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 《 經 》 云 : 壹是皆以修身為本 , 其本亂而末治者否矣 。 垂訓簡易 , 萬世師法也 。 稽諸所以修者 , 則曰正心誠意 , 又曰齊明盛服 , 非禮不動 , 此修於無病時也 。《 易 》 曰 : 懲忿窒欲 , 又曰 : 慎言語 、 節飲食 。 此修於未病前也 。 若病臨於身 , 只以醫藥為修矣 ,《 靈樞 》、《 素問 》, 歷歷可考 。 然亦有治病去其八九之論也 , 推及其至淺則可治 , 深則不治 。 病至於不治 , 則束手待盡者有之 , 欲罷不能者亦有之 , 豈非人生恨事乎 ? 設有良醫既能治病 , 且能去病之根 , 使受病者目見為快 , 即死已無憾矣 。 況翻然可不死乎 ? 況從此可長生乎 ? 何幸如之 ! 何樂如之 ! 不死若何 ? 去其病也 ; 長生若何 ? 去病根也 ; 去根若何 ? 去其積也 ; 去積若何 ?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 , 曰 「 揉 」。 其揉若何 ? 請假賢傳引 《 詩 》 之語為則 , 曰如切如磋 , 如琢如磨者 , 自修也 。 若是易知易能 , 人人得為 , 何待於言 ? 正恐其道在邇 , 而求諸遠 ; 事在易而求諸難也 。 故縷述經驗 , 信而有證 , 為修身者忠告而善道之 。《 素問 》 有云 : 無形無患 。 是有形者皆有患也 , 能不思所以然設法去之乎 ?《 詩 》 云 : 周雖舊邦 , 其命維新 。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성인의 경전에 ‘한결같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으니,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다. 남긴 가르침은 간결하고 쉬워 만세에 본받을 법이다. 수양하는 방법을 살피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성실히 한다고 하며, 또 가지런하고 밝게 하고 의복을 갖추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병이 없을 때 수양하는 것이다. 『주역』에는 분함을 경계하고 욕심을 막으라 하였고 또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라 하였다. 이는 병들기 전에 수양하는 것이다. 병이 몸에 닥치면 오직 의약으로 수양하니 『영추』와 『소문』에서 낱낱이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되 열에 여덟아홉을 없앤다는 논설도 있다. 끝까지 미루어 보면 얕으면 치료할 수 있고 깊으면 치료하지 못한다. 병이 불치에 이르면 손을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그만두려 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 인생의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좋은 의사가 병을 고칠 뿐 아니라 병의 뿌리도 없애어 환자가 눈앞에서 통쾌함을 본다면 죽더라도 이미 유감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뒤집듯 회복하여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더구나 이로부터 오래 살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이처럼 다행하고 이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병을 없애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병의 뿌리를 없애는 것이다. 뿌리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을 없애는 것이다. 적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생 행할 수 있는 한마디가 있으니 ‘주무름’이다. 어떻게 주무르는가? 현인의 전에서 『시』를 인용한 말을 빌려 법칙으로 삼고자 한다. ‘자르는 듯하고 가는 듯하며 쪼는 듯하고 연마하는 듯한 것’이 스스로 수양하는 일이다. 이처럼 알기 쉽고 하기 쉬워 누구나 할 수 있다면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바로 도가 가까이 있는데 먼 데서 구하고 일이 쉬운데 어려운 데서 구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을 세세히 적어 믿을 만한 증거를 갖추고 수신하는 이에게 충고하며 잘 이끌고자 한다. 『소문』에는 ‘형체가 없으면 근심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형체가 있는 것은 모두 근심이 있는 것이니 어찌 그 까닭을 생각하여 없앨 방법을 마련하지 않겠는가? 『시』에 ‘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명은 새롭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는 곳이 없다.
道光丙午年六月立秋日 天休子書引
도광 병오년 유월 입추일, 천휴자가 서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