余於乙卯冬 , 載硯歸籍 , 嘗輯 《 歸硯錄 》 以見志 。 友人時招余遊滬 , 輒為事阻 , 未得果行 。 庚申秋 , 渟溪被難 , 後諸相知招遊甬 、 越 、 武林 。 余謂 : 必爭之地 , 完善之區 , 繁富之鄉 , 我能往 , 寇亦能往 , 何必多此跋涉耶 ? 悉卻之 , 意欲乘桴海上 , 法聖人之居九夷 , 而季傑 、 性癡 、 若蕖相繼病危 。 蓋季傑神氣素怯 , 驚嚇感邪 , 病未解而正氣散漫 , 不能自持 , 余以攘外安內治之 。 性癡善憂多郁 , 氣機澀 , 伏邪遂得依山傍險而負固不解 , 余但舒其鬱結 , 消其憂懣 , 徐為疏瀹 , 邪亦潛消 。 若渠弱而好俠 , 嫉官兵之無用 , 憤寇氛之日張 , 怒木直升 , 發沖眥裂 , 柔金失降 , 胃閉津枯 , 一息懨懨 , 舌尖焦硬 , 飲難下咽 , 聞藥即嘔 , 肌消音微 , 涎流腥赤 , 自知不起 , 無藥可投 。 余以毫無氣味 、 性極平淡之西洋參 、 枇杷葉 、 石斛 、 蘆根 、 竹茹 、 鮮稻頭煎而頻灌 , 始漸轉機 , 迨二病痊可 , 又為次女嫁事所羈 。 既而彤彤徂暑 , 畏於登程 , 且挈眷以行 , 談何容易 , 孑身而往 , 誰託事孥 ? 展轉思維 , 殊無善策 。 承呂君慎庵招遊濮院 , 遂乘舟前往 , 寄廡於董君枯匏家 , 閉戶忍飢 , 草 《 飲食譜 》、《 雞鳴錄 》 二書 , 以擄憂悃 。 甫脫稿 , 而渟溪復遭焚掠 , 季傑挈眷徒於窮鄉 , 山妻攜四女來濮 。 嗣杭垣復陷 , 洲城亦潰 , 天崩地裂 , 無路可行 , 急將三 、 四二女 , 擇攸遣嫁 。 而四女所歸姚氏 , 世居嘉興之僻鄉 , 慎庵已挈眷避此 , 故為我謀此退步也 。 四月十三日 , 賊過梅涇 , 闔鎮皆逃 , 余遂送山妻及五 、 六二女於姚氏 , 而陳君半樵適以信來 , 招遊滬瀆 。 有桐廬王文介者 , 病危於屠甸 , 神昏遺矢 , 醫皆卻走 。 宗侄紹武飛函丐余往視 , 乃溫邪誤表也 , 幸體堅邪有下行之路 , 與大劑涼解而瘥 。 紹武亦慫恿遊滬 , 因於二十四日 , 托妻孥於姚 、 呂諸君而行 , 五月初三日抵滬 。 此地曾遭兵燹 , 不但滄海漸變桑田 , 中原宛如外國 。 二十年來 , 開闢日甚 , 商舶鱗集 , 而江浙之倖免於難者 , 率避於此 。 帆檣林立 , 踵接肩摩 , 彈丸小邑 , 居然成一大都會矣 。 余以性情疏懶 , 相識者多 , 既無泛應之才 , 又恐不知者疑為有求而來也 。 故不謁一客 , 暫寓東門外周君採山 「 德泰紙號 」 內 , 以半樵 、 紹武皆在此佐會計 。 而周氏昆仲 , 向以青眼視我 , 雖市廛紛沓 , 藉省旅資 , 惟採山四令弟履慶 , 去年患病 , 盼余甚切 , 至彌留時 , 猶道余不置口 , 余為酷熱 , 不能行 , 不料其英一病而不起也 , 神交數載 , 竟無一面之緣 , 清夜捫心 , 徒呼負負 。 居數日 , 乞診者紛紛 , 聊記一二 , 用質宗工 , 題曰 「 醫影 」, 而序其 「 乘桴 」 之由如下 。
나는 을묘년 겨울 벼루를 싣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찍이 『귀연록(歸硯錄)』을 엮어 뜻을 나타냈다. 벗들이 때때로 나를 상해로 놀러 오라고 불렀으나, 번번이 일이 가로막아 끝내 가지 못하였다. 경신년 가을 정계(渟溪)가 난리를 겪자, 뒤이어 여러 지인들이 영(甬)·월(越)·무림(武林)으로 오라고 청하였다. 나는 “반드시 쟁탈할 땅이며 온전하고 좋은 지역이고 번성하고 부유한 고장이니, 내가 갈 수 있다면 도적도 갈 수 있다. 어찌 이렇게 노고를 더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모두 사양하였다. 바다에 뗏목을 띄워 성인이 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뜻을 본받으려 하였는데, 계걸(季傑)·성치(性癡)·약거(若蕖)가 차례로 위독해졌다. 계걸은 신기가 본래 약하고 겁이 많아 놀란 뒤 사기에 감촉되었다. 병이 풀리기도 전에 정기가 흩어져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므로, 나는 밖의 사기를 물리치고 안을 안정시키는 법으로 치료하였다. 성치는 근심이 많고 잘 울체되어 기기가 껄끄러워졌으며, 잠복한 사기가 산과 험한 지세를 의지하듯 굳게 버티어 풀리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그 울결을 펴고 근심과 번민을 없애며 서서히 소통시켜 주었더니 사기도 은밀히 사라졌다. 약거[원문: 若渠]는 몸이 약하면서도 의협을 좋아하여 관군의 무능을 미워하고 도적의 기세가 날로 커짐에 분개하였다. 노한 목기가 곧장 치솟아 머리털이 곤두서고 눈꼬리가 찢어질 듯하였으며, 유약한 금은 내려가지 못하였다. 위가 닫히고 진액이 말라 한 줄기 숨만 힘없이 이어지고, 혀끝은 타서 단단해졌으며, 마실 것도 목으로 넘기기 어렵고 약 냄새만 맡아도 토하였다. 살은 빠지고 목소리는 희미하며, 침은 비리고 붉게 흘렀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고 투여할 약도 없었다. 나는 냄새와 맛이 전혀 없고 성질이 아주 평담한 서양삼·비파엽·석곡·노근·죽여·신선한 벼의 윗부분[鮮稻頭]을 달여 자주 먹였더니 비로소 점차 전환점이 생겼다. 두 병이 나을 즈음에는 또 둘째 딸을 시집보내는 일에 매였다.
뒤이어 붉게 달아오르는 여름 더위가 닥쳐 길을 나서기가 두려웠다. 가족을 데리고 가는 일이 어찌 쉽겠으며, 혼자 간다면 집안일과 자식들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이리저리 생각하여도 좋은 계책이 없었다. 여신암(呂慎庵) 군이 복원(濮院)으로 오라고 초대한 덕분에 배를 타고 가서 동고포(董枯匏) 군의 집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문을 닫고 굶주림을 참으며 『음식보(飲食譜)』와 『계명록(雞鳴錄)』 두 책을 초고하여 근심과 괴로움을 풀었다. 막 탈고하였는데 정계가 다시 방화와 약탈을 당하였다. 계걸은 가족을 데리고 외진 시골로 옮겼고, 아내는 네 딸을 데리고 복원으로 왔다. 이어 항주성이 다시 함락되고 주성(洲城)도 무너져,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듯 갈 길이 없었다. 급히 셋째와 넷째 두 딸의 배필을 골라 시집보냈다. 넷째 딸이 시집간 요씨 집안은 대대로 가흥의 외딴 시골에 살았으며, 신암은 이미 가족을 데리고 그곳에 피난해 있었으므로 나를 위해 이 물러설 길을 마련해 준 것이다.
4월 13일 도적이 매경(梅涇)을 지나자 온 고을이 모두 달아났다. 나는 아내와 다섯째·여섯째 두 딸을 요씨 집으로 보냈는데, 마침 진반초(陳半樵) 군에게서 편지가 와 호독(滬瀆)으로 오라고 청하였다. 동려(桐廬)의 왕문개(王文介)라는 사람이 도전(屠甸)에서 위독하여 정신이 혼미하고 대변을 지렸으며, 의원들은 모두 물러나 달아났다. 종질 소무(紹武)가 급히 편지를 보내 나에게 와서 살펴 달라고 청하였다. 가 보니 온사를 잘못 발산시킨 것이었다. 다행히 몸이 튼튼하고 사기가 아래로 나갈 길이 있었으므로, 서늘하게 풀어 주는 약을 대량으로 써서 나았다. 소무도 상해로 가기를 권하여 24일 아내와 자식들을 요씨와 여씨 등에게 맡기고 길을 떠나, 5월 초3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도 일찍이 전쟁의 재난을 겪었는데, 창해가 차츰 뽕밭이 된 것뿐 아니라 중국 땅이 마치 외국 같았다. 20년 동안 개척이 날로 심해져 상선이 비늘처럼 모였고, 강소와 절강에서 다행히 난을 면한 이들이 대개 이곳으로 피하였다. 돛대가 숲처럼 서고 발꿈치와 어깨가 부딪칠 만큼 사람이 많아, 탄환만 한 작은 고을이 어엿한 대도회가 되었다.
나는 성품이 소탈하고 게으른 데다 아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사람을 두루 응대할 재주도 없고, 나를 모르는 사람이 무엇을 구하러 왔다고 의심할까 염려되어 아무도 찾아뵙지 않았다. 잠시 동문 밖 주채산(周採山) 군의 ‘덕태지호(德泰紙號)’ 안에 묵었는데, 반초와 소무가 모두 그곳에서 회계를 돕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씨 형제는 전부터 나를 호의로 대하였으므로, 비록 시장이 복잡하고 시끄러워도 여비를 덜 수 있었다. 다만 채산의 넷째 아우 이경(履慶)이 지난해 병들었을 때 나를 몹시 기다렸고, 임종할 때에도 입에서 내 이야기를 놓지 않았다. 나는 혹독한 더위 때문에 가지 못하였으며, 그 영특한 사람이 한 번 병들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줄은 몰랐다. 여러 해 마음으로 사귀고도 끝내 한 번 만날 인연조차 없었으니, 맑은 밤 가슴에 손을 얹고 그저 ‘저버렸구나, 저버렸구나’ 하고 탄식할 뿐이다. 며칠 지내자 진찰을 청하는 이들이 잇달았다. 이에 한두 사례를 적어 높은 의학의 대가들에게 질정하고자 ‘의영(醫影)’이라 제목 붙이고, ‘승부(乘桴)’의 연유를 이처럼 서문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