酒則血傷 。 血傷則脾土之陰亦傷 , 胃雖受谷 , 不能以轉輸 , 故陽升陰降而否矣 。」 陳曰 :「 某以嗜酒 , 前後溲見血者有年 。」 翁用補血之劑投之 , 驗 。 權貴人以微疾來召 , 見翁至 , 坐中堂自如 。 翁診其脈 , 不與言而出 。 使詰之 , 則曰 :「 公病在死法中 , 不出三月 , 且入鬼錄 。」 顧猶有驕氣耶 , 後果如期死 。 一老人病目無見 , 使來求治 。 翁診其脈 , 微甚 , 為制人參膏飲之 , 目明如常時 。 後數日 , 翁復至 , 忽見一醫在庭煉礞石 , 問之 , 則已服之矣 。 翁愕然曰 :「 此病得之氣大虛 , 今不救其虛 , 而反用礞石 , 不出此夜必死 。」 至夜參半 , 氣奄奄不相屬而死 。 一男子病小便不通 , 醫治以利藥 , 益甚 。 翁診之 , 右寸頗弦滑 , 曰 :「 此積痰病也 , 積痰在肺 。 肺為上焦 , 而膀胱為下焦 , 上焦閉則下焦塞 , 譬如滴水之器 , 必上竅通 , 而後下竅之水出焉 。」 乃以法大吐之 , 吐已 , 病如失 。 一婦人病不知 , 稍蘇 , 即號叫數四而復昏 。 翁診之 , 肝脈弦數而且滑 , 曰 :「 此怒心所為 , 蓋得之怒而強酒也 。」 詰之 , 則不得於夫 , 每遇夜 , 引滿自酌解其懷 。 翁治以流痰降火之劑 , 而加香附以散肝分之郁 , 立愈 。 一女子病不食 , 面北臥者且半載 , 醫告術窮 。 翁診之 , 肝脈弦出左口 , 曰 :「 此思男子不得 , 氣結於脾故耳 。」 叩之 , 則許嫁夫入廣且五年 。 翁謂其父曰 :「 是病惟怒可解 , 蓋怒之氣擊而屬木 , 故能沖其土之結 。 今茅觸之使怒耳 。」 父以為不然 。 翁入而掌其面者三 , 責以不當有外思 , 女子號泣大怒 , 怒已 , 進食 。 翁復潛謂其父曰 :「 思氣雖解 , 然必得喜 , 則庶不再結 。」 乃詐以夫有書 , 旦夕且歸 。 後三月 , 夫果歸而病不作 。 一婦人產後 , 有物不上如衣裾 , 醫不能喻 。 翁曰 :「 此子宮也 , 氣血虛 , 故隨子而下 。」 即與黃耆當歸之劑 , 而加升麻舉之 , 仍用皮工之法 , 以五倍子作湯洗濯 , 皴其皮 。 少選 , 子宮上 。 翁慰之曰 :「 三年後可再生兒 , 無憂也 。」 如之 。 一貧婦寡居病癩 , 翁見之惻然 , 乃曰 :「 是疾世號難治者 , 不守禁忌耳 。 是婦貧而無厚味 , 寡而無欲 , 庶幾可療也 。」 即自具藥療之 , 病愈後復投四物湯數百 , 遂不發動 。 翁之為醫 , 皆此類也 。 蓋其遇病施治 , 不膠於古方 , 而所療皆中 。 然於諸家方論 , 則靡所不通 。 他人靳靳守古 , 翁則操縱取捨而卒與古合 。 一時學者咸聲隨影附 , 翁教之亹亹忘疲 。 一日 , 門人趙良仁問大極之旨 。 翁以陰陽造化之精微與醫道相出入者論之 , 且曰 :「 吾於諸生中 , 未嘗論至於此 。 今以吾子所問 , 故偶及之 , 是蓋以道相告 , 非徒以醫言也 。 趙出語人曰 :「 翁之醫其始橐籥於此乎 ! 羅成之自金陵來見 , 自以為精仲景學 , 翁曰 :「 仲景之書 , 收拾於殘篇斷簡之餘 , 然其間或文有不備 , 或意有未盡 , 或編次之脫落 , 或義例之乖舛 , 吾每觀之 , 不能以無疑 。」 因略摘疑義數條以示 , 羅尚未悟 。 及遇治一疾 , 翁以陰虛發熱而用益陰補血之劑療之 , 不三日而愈 。 羅乃嘆曰 :「 以某之所見 , 未免作傷寒治 。 今翁治此 , 猶以芎歸之性辛溫 , 而非陰虛者所宜服 , 又況汗下之誤乎 !」 翁春秋既高 , 乃徇張翼等所請 , 而著 《 格致餘論 》《 局方發揮 》《 傷寒辨疑 》《 本草衍義補遺 》《 外科精要新論 》 諸書 , 學者多誦習而取則焉 。 翁簡愨貞良 , 剛嚴介特 , 執心以正 , 立身以誠 , 而孝友之行 , 實本乎天質 。 奉時祀也 , 訂其禮文而敬泣之 ; 事母夫人也 , 時其節宣以忠養之 。 寧歉於己而必致豐於兄弟 ; 寧薄於己子而必施厚於兄弟之子 。 非其友不友 , 非其道不道 。 好論古今得失 , 慨然有天下之憂 。 世之名公卿 , 多折節下之 , 翁謂直陳治道 , 無所顧忌 。 然但語及榮利事 , 則拂衣而起 。 與人交 , 一以三綱五紀為去就 。 嘗曰 :「 天下有道 , 則行有枝葉 ; 天下無道 , 則辭有枝葉 。」 夫行 , 本也 ; 辭 , 從而生者也 。 苟見枝葉之辭 , 去本而末是務 , 輒怒溢顏面 , 若將浼焉 。 翁之卓卓如是 , 則醫又特一事而已 。 然翁講學行事之大方 , 已具吾友宋太史濂所為翁墓誌 , 茲故不錄 。 而竊錄其醫之可傳者為翁傳 , 庶使後之君子得以互考焉 。
단계옹은 무주의 의오 사람으로 성은 주씨, 휘는 진형, 자는 언수이며, 배우는 사람들이 높여 단계옹이라 하였다. 옹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천 마디를 외웠다. 조금 자라서는 고을의 선생에게 경서를 배워 과거 공부를 하였다. 뒤에 허문의공이 주자에게서 네 대째 전해진 학문을 얻어 팔화산에서 도를 강론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찾아가 배알하였다. 도덕과 성명에 관한 넓고 깊으며 순수하고 치밀한 설을 더욱 듣고 마침내 한 분야에 전념하였다. 하루는 문의공이 말하였다. “내가 병으로 누운 지 오래되었는데 의술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일으킬 수 없다. 자네는 보통 사람과 달리 총명하니 의술이라는 기예를 익힐 뜻이 있겠는가?” 옹은 어머니께서 비의 병을 앓으셨으므로 의술도 대강 익혔는데, 문의공의 말을 듣자 곧 의연히 말하였다. “선비가 한 기예에 정통하여 사물에 미치는 인을 넓힌다면, 당시에 벼슬하지 않더라도 벼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전에 익히던 과거 공부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오로지 의술에 힘썼다. 당시에는 진사문·배종원이 정한 대관의 297방이 크게 유행하였다. 옹은 밤낮을 다해 익히다가 얼마 뒤 깨닫고 말하였다. “옛 처방을 잡고 지금의 병을 치료하면 형편상 모두 맞을 수 없다. 도량을 세우고 규구를 정하며 저울질하려면 반드시 《소》와 《난》 등의 경전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고을의 여러 의사 중 이를 아는 이는 드물다.” 마침내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 다른 스승을 찾아 물었다. 절하를 건너 오중으로 가고 완릉을 나서 남서에 이르렀으며 건업까지 갔으나 만나는 바가 없었다. 무림으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나씨를 알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씨의 이름은 지제, 자는 자경이며 세상에서는 태무선생이라 불렀다. 송나라 이종 때의 환관으로 의학에 정통하였고, 금나라 유완소에게서 두 대째 전해진 학문을 얻었으며 장종정·이고 두 집안의 설에도 두루 통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몹시 편협하여 능력을 믿고 일을 싫어하였으므로 마음에 들기 어려웠다. 옹이 찾아가 여러 번 왕래하였으나 만나 주지 않았다. 얼마 뒤 만나려는 뜻이 더욱 간절해지자 나씨가 비로소 들이며 말하였다. “그대는 주언수가 아닌가?” 당시 옹은 이미 의술로 이름이 있었으므로 나씨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옹은 만나게 되자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나씨도 옹을 매우 기쁘게 대하며 곧 유씨·장씨·이씨의 여러 책을 주고 세 집안의 뜻을 널리 풀어 설명하되 한결같이 경전으로 판단하였다. 또 말하였다. “그대의 옛 학문은 모두 버려라. 옳지 않다.” 옹은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조금의 의심이나 막힘도 없이 환히 풀렸다. 얼마 머물지 않아 그 학문을 다 얻고 돌아왔다. 고을의 의사 가운데 진씨와 배씨의 학문에 얽매인 이들은 옹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비웃고 배척하였다. 오직 문의공만은 기뻐하여 말하였다. “내 병이 마침내 낫겠구나!” 문의공은 말단의 병을 얻어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한 지 10여 년이었는데, 옹이 그 방법으로 치료하자 매우 효과가 있었다. 이에 비웃고 배척하던 의사들이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고 입으로 칭찬하기 시작하여 몇 해 사이에 명성이 갑자기 드러났다. 옹은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세 집안의 설을 더욱 미루어 넓혔다. 유씨·장씨의 학문은 장부의 기화에 여섯 가지가 있다고 논하되 습·열·상화의 세 기로 생기는 병이 가장 많다고 보고, 묵은 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이루며 화를 사하는 방법으로 치료하였으니 이는 본래 이전 시대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음허로 화가 동하거나 음양이 모두 허한데 습열이 저절로 왕성한 경우에는 또한 헤아려 조절하여 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씨의 논의는 음식과 노권으로 비위를 내상하면 위완의 양이 올라가지 못하고 심폐의 기까지 중초로 꺼져 들어가므로 보중익기하는 약제로 치료한다는 것이니, 이것도 앞사람에게 없던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서북이 부족하고 땅은 동남이 차지 못한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므로, 서북 사람은 양기가 내려가기 쉽고 동남 사람은 음화가 올라가기 쉽다. 이를 알지 못하고 그 방법만 지키면 기가 내려간 사람은 나을 수 있지만 기가 올라간 사람에게도 따라서 쓰게 되므로, 도리어 병이 더해질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이에 세 집안의 논의에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였으며, 다시 태극의 이치와 《역》·《예기》·《통서》·《정몽》 등의 뜻을 참고하여 《내경》의 말을 꿰뚫고 그 지향점을 찾았다. 《내경》에서 화를 말한 것은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는다는 설 및 오성이 감응하여 움직인다는 설과 합치하며, 음도가 허하다고 한 것은 《예기》의 음을 기른다는 뜻과 같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상화와 양유여음부족의 두 논을 지어 밝혀 설명하였다. 그 상화를 논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양이 움직여 변화하고 음이 고요히 합하여 수·화·목·금·토가 생긴다. 그러나 화에는 둘이 있으니 군화와 상화이다. 군화는 사람의 화이고 상화는 하늘의 화이다. 화는 안이 음이고 밖이 양이며 움직임을 주관하므로, 무릇 움직이는 것은 모두 화에 속한다. 이름으로 말하면 형질이 서로 생겨 오행에 배합되므로 군이라 한다. 자리로 말하면 허무에서 생겨나 자리를 지키고 명을 받으므로 상이라 한다. 하늘이 만물을 낳음은 늘 움직임에 있고, 사람의 삶도 늘 움직임에 있다. 그러나 늘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상화가 돕기 때문이다. 하늘에 나타나는 것은 용과 우레에서 나오면 목의 기이고 바다에서 나오면 수의 기이다. 사람에게 갖추어진 것은 간과 신 두 부위에 깃드는데, 간은 목에 속하고 신은 수에 속한다. 담은 간의 부이고 방광은 신의 부이며 심포락은 신의 짝이다. 삼초를 초로 말하면 하초가 간신의 부위를 맡으니 모두 음이면서 아래에 있다. 하늘은 이 화가 없으면 낳을 수 없고 사람은 이 화가 없으면 생명을 지닐 수 없다. 하늘의 화는 비록 목에서 나오지만 모두 땅에 근본을 둔다. 그러므로 우레가 잠복하지 않고 용이 칩거하지 않으며 바다가 땅에 붙어 있지 않으면, 울 수도 날 수도 물결칠 수도 없다. 울고 날고 물결치는 것은 움직여 상화가 되는 것이다. 간신의 음에도 상화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사람이 하늘과 같은 점이다.” 어떤 이가 물었다. “상화는 하늘과 사람에게 공통된 것인데 동원은 왜 원기의 적이라고 지적하였는가? 또 화와 원기는 함께 설 수 없어 하나가 이기면 하나가 진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서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게 할 수 있는가?” 답하였다. “주자(周子)는 ‘신이 발하여 앎이 생기고 오성이 감응하여 움직여 만사가 나온다’고 하였다. 다섯 성은 사물에 감응하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며,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곧 《내경》의 오화이다. 상화는 움직이기 쉬운데 오성의 궐양의 화가 또 따라서 부채질하면 함부로 움직이게 된다. 화가 함부로 움직이면 진음을 졸이고 태우니, 음이 허하면 병이 들고 음이 끊어지면 죽는다. 군화의 기는 경전에서 서와 열로 말하였으나 상화의 기는 화로 말하였으니, 그 사납고 혹렬함이 군화보다 심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상화는 원기의 적’이라 하였다. 주자(周子)는 ‘성인은 중정인의로 정하고 고요함을 위주로 한다’고 하였으며, 주자(朱子)도 또한 ‘반드시 도심이 늘 주인이 되게 하고 인심이 언제나 명을 듣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화를 잘 다스리는 것이다. 인심이 도심의 명을 듣고 또 고요함으로 주재할 수 있으면 저 오화는 적연하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상화는 오직 조화를 돕고 생명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용이 될 뿐이니, 어찌 원기의 적이겠는가!” 어떤 이가 물었다. “《내경》의 상화 주석에서는 소음과 소양을 말하였고 궐음과 태양까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대가 말하는 것은 왜인가?” 답하였다. “족태양과 족소음은 동원이 일찍이 말하였으며, 볶은 황백으로 치료하여 그 매운맛이 수중의 화를 사할 수 있음을 취하였다. 대인도 담과 삼초, 간과 포락을 모두 화를 따라 치료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용뢰의 화를 하나하나 가리킨 것이다. 내가 천인의 화는 모두 땅에서 생긴다고 위에서 말한 것은 실로 두 분의 뜻을 넓힌 것일 뿐이다.” 어떤 이가 물었다. “《내경》에서 화를 말한 곳은 하나가 아니지만 대개 육기 가운데 보이고 장부를 말한 것은 없다. 두 분에게는 혹 다른 근거가 있었는가?” 답하였다. “경에서는 모든 병이 풍·한·서·습·조·화가 움직여 변화하면서 생긴다고 하였다. 기백이 병기 19조를 하나하나 지적하였는데 화에 속한 것이 다섯이니, 이것이 상화로 인한 병이 장부에서 나온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내경》을 살펴보면 여러 열병으로 눈앞이 흐리고 경련하는 것을 화에 속하게 하였고, 여러 광조와 지나친 행동을 화에 속하게 하였으며, 여러 병으로 붓고 아프고 시며 놀라는 것을 화에 속하게 하였다. 또 《원병식》에서는 여러 풍증의 떨림과 어지럼은 간화의 움직임에 속하고, 여러 풍증의 숨가쁨과 답답함 및 위병은 폐화의 상승에 속하며, 여러 습증의 부종과 창만은 비화의 왕성함에 속하고, 여러 통증·가려움·창양은 심화의 작용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화로 인한 병이 장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아, 진무택처럼 통달한 이도 오히려 난식으로 군화를 논하고 일상에서 쓰는 불로 상화를 논하였으니, 뒷사람들이 귀먹고 눈먼 것과 같아진 것도 당연하다!” 그 양유여음부족을 논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람은 천지의 기를 받아 태어나 하늘의 양기는 기가 되고 땅의 음기는 혈이 된다.’ 그런데 기는 늘 남고 혈은 늘 부족하니 왜 그런가? 하늘은 커서 양이 되며 땅 밖에서 운행한다. 땅은 하늘 가운데 있어 음이 되고 하늘의 큰 기가 이를 들어 올린다. 해는 충실하여 양에 속하고 달 밖에서 운행하며, 달은 이지러져 음에 속하고 해의 빛을 받아 밝아진다. 그러니 땅의 음은 이미 하늘의 양을 이기지 못하고 달의 음도 해의 양에 대적하지 못한다. 천지와 일월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은 남자가 열여섯 살에 정이 통하고 여자가 열네 살에 월경을 한다. 이는 형체가 생긴 뒤에도 젖과 수곡의 양육을 기다린 뒤에야 음이 양과 짝하여 사람을 이루고 다른 사람의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반드시 서른과 스무 살에 가까워진 뒤 혼인한 것에서 음기가 이루어지기 어려움과 옛사람이 보양에 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전중양이 신에 보법은 두고 사법은 두지 않은 것도 이 뜻을 안 것이 아니겠는가? 또 《예기》 주석에는 ‘사람은 쉰 살이 된 뒤에야 음을 기르는 데 더하는 바가 있다’고 하였고, 《내경》에는 ‘나이 마흔에 이르면 음기가 절반으로 줄고 기거가 쇠한다’고 하였다. 남자는 예순네 살에 정이 끊어지고 여자는 마흔아홉 살에 월경이 끊어진다. 음기가 이루어져도 불과 30년 동안 운용되는데 끝내 그에 앞서 이미 이지러지니, 보양할 바를 알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에서는 ‘양은 하늘로서 밖을 주관하고 음은 땅으로서 안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양도는 실하고 음도는 허하다’고 하였다. 이 말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어떤 이가 물었다. “멀리 천지와 일월에서 취하고 가까이 남자의 몸에서 취하여 남음과 부족함을 말하는 것은 이미 알았다. 사람은 기가 교류하는 가운데 있으니, 지금 음양의 이치에 따라 섭양하는 법을 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하였다. “닫아 저장함을 주관하는 것은 신이고 소설을 맡는 것은 간이다. 두 장에는 모두 상화가 있으며 그 줄기는 위로 심에 속하는데, 심은 군화이다. 사물에 감응하면 움직이기 쉬워 심이 움직이면 상화가 한꺼번에 따른다. 성현이 사람에게 마음을 거두고 기르도록 가르친 뜻은 깊다. 천지는 오행이 번갈아 쇠하고 왕성함으로써 사시를 이루며, 사람의 오장육부도 이에 응하여 쇠하고 왕성해진다. 사월은 사에 속하고 오월은 오에 속하여 화가 왕성하지 않다고 하였다. 화는 폐금의 지아비이므로 화가 왕성하면 금이 쇠한다. 유월은 미에 속하여 토가 크게 왕성하다. 토는 수의 지아비이므로 토가 왕성하면 수가 쇠한다. 더구나 신수는 늘 폐금을 어머니로 삼아 그 부족함을 보조받는다. 옛사람들이 여름철에는 반드시 홀로 자고 담백하게 먹으며 삼가고 힘써 금과 수 두 장을 보양한 것은 바로 화와 토의 왕성함을 꺼렸기 때문이다. 《내경》에서는 또 ‘겨울에 정을 저장하면 봄에 습병을 앓지 않는다’고 하였다. 시월은 해에 속하고 십일월은 자에 속하여 바로 원기가 잠복하고 닫혀 저장되면서 본연의 진기를 기르고, 이듬해 봄에 상승하여 움직이고 발생하는 근본이 된다. 이때 욕심을 마음대로 부려 스스로 해치지 않으면 봄에 상승할 즈음 근본이 튼튼하고 기가 경솔하게 뜨지 않으니, 무슨 병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옹의 의술이 더욱 알려져 사방에서 병으로 맞아 가려는 이들이 길에 수레바퀴 살처럼 몰려들었고, 옹은 모두 찾아갔다. 치료한 병이 몇이며 그 양상은 어떠하였는지, 어떤 좋은 처방을 쓰고 어떤 약을 마셔 나았는지, 예부터 지금까지 효과를 본 사람이 누구이며 어느 현과 마을의 누구인지 보고 들은 것을 따라 분명하게 기록할 수 있다. 포강의 정의사가 이질을 앓다가 어느 날 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 눈을 치켜뜨고 소변이 쏟아지며 땀이 흘렀다. 옹이 진찰하니 맥이 매우 커서 질서가 없었다. 곧 말하였다. “이것은 음허에 양이 갑자기 끊어진 것입니다. 병을 앓은 뒤 술을 마시고 방사하여 얻은 것이지만 내가 낫게 할 수 있습니다.” 급히 인삼고를 만들게 하고 기해에 서둘러 뜸을 뜨게 하였다. 잠시 뒤 손이 움직이고 다시 잠시 뒤 입술이 움직였다. 인삼고가 완성되어 세 번 마시게 하자 깨어났다. 뒤에 인삼고를 몇 근이나 다 복용하고 병이 나았다. 천태의 주진사는 오한을 앓아 한여름에도 반드시 솜으로 머리를 덮었으며 부자를 수백이나 복용하고도 더욱 심해졌다. 옹이 진찰하니 맥이 활삭하여 곧 말하였다. “이는 열이 심하여 도리어 추운 것입니다.” 이에 맵고 서늘한 약제를 써서 담을 한 되쯤 토하게 하자 머리를 덮던 솜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어 방풍통성을 마시게 하니 나았다. 주씨가 매우 기뻐하였으나 옹은 말하였다. “병이 나은 뒤에는 반드시 담백하게 먹어 위를 기르고 안으로 관찰하여 신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면 수가 생기고 화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의 독이 반드시 발하여 거의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뒤에 등에 저가 생겨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절성의 평장이 남쪽 민월을 정벌하고 돌아와 반위를 앓자 의사들은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옹이 진맥하고 말하였다. “공의 병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곧 나와 측근들에게만 말하였다. “이 병은 놀란 뒤에 방사하여 얻은 것입니다. 화와 목의 사기가 서로 끼어 기가 손상되고 진액이 없어져 장위가 마르고 상하였으므로 음식이 들어가도 소화되지 않습니다. 음식이 소화되지 않으면 오장이 모두 받을 바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열흘 뒤 죽을 것입니다.” 과연 말한 대로였다. 정의사 집안의 한 소년이 가을 초에 열병을 앓아 입이 마르고 헛소리를 하며 두 광대뼈가 불처럼 붉었으므로 의사들은 대열로 보아 치료하였다. 옹이 진찰하니 맥이 약하고 지하여 말하였다. “이는 일을 하여 피로한 뒤 온병을 앓은 것이니 오직 보제를 복용해야 저절로 낫습니다. 지금 육맥이 모두 손을 치는 것은 반드시 찬 약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마침내 부자탕을 마시게 하니 손을 쓰자 곧 나았다. 절동 헌막의 부씨 아들이 헛소리를 하고 때로 무엇인가 보이는 듯한 병을 앓자 집안에서는 요괴 때문으로 여겼다. 옹이 맥을 짚고 말하였다. “이는 담병입니다. 그러나 맥이 허하고 현하며 침삭하니, 더위를 당하여 신 것을 마시고 또 크게 놀라서 얻은 것입니다.” 부씨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여름에 일을 하다가 몹시 목이 말라 매실물을 한두 되나 마음껏 마셨고, 또 잇달아 몇 차례 놀란 뒤 병이 생겼습니다.” 옹은 담을 다스리고 허한 것을 보하는 약제로 처방하여 열흘가량 만에 낫게 하였다. 마을 사람 진시숙은 창병으로 배가 말통처럼 불렀는데 의사가 통리하는 약을 쓰자 더욱 심해졌다. 옹이 진찰하니 맥이 삭하고 삽하여 말하였다. “이는 술을 즐겨 얻은 것입니다. 술을 즐기면 혈이 손상되고 혈이 손상되면 비토의 음도 손상됩니다. 위가 곡식을 받아도 운반하지 못하므로 양은 오르고 음은 내려가 막히는 것입니다.” 진씨가 말하였다. “저는 술을 좋아하여 대소변에 피가 섞여 나온 지 여러 해입니다.” 옹이 보혈하는 약제를 주자 효과가 있었다. 권세 있는 귀인이 가벼운 병으로 불러 놓고 옹이 오는 것을 보고도 중당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옹은 진맥하고 말을 건네지 않은 채 나왔다. 사람을 보내 물으니 말하였다. “공의 병은 죽을 법에 들어 있습니다. 석 달이 지나기 전에 귀신의 명부에 오를 터인데 아직도 교만한 기운이 있습니까?” 뒤에 과연 예고한 때에 죽었다. 한 노인이 눈이 보이지 않아 사람을 보내 치료를 청하였다. 옹이 진찰하니 맥이 매우 미약하여 인삼고를 만들어 마시게 하자 눈이 평소처럼 밝아졌다. 며칠 뒤 옹이 다시 갔다가 의사 한 사람이 뜰에서 몽석을 달구는 것을 보고 물으니 이미 복용하였다고 하였다. 옹은 놀라 말하였다. “이 병은 기가 크게 허하여 얻은 것인데, 지금 그 허함을 구제하지 않고 도리어 몽석을 썼으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한밤중이 되자 기운이 가물가물 이어지지 못하여 죽었다. 한 남자가 소변이 통하지 않아 의사가 통리하는 약으로 치료하였으나 더욱 심해졌다. 옹이 진찰하니 오른쪽 촌맥이 꽤 현활하여 말하였다. “이는 담이 쌓인 병입니다. 담이 폐에 쌓여 있는데 폐는 상초이고 방광은 하초이므로, 상초가 닫히면 하초가 막힙니다. 물을 떨어뜨리는 기구가 반드시 위 구멍이 통해야 아래 구멍에서 물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방법에 따라 크게 토하게 하자 토한 뒤 병이 씻은 듯 없어졌다. 한 부인이 의식을 잃는 병이 있었는데 조금 깨어나면 서너 번 소리 지르고 다시 혼절하였다. 옹이 진찰하니 간맥이 현삭하면서 활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성난 마음이 일으킨 것입니다. 성내고 억지로 술을 마셔서 얻었습니다.” 물어보니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여 밤마다 잔을 가득 채워 혼자 마시며 마음을 풀었다고 하였다. 옹은 담을 흐르게 하고 화를 내리는 약제로 치료하면서 향부를 더하여 간분의 울체를 흩어 주니 곧 나았다. 한 여자가 음식을 먹지 않고 북쪽을 향해 누워 있은 지 거의 반년이 되었으며 의사도 방법이 다하였다고 하였다. 옹이 진찰하니 간맥이 현하며 왼쪽 기구에 나타나 말하였다. “이는 남자를 그리워하나 만나지 못하여 기가 비에 맺힌 것일 뿐입니다.” 물어보니 혼인하기로 한 남자가 광 지방에 간 지 거의 5년이라고 하였다. 옹은 그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이 병은 성을 내야만 풀 수 있습니다. 성내는 기는 부딪치고 목에 속하므로 토에 맺힌 것을 뚫을 수 있습니다. 지금 건드려 화가 나게 하면 됩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옹은 들어가 그 여자의 뺨을 세 차례 때리고 밖의 남자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꾸짖었다. 여자가 울부짖으며 크게 성냈고 화가 가라앉자 음식을 먹었다. 옹은 다시 아버지에게 몰래 말하였다. “생각으로 맺힌 기는 풀렸으나 반드시 기쁜 일이 있어야 다시 맺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남편에게서 편지가 와 조만간 돌아온다고 거짓말하였다. 석 달 뒤 남편이 실제로 돌아왔고 병이 재발하지 않았다. 한 부인이 출산 뒤 옷자락 같은 것이 올라가지 않는 증상을 보였으나 의사가 알지 못하였다. 옹은 말하였다. “이는 자궁입니다. 기혈이 허하므로 아이를 따라 내려온 것입니다.” 곧 황기·당귀의 약제를 주고 승마를 더하여 들어 올렸다. 이어 가죽을 다루는 장인의 방법을 써서 오배자를 달인 물로 씻어 그 껍질을 오그라들게 하였다. 잠시 뒤 자궁이 올라갔다. 옹은 위로하였다. “3년 뒤에는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로 되었다. 가난한 과부가 나창을 앓자 옹은 보고 측은히 여겨 말하였다. “세상에서 이 병을 고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금기를 지키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 부인은 가난하여 기름진 음식이 없고 과부여서 욕심이 없으니 아마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스스로 약을 갖추어 치료하였고, 병이 나은 뒤 다시 사물탕을 수백이나 투여하니 재발하지 않았다. 옹의 의술은 모두 이와 같았다. 병을 만나 치료할 때 옛 처방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치료는 모두 적중하였다. 그렇다고 여러 의가의 처방과 논의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은 옛것을 단단히 지켰으나 옹은 자유롭게 취사하면서 끝내 옛 뜻과 합하였다. 당시 배우는 이들이 모두 메아리와 그림자처럼 따르자 옹은 지칠 줄 모르고 부지런히 가르쳤다. 하루는 문인 조양인이 대극의 뜻을 물었다. 옹은 음양조화의 정미함과 의도가 서로 통하는 바를 논하고 말하였다. “나는 여러 제자 가운데서 일찍이 여기까지 논한 적이 없다. 지금 그대가 물으므로 우연히 언급하였으니, 이는 도로써 서로 알려 주는 것이지 단지 의술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씨가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옹의 의술이 처음 풀무질되어 나오는 곳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나성지가 금릉에서 찾아와 스스로 중경의 학문에 정통하다고 하였다. 옹은 말하였다. “중경의 책은 남은 편과 끊어진 죽간 가운데서 수습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문장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 뜻이 다 드러나지 않은 곳, 편차가 빠진 곳, 해석의 원칙이 어그러진 곳이 있으므로 나는 볼 때마다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이에 의심스러운 뜻 몇 조항을 대략 뽑아 보였으나 나씨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어떤 병을 치료할 때 옹이 음허발열로 보고 음을 더하고 혈을 보하는 약제를 써서 사흘이 안 되어 낫게 하자 나씨가 탄식하였다. “제 식견으로는 상한으로 보아 치료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옹께서는 이를 치료하면서도 천궁·당귀의 성질이 맵고 따뜻하여 음허한 사람이 복용하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여기시는데, 하물며 발한·사하의 잘못이겠습니까!” 옹은 나이가 높아지자 장익 등의 청을 따라 《격치여론》·《국방발휘》·《상한변의》·《본초연의보유》·《외과정요신론》 등 여러 책을 지었고,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외우고 익혀 본보기로 삼았다. 옹은 간결하고 성실하며 곧고 선량하였고, 굳세고 엄정하며 절조가 뚜렷하였다. 마음을 바르게 지키고 성실함으로 몸을 세웠으며 효도와 우애의 행실은 실로 타고난 바탕에 근본하였다. 때맞추어 제사를 받들 때에는 예문을 정하고 공경하며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를 섬길 때에는 조절하여 기를 때를 살펴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 자신에게는 부족하더라도 형제에게는 반드시 넉넉하게 하였고, 자기 자식에게는 박하더라도 형제의 자식에게는 반드시 후하게 베풀었다. 벗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벗하지 않고 도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고금의 득실을 논하기 좋아하여 의연히 천하를 걱정하였다. 세상의 이름난 공경들이 많이 몸을 낮추어 그를 존중하였는데, 옹은 정치의 도를 곧바로 아뢰어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영예와 이익에 관한 말만 나오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사람과 사귈 때는 한결같이 삼강오기(三綱五紀)를 기준으로 떠나거나 나아갔다. 일찍이 말하였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행실에 가지와 잎이 있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말에 가지와 잎이 있다.” 행실은 근본이고 말은 거기서 따라 생기는 것이다. 가지와 잎뿐인 말을 보고 근본을 버려 말단에 힘쓰는 것을 보면 곧 얼굴에 노여움이 넘쳐, 자신을 더럽히려는 것처럼 여겼다. 옹이 이처럼 우뚝하였으니 의술은 또 다만 한 가지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옹이 학문을 강론하고 일을 행한 큰 방침은 이미 내 벗 송태사 염이 지은 옹의 묘지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의술 가운데 전할 만한 것을 삼가 기록하여 옹의 전을 지으니, 뒷날의 군자들이 서로 참고할 수 있기를 바란다.
論曰 : 昔漢嚴君平 , 博學無不通 , 賣卜成都 。 人有邪惡非正之問 , 則依箸龜為陳其利害 。 與人子言 , 依於孝 ; 與人弟言 , 依於順 ; 與人臣言 , 依於忠 。 史稱其風聲氣節 , 足以激貪而厲俗 。 翁在婺得道學之源委 , 而混跡於醫 。 或以醫來見者 , 未嘗不以葆精毓神開其心 。 至於一語一默 , 一出一處 , 凡有關於倫理者 , 尤諄諄訓誨 , 使人奮迅感慨激厲之不暇 。 左丘明有云 :「 仁人之言 , 其利博哉 !」 信矣 。 若翁者 , 殆古所謂直諒多聞之益友 , 又可以醫師少之哉 ?
논한다. 옛날 한나라 엄군평은 박학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성도에서 점을 쳐 주고 생업을 삼았다. 사람이 사악하고 바르지 않은 일을 물으면 시초와 거북점에 의거하여 그 이해를 말해 주었다. 남의 아들과 말할 때에는 효에 의거하고, 남의 아우와 말할 때에는 순종에 의거하며, 남의 신하와 말할 때에는 충성에 의거하였다. 역사에서는 그 풍도와 기절이 탐욕을 경계하고 풍속을 바로잡기에 충분하였다고 칭찬하였다. 옹은 무주에서 도학의 근원과 전개를 얻고 의술 가운데 자취를 섞었다. 의술 때문에 찾아오는 이에게 정을 보전하고 신을 기르는 것으로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마디 말과 한 번의 침묵, 한 번 나아감과 한 번 머묾에 이르기까지 윤리에 관계되는 일이면 더욱 간곡히 가르쳐, 사람들이 분발하고 감개하며 스스로 격려하기에 겨를이 없게 하였다. 좌구명은 ‘어진 사람의 말은 그 이로움이 넓구나!’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렇다. 옹 같은 이는 아마 옛날의 곧고 성실하며 많이 아는 유익한 벗이라 할 것이니, 또 의사라는 이유로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