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溪先生既卒 , 宗屬失其所倚藉 , 井邑失其所依憑 , 嗜學之士失其所承事 , 莫不彷徨遙慕 , 至於灑涕 ! 濂聞之 , 中心尤摧咽不自勝 。 蓋自加布於首 , 輒相親於几杖間 , 訂義質疑 , 而求古人精神心術之所寓 。 先生不以濂為不肖 , 以忘年交遇之 , 必極言而無所隱 , 故知先生之深者 , 無逾於濂也 。 方欲聚厥事行 , 為書以傳來世 , 而先生之子玉汝 、 從子嗣氾 、 忽蹐濂門 , 以先生從弟無忌所為狀 , 請為表以勒諸墓上 。 濂何敢辭 ! 先生諱震亨 , 字彥修 , 姓朱氏 , 其先出於漢槐里令云之後 。 居平陵 , 至晉永興中 , 臨海太守泛 , 始遷今婺之義烏 。 子孫蟬聯 , 多發聞於世 , 郡志家乘載之為詳 。 當宋之季 , 有東堂府君者 , 諱良祐 , 懿然君子人也 , 蓋以六經為教 , 以弘其宗 。 府君生某 , 某生迪功郎桂 , 迪功生鄉貢進士環 , 先生之大父也 。 父諱元 , 母某氏 。 先生受資爽朗 , 讀書即了大義 , 為聲律之賦 , 刻燭而成 , 長老咸器之 , 已而棄去 。 尚俠氣 , 不肯出人下 , 鄉之右族咸陵之 , 必風怒電激求直於有司 , 上下搖手相戒 , 莫或輕犯 。 時鄉先生文懿許公 , 講道東陽八華山中 , 公上承考亭朱子四傳之學 , 授受分明 , 契證真切 , 擔簦而從之者亡慮數百人 。 先生嘆曰 :「 丈夫所學 , 不務聞道 , 而唯俠是尚 , 不亦惑乎 ?」 乃摳衣往事焉 。 先生之年 , 蓋已三十六矣 。 公為開明天命人心之秘 , 內聖外王之微 , 先生聞之 , 自悔昔之沉冥顛濟 , 汗下如雨 。 由是日有所悟 , 心扃融廓 , 體膚如覺增長 , 每宵挾朋坐至四鼓 , 潛驗默察 , 必欲見諸實踐 , 抑其疏豪 , 歸於粹夷 。 理欲之關 , 誠偽之限 , 嚴辨確守 , 不以一毫苟且自恕 。 如是者數年 , 而其學堅定矣 。 歲當賓興 , 先生應書秋闈 , 幸沾一命 , 以驗其所施 。 再往 , 再不利 , 復嘆曰 :「 不仕固無義 , 然得失則有命焉 。 苟推一家之政 , 以達於鄉黨州閭 , 寧非仕乎 ?」 先是府君置祭田三十餘畝 , 合為一區 , 嗣人遞司穡事 , 以陳時薦 , 然有恆祭而無恆所 。 先生乃即適意亭遺址 , 建祠堂若干楹 , 以奉先世神主 , 歲時行事 。 復考朱子家禮而損益其儀文 , 少長咸在 , 執事有恪 , 深衣大帶 , 以序就列 , 宴私洽比 , 不愆於禮 。 適意亭者 , 府君所造 , 以延徐文清公之地 。 先生弗忍其廢 , 改創祠堂之南 , 俾諸子姓肄習其中 。 包銀之不下 , 州縣承之 , 急如星火 , 一里之間 , 不下數十姓 , 民莫敢與辨 。 先生所居里 , 僅上富氓二人 。 郡守召先生 , 自臨之曰 :「 此非常法 , 君不愛頭乎 ?」 先生笑曰 :「 守為官 , 頭固當惜 , 民不愛也 。 此害將毒子孫 , 必欲多及 , 民願倍輸吾產當之 。」 守雖怒 , 竟不能屈 。 縣有暴丞 , 好諂瀆鬼神 , 欲修岱宗祠以徼福 , 懼先生莫己與 , 以言嘗之曰 :「 人之生死 , 岳神實司之 , 欲治其宮 , 孰敢幹令 ?」 先生曰 :「 吾受命於天 , 何庸媚土偶為生死計耶 ? 且岳神無知則已 , 使其有知 , 當此儉歲 , 民食糠核不飽 , 能振吾民者 , 然後降之福耳 。」 卒罷其事 , 賦役無藝 。 胥史高下其手 , 以為民奸 。 先生集同里之人謂曰 :「 有田則科徭隨之 , 君等人胥史餌而護相傾 , 非策之上也 , 宜相率以義 , 契其力之朒 , 嬴而敷之 。」 眾翕然從 , 每官書下 , 相依如父子 , 議事必先集 。 若苛斂之至 , 先生即以身前 , 辭氣懇款 , 上官多聽 , 為之損裁 。 縣大夫勸耕於鄉 , 將有要於民 。 先生愳其臨境 , 邪幅扉屨 , 往迎於道左 。 大夫驚曰 :「 先生何事乃爾耶 ?」 先生曰 :「 民有役於官 , 禮固應爾 。」 大夫曰 :「 勸耕善乎 ?」 先生曰 :「 私田不煩官勸 , 第公田生青芻耳 。」 是時圭田賦重 , 種戶多逃亡 , 故先生以此為風 。 大夫一笑而去 。 鄉有蜀墅塘 , 周圍凡三千六百步 , 溉田至六千畝而嬴 ; 堤壞而水竭 , 數以旱告 。 先生倡民興築 , 置坊庸 , 鑿為三竇 , 時其深淺而舒泄之 。 民食其利 。 後十年 , 山水暴至 , 堤又壞 , 先生命再從子漳力任其事 , 以嗣其成 。 縣令長或問決獄得失 , 先生必盡心為之開導 。 東陽郭氏父子三人 , 虐毆小民幾斃 , 又貫針鰌腹 , 逼使吞之 。 事移義烏鞠問 , 當其子父皆死 。 先生曰 :「 原其故殺之情 , 亦一人可償爾 。 一子從父之令 , 宜從未減 , 若皆殺之 , 無乃已重乎 ?」 事上從先生議 。 張甲行小徑中 , 適李乙荷任器來 , 幾中甲目 , 甲怒拳其耳而死 。 甲乙皆貧人 , 甲又有九十之親 。 先生曰 :「 貰甲罪則廢法 , 徇法甲必瘦死 , 親無以養亦死 。 乙屍暴於道 , 孰為藏之 ? 不若使竟其葬薶 , 且慰其親 , 徐來歸獄 , 服中刑耳 。」 或曰 :「 甲或逃奈何 ?」 先生曰 :「 若以誠待之 , 必不爾也 。」 縣如先生言 。 後會赦免 。 細民有斬先生丘木者 , 先生訊之 , 民弗服 。 先生聞於縣 , 將逮之 。 人交讓民曰 :「 汝奈何犯仁人耶 ?」 民曰 :「 計將安出 ?」 人曰 :「 先生 , 長者也 。 急舁木還之 , 當爾貸 。」 民從之 , 先生果真而不問 。 先生客吳妙湛院 , 尼刻木作人形 , 以為厭蠱 。 館客陳庚得之 , 欲發其事 , 尼懼甚 。 先生知之 , 以計紿陳出 , 碎其木刻 。 陳歸怒且詈 。 先生徐曰 :「 君乃士人 , 獲此聲於吳楚間 , 甚非君利 。 倘乏金 , 吾財可通用 , 勿憂也 。」 尼後輦金帛為謝 , 先生叱而去 。 方岳重臣及廉訪使者 , 聞先生名 , 無不願見 ; 既見 , 無不欲交章薦之 。 先生皆力辭 。 唯民瘼吏弊 , 必再三蹙額告之 , 不啻親受其病者 。 覃懷鄭公持節浙東 , 尤敬先生 , 以尊客禮禮之 。 眾或不樂 , 競短其行於公 。 公笑曰 :「 朱聘君盛舉諸公之長 , 而諸公顧反短之 , 何其量之懸隔耶 ?」 皆慚不能退 。 初 , 先生壯齡時 , 以母夫人病脾 , 頗習醫 。 後益研礦之 , 且曰 :「 吾既窮而在下 , 澤不能致遠 , 其可遠者 , 非醫將安務乎 ?」 時方盛行陳師文 、 裴宗元所定大觀一百九十七方 , 先生獨疑之 , 曰 :「 用藥如持衡 , 隨物重輕而為前卻 , 古方新證 , 安能相值乎 ?」 於是尋師而訂其說 , 渡濤江走吳 , 又走宛陵 , 走建業 , 皆不能得 。 復回武林 , 有以羅司徒知悌為言者 。 知悌 , 字子敬 , 宋寶祐中寺人 , 精於醫 , 得金士劉元素之學 , 而旁參於李杲 、 張從正二家 , 然性倨甚 。 先生謁焉 , 十往返不能通 。 先生志益堅 , 日拱立於其門 , 大風雨不易 。 或告羅曰 :「 此朱彥修也 , 君居江南而失此士 , 人將議君後矣 。」 羅遽修容見之 , 一見如故交 。 為言學醫之要 , 必本於 《 素問 》《 難經 》, 而濕熱相火 , 為病最多 , 人罕有知其秘者 。 兼之長沙之書詳於外感 , 東垣之書詳於內傷 , 必兩盡之 , 治疾方無所憾 。 區區陳裴之學 , 泥之且殺人 。 先生聞之 , 夙疑為之釋然 , 學成而歸 。 鄉之諸醫始皆大驚 , 中而笑且排 , 卒乃大服相推尊 , 願為弟子 。 四方以疾迎候者無虛日 , 先生無不即往 , 雖雨雪載途 , 亦不為止 。 僕伕告痛 , 先生諭之曰 :「 疾者度刻如歲 , 而欲自逸耶 。」 窶人求藥 , 無不與 , 不求其償 , 其困厄無告者 , 不待其招 , 注藥往起之 , 雖百里之遠弗憚也 。 江浙省臣往討閩寇 , 深入瘴地 , 遂以病還錢塘 , 將北歸 。 先生脈之曰 :「 二十日死 。 使道經三衢時召吾 , 可使還燕 , 然亦不能生之也 。」 如期卒於姑蘇驛 。 權貴人以微疾來召 , 危坐中庭 , 列三品儀衛於左右 。 先生脈已 , 不言而出 。 或追問之 , 先生曰 :「 三月後當為鬼 」, 猶有驕氣耶 。 及死 , 其家神先生之醫 , 載粟為壽 , 先生辭之 。 一少年病熱 , 兩顴火赤 , 不能自禁 , 躁走於庭 , 將蹈河 。 先生曰 :「 此陰證也 , 製附子湯飲之 」, 眾為之吐舌 。 飲已 , 其疾如失 。 先生治療 , 其神中若此甚多 , 門人類證有書 , 茲不詳載 。 先生孤高如鶴 , 挺然不群 , 雙目有小大輪 , 日出明 , 雖毅然之色不可凌犯 。 而清明坦夷 , 不事表儤 , 精神充滿 , 接物和粹 , 人皆樂親炙之 。 語言有精魄 , 金鏘鐵鏗 , 使人側耳聳聽 , 有蹶然興起之意 。 而於天人感應殃慶類至之說 , 尤竭力戒厲 , 反覆不厭 , 故其教人也 。 人既易知昏明強弱 , 皆獲其心 。 老者則愛慈祥 , 幼者則樂恭順 , 莫不皆知忠信之為美 。 固未能一變至道 , 去泰去甚 , 有足觀者 。 或有小過 , 深掩密覆 , 唯恐先生之知 。 凡先生杖屨所臨 , 人隨而化 。 浦陽鄭太和 , 十世同居 , 先生為之喜動顏面 , 其家所講冠婚喪祭之禮 , 每咨於先生而後定 。 蓋先生之學 , 稽諸載籍 , 一以躬行為本 , 以一心同天地之大 , 以耳目為禮樂之原 , 積養之久 , 內外一致 。 夜寐即平晝之為 , 暗室即康衢之見 , 汲汲孜孜 , 耄而彌篤 。 每見誇多鬥靡之士 , 輒語之曰 :「 聖賢一言 , 終身行之弗盡矣 。」 以為多 。 至於拈英摘豔之辭 , 尤不樂顧 , 且以吾道蟊賊目之 。 及自為文 , 率以理為宗 , 非有關於綱常治化 , 不輕論也 。 居室垣墉 , 敦尚儉樸 , 服御唯大布寬衣 , 僅取蔽體 ; 藜羹糗飯 , 安之如八珍 。 或在豪大姓家 , 當以肆筵設席 , 水陸之羞 , 交錯於前 。 先生正襟默坐 , 未嘗下箸 。 其清修苦節 , 能為人之所不能為 , 而於世上所悅者 ; 澹然無所嗜 , 惟欲聞人之善 , 如恐失之 , 隨聞隨錄 , 用為世勸 。 遇有不順軌則者 , 必誨其改 , 事有難處者 , 又導之以其方 。 晚年識見尤卓 , 嘗自括蒼還 , 道過永康 , 謂人曰 :「 青田之民囂悍 , 值此法弛令乖之時 , 必依險阻嘯聚為亂 。」 已而果然 。 又嘗告親友曰 :「 吾足跡所及廣矣 , 風俗澆漓甚 , 垂髫之童 , 亦能操狡謀罔上 , 天怒已極 , 必假手殲之 , 盍力善以延其胤乎 。」 時方承平 , 聞者咸笑先生之迂 。 言未幾 , 天下大亂 , 空村無煙火動百餘里 。 先生所著書 , 有 《 宋論 》 一卷 、《 格致餘論 》 若干卷 、《 局方發揮 》 若干卷 、《 傷寒論辨 》 若干卷 、《 外科精要發揮 》 若干卷 、《 本草衍義補遺 》 若干卷 、《 風水問答 》 若干卷 , 凡七種 , 微文奧義 , 多發前人之所未明 。 先生嘗曰 :「 義理精微 , 禮樂制度 , 吾門師友論著已悉 , 吾可以無言矣 。」 故其所述 , 獨志於醫為多 。 先生生於至元辛巳十一月二十八日 , 卒於至正戊戌六月二十四日 , 瀕卒無他言 , 獨呼嗣泛謂曰 :「 醫學亦難矣 , 汝謹識之 。」 言訖 , 端坐而逝 , 享年七十有八 。 娶戚氏 , 道一書院山長象祖之女 , 先三十五年卒 。 子男二 , 嗣衍 、 玉汝 , 嗣衍亦先三年卒 。 女四 , 適傅似翁 、 蔣長源 、 呂文忠 、 張思忠 。 孫男一 , 文椐 ; 女二 , 一適丁榆 , 一尚幼 。 其年十一月日 , 始葬先生於某山之原 。 卒後之五月也 , 先生所居曰丹溪 , 學者尊之而不敢字 , 故因其地稱之曰丹溪先生云 。 夫自學術不明於天下 , 凡聖賢防範人心維持世道之書 , 往往割裂摭拾 , 組織成章 , 流為譁世取寵之具 。 間有注意遺經 , 似若可尚 , 又膠於訓詁之間 , 異同紛拿 , 有如聚訟 。 其視身心 , 皆藐然若不相關 , 此其知識反出於不學庸人之下 。 於戲 , 秦漢以來 , 則或然矣 。 然而靈豸不鳴 , 孽狐之妖弗息 ; 黃鐘不奏 , 瓦缶之音日甚 。 天開文運 , 濂洛奮興 , 遠明凡聖之緒 , 流者遏而止之 , 膠者釋而通之 , 一期闓廓其昏翳 、 挽回其精明而後已 。 至其相傳 , 唯考亭集厥大成 ; 而考亭之傳 , 又唯金華之四賢 , 續其世胤之正 , 如印印泥 , 不差毫末 。 此所以輝連景接而芳猷允著也 。 先生少負任俠之氣 , 不少屈撓 , 及聞道德性命之說 , 遽變之而為剛毅 , 所以局量弘而載任重 , 寤寐先哲 , 唯日不足 , 民吾同胞之念 , 須臾莫忘 。 雖其力或弗支 , 苟遇惠利少足以濡物 , 必委蛇周旋 , 求盡其心 。 應接之際 , 又因人心感發之機 , 而施仁義之訓 , 觸類而長 , 開物成化 。 所謂風雨霜露無非君子之教者 , 要亦不可誣也 。 致思於醫 , 亦能搜隱抉秘 , 倡期南方之絕學 。 嬰疢之家 , 倚以為命 。 先生一布衣耳 , 其澤物有如此者 , 使其得位於朝以行其道 , 則夫明效大驗又將何如哉 ! 嗚呼 ! 先生已矣 ! 其山峙淵澄之色 , 井潔石貞之操 , 與其不可傳者 , 弗能即矣 。 徒因其遺行而誦言之 , 見聞不博 , 惡能得十一於千百之間哉 。 雖然 , 舍是又無足以求先生者 , 敢摭狀之概敘而為之銘曰 。
단계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종족은 의지할 바를 잃고 고을 사람들은 기댈 바를 잃었으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선비들은 모시고 배울 바를 잃었다. 방황하며 멀리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 염이 이를 듣고 마음속으로 더욱 비통하여 목이 메어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관례를 치른 뒤부터 선생의 궤장 곁에서 가까이 모시며 뜻을 논정하고 의문을 물어, 옛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쓰는 법이 깃든 곳을 구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나 염을 못난 사람이라 여기지 않고 나이를 잊은 벗으로 대하여, 반드시 말을 다하고 숨기는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선생을 깊이 아는 사람으로 나 염을 넘는 이가 없었다. 막 선생의 사적과 행실을 모아 글로 써서 후세에 전하려 하였는데, 선생의 아들 옥여와 조카 사범이 갑자기 조심스럽게 내 문에 와서 선생의 사촌 아우 무기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묘 위에 새길 표문을 청하였다.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선생의 휘는 진형이고 자는 언수이며 성은 주씨이다. 그 선조는 한나라 괴리령 운의 후손에서 나왔다. 평릉에 살다가 진나라 영흥 연간에 이르러 임해태수 범이 처음으로 지금의 무주 의오로 이주하였다. 자손이 이어져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이가 많으니, 군지와 가승에 자세히 실려 있다. 송나라 말기에 동당부군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휘는 양우이며 아름다운 덕을 지닌 군자였다. 육경으로 가르쳐 종족을 넓혔다. 부군이 아무개를 낳고 아무개가 적공랑 계를 낳았으며, 적공이 향공진사 환을 낳았으니 선생의 할아버지이다. 아버지의 휘는 원이고 어머니는 모씨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시원하여 책을 읽으면 곧 대의를 깨달았고 성률에 맞춘 부를 지을 때에는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재는 동안 완성하였으므로, 장로들이 모두 큰 그릇으로 여겼다. 그러나 얼마 뒤 이를 버렸다.
협기를 숭상하여 남 아래에 서려 하지 않았으므로 고을의 유력한 집안들이 업신여기면 반드시 바람처럼 성내고 번개처럼 격동하여 관청에 바른 판결을 구하였다. 위아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서로 경계하여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때 고을의 선생인 문의 허공이 동양 팔화산에서 도를 강론하였다. 허공은 위로 고정 주자의 네 대에 걸쳐 전해진 학문을 이어받아 전수 관계가 분명하고 깨달아 증험함이 참되고 절실하였으므로, 삿갓을 메고 찾아가 따르는 사람이 무려 수백 명이었다. 선생은 탄식하였다. “장부가 배울 때 도를 듣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협기만 숭상한다면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옷자락을 걷고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선생의 나이는 이미 서른여섯이었다. 허공은 천명과 인심의 비밀, 내성외왕의 미묘함을 밝혀 주었다. 선생은 이를 듣고 지난날 어둠에 빠져 뒤집히고 그릇되었던 것을 스스로 뉘우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로부터 날마다 깨닫는 바가 있어 마음의 문이 환히 열리고 넓어져 살갗마저 자라는 듯하였다. 밤마다 벗들과 함께 앉아 사경에 이르도록 은밀히 살피고 묵묵히 검증하여 반드시 실천에서 드러내려 하였으며, 거칠고 호방한 기운을 억제하여 순수하고 평탄함으로 돌아갔다. 천리와 인욕의 관문, 성실함과 거짓의 경계를 엄격히 분별하고 굳게 지켜, 조금도 구차하게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 학문이 견고하게 정립되었다. 향시에 인재를 천거하는 해가 되어 선생도 가을 시험에 응시하여, 다행히 한 벼슬을 얻어 배운 것을 시행해 보고자 하였다. 두 번 갔으나 두 번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탄식하였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의가 없는 일이지만, 얻고 잃는 데는 명이 있다. 한 집안을 다스리는 정사를 미루어 향당과 고을에까지 미치게 한다면 어찌 벼슬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앞서 부군이 제전 30여 무를 마련하여 한 구역으로 합쳐 놓았고 후손들이 번갈아 농사를 맡아 계절마다 제물을 올렸다. 그러나 정기적인 제사는 있어도 일정한 장소는 없었다. 선생은 이에 적의정의 옛터에 사당 몇 칸을 세워 선대의 신주를 모시고 세시마다 제사를 지냈다. 다시 주자의 가례를 살펴 의례 절차를 가감하였다. 젊은이와 어른이 모두 모이고 집사들은 공경하였으며, 심의와 큰 띠를 갖추고 차례대로 자리에 나아갔다. 친족끼리 잔치하며 화목하게 어울리되 예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적의정은 부군이 서문청공을 맞아들이려고 지은 곳이었다. 선생은 그곳이 폐허가 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사당 남쪽에 다시 세우고 여러 자손이 그 안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포은이 내려오지 않았으나, 주현은 이를 받들어 별똥별과 불길처럼 급하게 독촉하였다. 한 마을에서 수십 성씨에 미쳤으나 백성들은 감히 따지지 못하였다. 선생이 사는 마을에서는 부유한 백성 두 사람만 올렸다. 군수가 선생을 불러 직접 대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보통 법이 아닌데 그대는 머리가 아깝지 않은가?” 선생은 웃으며 말하였다. “태수께서는 관리이니 머리를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만, 백성인 저는 아끼지 않습니다. 이 해악은 장차 자손에게까지 독을 끼칠 것입니다. 반드시 많은 사람에게 미치게 하려 하신다면, 저는 제 재산으로 두 배를 내어 감당하겠습니다.” 군수는 노하였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현에 포악한 현승이 있어 귀신에게 아첨하고 모독하기를 좋아하였다. 대종의 사당을 수리하여 복을 구하려 하였으나 선생이 동의하지 않을까 두려워 말을 던져 시험하였다. “사람의 생사는 악신이 실로 관장하니, 그 신궁을 고치려 하는데 누가 감히 명을 어기겠는가?” 선생은 말하였다. “나는 하늘에서 명을 받았는데 어찌 흙으로 만든 우상에게 아첨하여 생사를 도모하겠습니까? 또 악신이 지각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지각이 있다면 이 흉년에 백성들이 겨와 부스러기도 배불리 먹지 못하니, 우리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이에게 비로소 복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그 일을 그만두었다.
부역에는 한도가 없었고 아전들이 제멋대로 농간을 부려 백성을 해쳤다. 선생은 같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말하였다. “토지가 있으면 세금과 요역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아전의 미끼에 걸려 서로 무너뜨리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마땅히 의리로 서로 이끌어 힘의 부족함과 넉넉함에 맞추어 나누어 부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따랐으므로 관청 문서가 내려올 때마다 부자처럼 서로 의지하고, 일을 논의할 때는 반드시 먼저 모였다. 가혹한 수탈이 닥치면 선생이 곧 몸소 앞에 나서서 말과 태도를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하였으므로 상관들도 많이 들어주어 줄이거나 덜어 주었다.
현령이 향촌에 권농하러 와서 백성들에게 요구하려는 바가 있었다. 선생은 그가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염려하여 다리싸개와 짚신을 갖추고 길 왼편으로 마중 나갔다. 현령이 놀라 물었다. “선생은 무슨 일로 이렇게 하십니까?” 선생이 답하였다. “백성이 관청을 위해 일할 때 예법상 본래 이렇게 해야 합니다.” 현령이 물었다. “농사를 권장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까?” 선생은 말하였다. “사유지는 관에서 권장할 수고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공전에는 푸른 꼴만 자랄 뿐입니다.” 그때 규전의 부세가 무거워 경작하는 가구들이 많이 도망하였으므로 선생은 이 말로 풍자한 것이다. 현령은 한 번 웃고 떠났다.
마을에 촉서당이라는 못이 있었는데 둘레가 모두 3,600보이고 물을 대는 밭은 6,000무가 넘었다. 둑이 무너지고 물이 말라 여러 번 가뭄을 호소하였다. 선생은 백성들을 이끌어 축조 공사를 일으켜 둑을 설치하고 세 물구멍을 뚫어 수심을 살펴 물을 내보냈다. 백성들은 그 이익을 누렸다. 10년 뒤 산에서 물이 갑자기 몰려와 둑이 다시 무너지자 선생은 재종질 장에게 그 일을 힘써 맡게 하여 완성된 사업을 잇게 하였다. 현의 관리들이 혹 재판의 잘잘못을 물으면 선생은 반드시 마음을 다해 깨우쳐 주었다.
동양의 곽씨 부자 세 사람이 힘없는 백성을 잔혹하게 때려 거의 죽게 하고, 또 미꾸라기 배에 바늘을 꿰어 억지로 삼키게 하였다. 사건이 의오로 이송되어 심문한 결과 그 부자가 모두 사형에 해당하였다. 선생은 말하였다. “고의로 죽이려 한 실정을 따져도 한 사람이 목숨으로 갚으면 됩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따른 것이니 따른 처지를 고려하여 감형해야 합니다. 모두 죽인다면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사건을 상신하자 선생의 의견을 따랐다. 장갑이 작은 길을 가는데 마침 이을이 짐을 메는 도구를 지고 오다가 거의 갑의 눈을 찌를 뻔하였다. 갑이 성내어 그의 귀를 주먹으로 쳐 죽였다. 갑과 을은 모두 가난하였고 갑에게는 아흔 살의 어버이도 있었다. 선생은 말하였다. “갑의 죄를 용서하면 법이 폐해지고, 법대로 하면 갑은 반드시 수척해져 죽으며 어버이도 봉양할 이가 없어 죽습니다. 을의 시신은 길에 드러나 있는데 누가 장사 지내겠습니까? 갑에게 그 장례를 마치게 하고 또한 어버이를 위로한 뒤 천천히 와서 옥에 들어가 중간 정도의 형을 받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어떤 이가 물었다. “갑이 달아나면 어찌합니까?” 선생은 “성의로 대하면 반드시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현에서는 선생의 말대로 하였고 뒤에 사면을 만나 면죄되었다.
한 백성이 선생 묘역의 나무를 베었다. 선생이 물었으나 그가 인정하지 않아 현에 알리고 잡아오려 하였다. 사람들이 번갈아 그를 꾸짖었다. “너는 어찌 어진 분을 침범하였느냐?” 그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사람들이 말하였다. “선생은 덕 있는 어른이다. 어서 나무를 메어 돌려드리면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가 따르자 선생은 과연 더 묻지 않았다. 선생이 오나라 묘담원에 머물 때 비구니가 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새겨 저주에 썼다. 그곳에 머물던 진경이 이를 얻어 폭로하려 하자 비구니가 몹시 두려워하였다. 선생은 이를 알고 계책으로 진경을 밖으로 내보낸 뒤 목각을 부수었다. 진경이 돌아와 성내고 욕하자 선생은 천천히 말하였다. “그대는 선비인데 오초 지방에서 이런 명성을 얻는 것은 그대에게 매우 불리합니다. 돈이 부족하다면 내 재산을 함께 써도 되니 걱정하지 마시오.” 뒤에 비구니가 금과 비단을 수레에 싣고 와서 사례하였으나 선생은 꾸짖어 돌려보냈다.
지방을 맡은 중신들과 염방사들은 선생의 이름을 듣고 만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만난 뒤에는 앞다투어 글을 올려 천거하려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생은 모두 힘껏 사양하였다. 오직 백성의 고통과 관리의 폐단만은 반드시 여러 번 이마를 찌푸리며 아뢰었으니, 몸소 그 고통을 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담회의 정공이 절동에 사신으로 왔을 때 특히 선생을 공경하여 귀한 손님의 예로 대하였다. 사람들 가운데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앞다투어 공에게 선생의 행실을 헐뜯었다. 공은 웃으며 말하였다. “주빙군은 여러분의 장점을 성대히 드러내는데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헐뜯으니, 그 도량의 차이가 어찌 이토록 큽니까?” 모두 부끄러워하여 물러서지도 못하였다.
처음 선생이 장년일 때 어머니께서 비의 병을 앓으셨으므로 의술을 꽤 익혔다. 뒤에는 더욱 연구하고 말하였다. “내가 이미 궁하여 낮은 곳에 있으니 은택을 멀리 미치게 할 수 없다. 멀리 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의술이 아니면 무엇에 힘쓰겠는가?” 당시에는 진사문·배종원이 정한 대관의 197방이 크게 유행하였다. 선생만은 의심하여 말하였다. “약을 쓰는 것은 저울을 잡는 것과 같아 물건의 무게에 따라 앞뒤로 움직여야 한다. 옛 처방이 새로운 증상과 어찌 늘 서로 맞을 수 있겠는가?” 이에 스승을 찾아 그 학설을 바로잡으려 하여 도강을 건너 오로 가고 다시 완릉과 건업으로 갔으나 모두 만나지 못하였다. 무림으로 돌아오자 누군가 나사도 지제를 말해 주었다. 지제의 자는 자경이며 송나라 보우 연간의 환관이었다. 의술에 정통하여 금나라 사람 유원소의 학문을 얻고 이고·장종정 두 집안의 학문도 두루 참고하였으나 성품이 몹시 거만하였다.
선생이 찾아갔으나 열 번을 왕래해도 만나지 못하였다. 선생의 뜻은 더욱 굳어져 날마다 그의 문 앞에서 공손히 서 있었고 큰바람과 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나씨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주언수입니다. 그대가 강남에 살면서 이 선비를 놓치면 사람들이 뒤에 그대를 비난할 것입니다.” 나씨가 급히 용모를 가다듬고 만나니 첫눈에 오랜 벗과 같았다. 의술을 배우는 요체를 말해 주기를, 반드시 《소문》과 《난경》에 근본을 두어야 하며 습열과 상화로 인한 병이 가장 많은데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다. 아울러 장사의 책은 외감에 자세하고 동원의 책은 내상에 자세하므로, 반드시 두 가지를 다 알아야 질병을 치료할 때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진씨와 배씨의 보잘것없는 학문에 얽매이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를 듣고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이 풀렸으며 학문을 이루고 돌아왔다. 고향의 여러 의사들은 처음에는 크게 놀라고 중간에는 비웃으며 배척하였으나, 마침내 크게 복종하여 서로 높이 받들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사방에서 병 때문에 맞아 가려는 이들이 없는 날이 없었으며 선생은 즉시 가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비와 눈이 길에 가득하여도 그만두지 않았다. 하인과 수레꾼이 고달픔을 호소하면 선생은 타일렀다. “병든 사람은 한 시각을 한 해처럼 보내는데 스스로 편하려 하겠느냐?” 가난한 사람이 약을 구하면 주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곤궁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에게는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약을 마련해 찾아가 일으켜 주었으며, 백 리가 멀어도 꺼리지 않았다. 강절의 성신이 민 지방의 도적을 토벌하러 갔다가 장기가 있는 땅에 깊이 들어가 병을 얻어 전당으로 돌아왔고, 장차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선생이 진맥하고 말하였다. “20일 뒤에 죽을 것입니다. 삼구를 지날 때 저를 불렀더라면 연경으로 돌아가게는 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살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고한 때에 고소역에서 죽었다.
권세 있는 귀인이 가벼운 병으로 불러 놓고 뜰 가운데 꼿꼿이 앉아 삼품의 의장과 호위를 좌우에 늘어세웠다. 선생은 진맥을 마치자 말없이 나왔다. 누군가 뒤쫓아 물으니 선생은 말하였다. “석 달 뒤면 귀신이 될 터인데 아직도 교만한 기운이 있는가?” 그가 죽자 집안에서는 선생의 의술을 신묘하게 여겨 곡식을 싣고 사례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하였다. 한 소년이 열병을 앓아 두 광대뼈가 불처럼 붉고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뜰을 조급하게 뛰어다니다가 강에 뛰어들려 하였다. 선생은 “이는 음증이다”라고 하고 부자탕을 만들어 마시게 하였다. 사람들이 놀라 혀를 내둘렀으나 마신 뒤에는 병이 씻은 듯 사라졌다. 선생의 치료가 이처럼 신묘하게 맞은 일이 매우 많으나 문인들이 증상별로 분류한 책이 있으므로 여기에는 자세히 싣지 않는다.
선생은 학처럼 고고하고 꼿꼿하여 무리와 달랐다. 두 눈에는 크고 작은 테가 있어 해가 뜨듯 밝았으며, 굳센 기색은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맑고 밝으며 평탄하고 너그러워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고, 정신이 충만하며 사람을 대할 때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므로 모두 가까이 모시기를 즐거워하였다. 말에는 정기와 기백이 있어 쇠붙이가 울리듯 쟁쟁하여 듣는 이가 귀를 기울이게 하고 분연히 일어나려는 뜻을 품게 하였다. 천인감응과 재앙·경사가 같은 부류에 따라 이른다는 설에 대해서는 더욱 힘을 다해 경계하고 되풀이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였으며, 어리석거나 밝거나 강하거나 약한 이가 모두 그 마음을 얻었다. 노인은 자상함을 좋아하고 어린이는 공손하고 순종함을 즐겨 모두 충신이 아름다운 덕임을 알았다. 한 번에 변하여 도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지나치고 심한 것을 없애어 볼 만한 것이 있었다. 혹 작은 잘못이 있으면 깊이 감추고 덮어 선생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선생의 지팡이와 신이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라서 교화되었다.
포양의 정태화는 열 대가 한집에 살았는데 선생은 이를 기뻐하여 얼굴빛에 드러났다. 그 집안에서 강구한 관혼상제의 예는 매번 선생에게 자문한 뒤 정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서적에서 고증하되 한결같이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한마음으로 천지의 큼과 함께하고 귀와 눈을 예악의 근원으로 삼아, 오래 수양을 쌓아 안팎이 일치하였다. 밤에 잠든 때에도 대낮에 행하던 바와 같고 어두운 방에서도 큰길에 드러나 있을 때와 같았으며, 부지런히 힘써 늙어서 더욱 돈독하였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고 화려함을 다투는 선비를 보면 곧 말하였다. “성현의 한마디는 평생 실천해도 다하지 못합니다.” 이것만으로도 많다고 여겼다. 아름다운 말과 화려한 표현을 골라 꾸미는 글은 더욱 돌아보려 하지 않았고 우리 도를 해치는 좀벌레로 여겼다. 스스로 글을 지을 때에는 대체로 이치를 종지로 삼았으며, 강상과 정치·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면 가볍게 논하지 않았다.
집과 담장에는 검소하고 소박함을 깊이 숭상하였다. 옷은 거친 베로 만든 넓은 옷뿐이어서 몸을 가리는 데만 뜻을 두었으며, 명아주국과 마른 밥도 팔진미처럼 편안히 여겼다. 혹 부유하고 큰 집안에 가서 연석을 펴고 산해진미를 앞에 가득 차려 놓아도 선생은 옷깃을 바로 하고 말없이 앉아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맑게 수양하고 어려운 절조를 지켜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담담하여 즐기는 바가 없었다. 오직 남의 선행을 듣고자 하여 놓칠까 두려워하였고, 들을 때마다 기록하여 세상에 권장하는 데 썼다. 법도에 따르지 않는 이를 만나면 반드시 고치도록 가르쳤으며,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또한 적절한 방법으로 이끌었다.
만년에는 식견이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괄창에서 돌아오다가 영강을 지나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청전의 백성들은 시끄럽고 사나우니, 이처럼 법이 느슨하고 명령이 어그러진 때를 만나면 반드시 험한 지형에 의지해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얼마 뒤 과연 그러하였다. 또 친지들에게 말하였다. “내 발길이 미친 곳이 넓은데 풍속이 매우 야박해졌습니다. 머리를 늘어뜨린 어린아이도 교묘한 꾀로 윗사람을 속일 줄 아니, 하늘의 노여움이 이미 극에 달하여 반드시 남의 손을 빌려 그들을 없앨 것입니다. 어찌 선행에 힘써 후손을 이어 가지 않습니까?” 그때는 태평하였으므로 듣는 이들이 모두 선생이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웃었다. 말한 지 얼마 안 되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텅 빈 마을에 밥 짓는 연기 하나 없는 곳이 걸핏하면 백여 리나 이어졌다.
선생의 저서로는 《송론》 1권, 《격치여론》 몇 권, 《국방발휘》 몇 권, 《상한론변》 몇 권, 《외과정요발휘》 몇 권, 《본초연의보유》 몇 권, 《풍수문답》 몇 권 등 모두 일곱 종류가 있다. 미묘한 문장과 깊은 뜻으로 앞사람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많이 드러내었다. 선생은 일찍이 말하였다. “의리의 정미함과 예악의 제도는 우리 문중의 스승과 벗들이 이미 모두 논하여 지었으니, 나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그 저술은 유독 의술에 뜻을 둔 것이 많았다. 선생은 지원 신사년 11월 28일에 태어나 지정 무술년 6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에 다른 말은 없었고 사범을 불러 “의학도 어렵다. 너는 삼가 기억하라”고만 하였다. 말을 마치고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8세였다.
척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도일서원 산장 상조의 딸이며 35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둘로 사연과 옥여이며, 사연도 3년 전에 먼저 죽었다. 딸은 넷으로 부사옹·장장원·여문충·장사충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하나로 문거이며, 손녀는 둘로 한 명은 정유에게 시집갔고 한 명은 아직 어렸다. 그해 11월 어느 날 비로소 선생을 어느 산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세상을 떠난 지 다섯 달 뒤였다. 선생이 살던 곳을 단계라 하였다. 배우는 이들이 존경하여 감히 자를 부르지 않았으므로 사는 곳을 따라 단계선생이라 불렀다.
학술이 천하에 밝지 못하게 된 뒤로 성현이 인심을 방비하고 세도를 유지하려고 지은 책을 흔히 갈라내고 주워 모아 문장을 짜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총애를 얻는 도구로 흘러가게 하였다. 간혹 전해진 경전에 뜻을 두어 숭상할 만해 보이는 이가 있어도 훈고에 얽매여 같고 다름을 어지럽게 다투는 모습이 여러 송사가 모인 듯하다.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해서는 모두 멀리 떨어져 서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니, 그 지식은 도리어 배우지 않은 평범한 사람 아래에 있다. 아아, 진한 이래로 혹 그러하였다. 그러나 신령한 해치가 울지 않으면 요사한 여우의 괴변이 그치지 않고, 황종을 연주하지 않으면 질그릇 두드리는 소리가 날로 심해진다.
하늘이 문운을 열어 염계와 낙양의 학문이 떨쳐 일어나 멀리 범인과 성인의 실마리를 밝히고, 흘러간 것은 막아 멈추게 하며 굳어 막힌 것은 풀어 통하게 하였다. 오직 어둠을 열어 걷어 내고 정명함을 되돌린 뒤에야 그치려 하였다. 그 학문이 전해짐에 고정만이 대성을 모았으며, 고정의 전승에서는 다시 금화의 네 현인이 정통을 이었으니 도장을 진흙에 찍듯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빛이 잇고 그림자가 이어져 아름다운 도가 참으로 드러났다. 선생은 젊어서 협기를 지니고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나 도덕과 성명에 관한 말을 듣자 곧 변하여 강직하고 굳세어졌다. 이로써 도량이 넓고 짊어진 임무가 무거워, 자나 깨나 앞선 철인들을 생각하며 날이 부족하다고 여겼고, 백성이 나의 동포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라도 은혜와 이익이 조금이나마 사물에 적셔질 수 있는 기회를 만나면 반드시 정성스럽게 주선하여 마음을 다하려 하였다. 사람을 응대할 때에는 또 그 마음이 감동하여 일어나는 계기를 따라 인의의 가르침을 베풀고, 부류를 미루어 넓혀 사물을 깨우치고 교화를 이루었다. 이른바 바람·비·서리·이슬 어느 것도 군자의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역시 거짓으로 돌릴 수 없다. 의술에 생각을 미쳐서도 감추어진 것을 찾고 비밀을 밝혀 남방에서 끊긴 학문을 일으켰다. 병든 이가 있는 집안은 선생에게 생명을 의탁하였다. 선생은 한낱 평민이었는데 사물에 은택을 미침이 이와 같았다. 만일 조정에서 지위를 얻어 그 도를 시행하였다면 뚜렷하고 큰 효험은 또 어떠하였겠는가!
아아, 선생은 이제 떠나셨다. 산처럼 우뚝하고 깊은 못처럼 맑은 모습, 우물처럼 깨끗하고 돌처럼 굳은 절조와 말로 전할 수 없는 경지에 이제 다가갈 수 없다. 다만 남긴 행실을 따라 말로 외울 뿐이니, 보고 들은 것이 넓지 못한 내가 어찌 천백 가운데 열이나 하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버리면 선생을 구할 길이 없으므로 감히 행장의 대강을 취하여 서술하고 명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