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地之大德曰生 , 信有之矣 , 然必待人力以成也 。 如佃田然 , 除鋤草萊 , 五穀方茂 , 若聽其自然 , 則草滿而田荒矣 , 豈天不施地不生耶 ? 由芸力之不至也 。 積之於人也 , 亦然 。 臟腑筋皮秉受氣血 , 互相生養 , 有益無礙 , 各完本形 。 若至於積 , 如鐵生鏽 , 附骨肉臟腑以生 , 分氣血筋膜以成 , 初如絲粗 , 有長無消 , 及其至也 , 日引月長 , 歲粗時大 , 非但氣血皆為所奪 , 即部位亦為所侵 , 空竅塞滿 , 百病叢生 , 人反無以自完矣 。 養癰成患 , 誰任其咎 ? 今得此揉法 , 積可立消 , 病永不生 , 真起死回生之術 , 宜其為養形之法矣 。 予六十餘年之積 , 亦云多矣 , 竭數月之工已獲大效 , 年餘之後 , 一洗而淨 , 可不謂之神速乎 ? 不知我獨如此 , 或人人皆可如此 。 茫茫天壤 , 前無古人 , 後無來者 , 孰從而就正之哉 ? 於其完也 , 書此一冊 , 交子侄等 , 留以咨訪 , 亦有同予者否 , 乞其鑑定焉 。 或有同志自修 , 仿為以保其身 , 亦可匡予之不逮然 。 譬若掘井九仞而不及泉 , 猶為棄也 , 尚各勉旃 。 諺云 : 修仙未成者 , 固須日日修 ; 已成者 , 尤須日日修 。 一經間斷 , 即仍不仙 。 譬此揉工 , 庶幾近似 。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한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반드시 사람의 힘을 기다려 이루어진다. 밭을 가꾸는 것과 같아 잡초를 김매어 없애야 오곡이 무성하다. 자연에 맡기기만 하면 잡초가 가득하고 밭은 황폐해지니 어찌 하늘이 베풀지 않고 땅이 낳지 않아서이겠는가? 김매는 힘이 충분히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적이 있는 것도 같다. 장부·근육·피부는 기혈을 받아 서로 생하고 길러 이롭고 방해가 없으며 각각 본래 형체를 온전히 한다. 적은 쇠에 녹이 슬듯 뼈와 살과 장부에 붙어 생기고 기혈과 근막을 나누어 차지하여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실처럼 가늘고 자라기만 할 뿐 줄지 않는다. 극에 이르면 날마다 늘고 달마다 자라며 해마다 굵어지고 때마다 커져 기혈을 모두 빼앗을 뿐 아니라 자리까지 침범한다. 빈 구멍이 가득 막히고 온갖 병이 무리지어 생겨 사람은 도리어 자신을 온전히 할 수 없다. 옹을 길러 환란을 만들었으니 누가 잘못을 맡겠는가? 이제 주무름의 방법을 얻어 적을 곧 없애고 병이 영원히 생기지 않게 하니 참으로 죽은 이를 되살리는 술법이며 형체를 기르는 방법이 마땅하다. 나의 육십여 년 적도 많다고 할 만한데 몇 달의 공을 다하여 이미 큰 효과를 얻고 한 해 남짓 뒤에는 한 번 씻어 내듯 깨끗해졌으니 신속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만 이런지 누구나 이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득한 천지에 앞에는 옛사람이 없고 뒤에는 오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에게 나아가 바로잡겠는가? 마칠 때 이 책 한 권을 써서 아들과 조카들에게 주고 남겨 자문하게 하였으니 나와 같은 이가 있는지 감정해 주기를 청한다. 뜻을 같이하여 스스로 수양하며 본떠 몸을 보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미치지 못한 점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물을 아홉 길 파고도 샘에 이르지 못하면 여전히 버린 셈이니 각자 힘써야 한다. 속담에 ‘신선 수련을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은 본래 날마다 닦아야 하고 이미 이룬 사람은 더욱 날마다 닦아야 하며, 한 번 끊으면 곧 다시 신선이 아니게 된다’고 하였다. 이 주무름의 공에 비기면 거의 비슷하다.
丙午六月立秋日
병오년 유월 입추일.
天休子跋之兼以自勖云爾
천휴자가 발문을 쓰고 아울러 스스로 힘쓰고자 할 뿐이다.
心之官則思 , 思則得之 , 不思則不得也 。 若是乎人同此心 , 心同此理 , 莫不欲得而竟有不思者 , 何也 ? 非不欲思也 , 有所蔽而不能自主也 。 非蔽於物也 , 乃本身中自生之積耳 。 夫心之於五行 , 火也 , 請以火喻 。 人譬爐也 , 食譬炭也 , 心譬火也 , 思譬焰也 、 積譬灰也 。 堅其爐 , 多其炭 , 去其灰 , 火自旺 , 焰自明 , 出不竭 , 用不窮 , 至誠無息之謂也 。 今火而不焰 , 非火故也 , 灰蔽之也 。 不蔽焰明 , 輕蔽焰微 , 重則不焰 , 再重則熄 , 去灰則復焰矣 。 心之積與火之灰同 , 心之思不思 , 系積之有無輕重焉 。 有說乎 ? 曰有 , 請以中風病證之 , 卒然不省 , 尚能飲食 , 非積之蔽心重乎 ? 言語模糊 , 猶可半了 , 非積之蔽心輕乎 ? 次則明少暗多 , 繼則明多暗少 , 以漸輕以漸明 , 明則能思矣 , 仍以多少分耳 。 推而言之 , 人之殘忍 、, 刻薄 、 乖戾 、 執拗 , 孰無人心 , 而若是之異乎 ? 必是由積蔽所致 , 又分輕重矣 。 此惟精惟一 , 允執厥中 , 之所以大聖人也 。 方書云 : 誨言病 、 怕治病 , 即是病 , 即此意也 。 然則忠恕絜矩 , 自反多識 , 前言往行 , 以畜其德 , 人不同與 。 曰是道心也 , 為明而能思者言可 。 若積蔽者復人心而不能 , 奚暇論道心哉 ? 向惜天分限者 , 無治心法 , 今始得法 , 去其積則心可復明 , 而無思不得矣 。 果能揉之 , 五行無滯 , 相養相生 , 百節疏通 , 萬竅玲瓏 , 天君泰然 , 四肢從令 , 雖愚必明 , 雖柔必強 , 所謂修身 , 在正其心 。
마음이라는 기관은 생각하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같은 마음이 있고 마음마다 같은 이치가 있어 모두 얻고자 하는데도 끝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왜인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린 것이 있어 스스로 주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물에 가린 것이 아니라 자기 몸속에서 생겨난 적일 뿐이다. 심은 오행에서 화이므로 불로 비유하겠다. 사람은 화로, 음식은 숯, 마음은 불, 생각은 불꽃, 적은 재에 비유된다. 화로를 튼튼하게 하고 숯을 많이 넣고 재를 없애면 불은 저절로 왕성하고 불꽃은 저절로 밝아 꺼내도 다하지 않고 써도 궁하지 않으니 지성무식이라는 것이다. 지금 불은 있어도 불꽃이 없는 것은 불 때문이 아니라 재가 가렸기 때문이다. 가리지 않으면 불꽃이 밝고 조금 가리면 미약하며 무겁게 가리면 불꽃이 없고 더 심하면 꺼진다. 재를 없애면 다시 불꽃이 난다. 마음의 적은 불의 재와 같으므로 마음이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적의 유무와 경중에 달려 있다. 설명이 있는가? 있다. 중풍병으로 증명하겠다. 갑자기 정신을 잃어도 아직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적이 심을 무겁게 가린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 흐릿해도 절반은 알 수 있는 것은 적이 심을 가볍게 가린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에는 밝은 때가 적고 어두운 때가 많다가 이어 밝은 때가 많고 어두운 때가 적어진다. 점차 가벼워지며 점차 밝아지고 밝으면 생각할 수 있으니 역시 많고 적음으로 나뉠 뿐이다. 미루어 말하면 사람의 잔인함·각박함·괴벽·고집에도 누군들 사람의 마음이 없겠는가만 어찌 이처럼 다른가? 반드시 적이 가린 데서 생긴 것이며 또 경중이 나뉜다.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을 붙잡는 것이 큰 성인이 되는 까닭이다. 처방책에서 병이라는 말을 꺼리고 치료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병이라고 한 것도 이 뜻이다. 그렇다면 충서와 혈구, 자신을 반성하고 앞사람의 말과 행실을 많이 알아 덕을 기르는 일에 사람들이 함께하지 않는가? 대답하면, 이는 도심이므로 밝아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 적이 가린 사람은 인심조차 회복하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도심을 논하겠는가? 전에는 타고난 분수가 제한된 사람이 마음을 치료할 방법이 없음을 안타까워했으나 이제야 방법을 얻었다. 적을 없애면 마음은 다시 밝아져 생각하여 얻지 못할 것이 없다. 참으로 주무르면 오행에 정체가 없고 서로 기르고 생하며 온갖 마디가 소통하고 만 가지 구멍이 맑게 트여 천군은 태연하고 사지는 명령을 따른다.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고 유약해도 반드시 강해지니 이른바 수신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 誰人肯向死前休 」, 帝君簽語也 。 幼年誦之 , 既訝設詞之異 , 又詫撒手之難 , 心嚮往之 , 或一見焉 。 於時雙親蔭芘 , 未涉世緣 , 轉瞬七十年矣 , 夢境迷離 , 如侍膝下 , 恍然在目前也 。 其中四十餘年 , 齊 、 魯 、 吳 、 越 、 楚 、 粵 、 燕 、 豫 , 馳驅南北 , 足跡摩停 ; 地方河工 , 官場皆歷 ; 名韁利絆 , 辛苦備嘗 。 此中所恃以立骨者 , 和平簡易 , 肯吃虧而不佔便宜 , 常存知止有定之訓 , 從無爭競不肯之心 , 自幼本性直貫於今 。 己亥冬月 , 引見更蒙召見 , 以才具平庸休致 , 此天休於前也 。 自維一芥之微 , 草彌木卒 , 何與輕重有無 ? 乃得仰沐聖明之恩 , 退遂林泉之願 , 上天默佑 , 何因材之篤也 。 羽漸歸陸 , 尾遁潛淵 , 一衣一食 , 外無求焉 , 不聞不問 , 自適自樂 , 一切世事度外置焉 , 此自休於後也 。 非肯從辟人之士也 , 同夢論夢 , 已無謂矣 , 夢後預期重夢 , 不更無謂乎 ? 非肯從辟世之士也 , 逢場作戲 , 已覺假矣 , 場下自演獨戲 , 不更覺假乎 ? 休已乎休矣 ! 人休我乎 ? 人不休我 , 我休人也 。 世休我乎 ? 世不休我 , 我休世也 。 休已乎休矣 ! 休乎其所當休 , 休乎其所樂休 , 休乎其所不得不休 , 何所謂肯休與不肯休耶 ? 獨不意六十年前 , 嚮往欲見之人而身蹈之也 。 理耶 ? 數耶 ? 天耶 ? 人耶 ? 莫之為而為者 , 天也 , 莫之致而致者 , 人也 。 遂自易名曰天休子 , 並系以偈 : 雖休勿休 , 作德日休 , 其心休休 , 何天之休 。
‘누가 죽기 전에 기꺼이 쉬겠는가’는 제군의 점괘 말이다. 어려서 외우며 말이 특이함을 이상히 여겼고 손을 놓기가 어려움에도 놀라 마음으로 동경하며 혹 그런 사람을 만나 보려 하였다. 그때에는 부모의 보호 아래 아직 세상 인연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 칠십 년이다. 꿈이 어렴풋하여 아직 부모 무릎 아래에서 모시는 듯 눈앞에 있는 것 같다. 그중 사십여 년 동안 제·노·오·월·초·월·연·예를 남북으로 달려 다니며 발자취가 멈추지 않았고 지방 행정과 하천 공사, 관장 생활을 모두 겪었다. 명예의 고삐와 이익의 굴레 속에 고생을 두루 맛보았다. 그 가운데 뼈대를 세우게 한 것은 화평하고 간이함, 손해를 기꺼이 보고 이익을 차지하지 않음이었다. 멈출 곳을 알아야 안정된다는 가르침을 늘 마음에 두고 다투거나 내키지 않아 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어려서의 본성이 지금까지 곧장 이어졌다. 기해년 겨울에 인견을 받고 다시 소견의 은혜를 입었으나 재주가 평범하다 하여 쉬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먼저 나를 쉬게 한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한 톨 겨자처럼 미미하고 풀과 나무 같은 작은 존재가 경중과 유무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밝으신 성상의 은혜를 입고 물러나 산림과 샘에서 살고 싶은 소망을 이뤘다. 하늘이 말없이 도우니 재목에 따라 북돋는 것이 어찌 이토록 두터운가? 날개는 점차 뭍으로 돌아오고 꼬리는 깊은 못으로 숨어들어 옷 한 벌과 밥 한 끼 외에는 구함이 없다. 듣지도 묻지도 않고 스스로 편안하고 즐거워 모든 세상일을 생각 밖에 두니 이것은 내가 뒤에 스스로 쉰 것이다.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기꺼이 따르려는 것은 아니다. 같은 꿈을 꾸며 꿈을 논하는 것도 이미 의미 없는데 꿈 뒤에 다시 꿈꾸기를 미리 기약하는 것은 더욱 의미 없지 않은가?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기꺼이 따르려는 것도 아니다. 마당을 만나 연극하는 것도 이미 거짓으로 느껴지는데 마당 아래서 홀로 연극하는 것은 더욱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이제 쉬자, 쉬었다. 사람들이 나를 쉬게 하는가? 사람들이 나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들을 쉬게 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쉬게 하는가? 세상이 나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제 쉬자, 쉬었다. 마땅히 쉴 곳에서 쉬고 즐거이 쉬려는 곳에서 쉬며 쉬지 않을 수 없는 곳에서 쉰다. 기꺼이 쉬고 기꺼이 쉬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다만 육십 년 전 동경하여 만나고 싶던 사람의 자리를 몸소 밟게 될 줄은 몰랐다. 이치인가, 운수인가, 하늘인가, 사람인가? 누가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이고, 누가 이르게 하지 않아도 이르는 것은 사람이다. 이에 스스로 이름을 천휴자라 바꾸고 게송을 붙인다. 비록 쉬어도 쉬지 말고 덕을 지어 날마다 아름다워지며, 그 마음이 너그럽고 너그러워 하늘의 아름다운 복을 받으라.
休致歸來 , 死前世事皆肯休矣 , 惟肯休而不容於肯休者 , 惟此身之生氣耳 。 存其心 、 養其性 , 修身以俟天休而已 。 數年以來 , 並筆墨事亦休 , 諉云懶於用心 , 其實是不能收放心 , 又安能用思心哉 ? 向有自修之法 , 曰 「 曬 」, 今有自修之法 , 曰 「 揉 」。 皆前人成法 , 未有發明之言 , 不著證驗之實 , 故後人以老生常談置之 , 而反求醫於人 、 乞靈於草木 , 孰從而知為脫胎換骨 、 起死回生之神術乎 ? 故不憚覙縷立說以表張之 。 問途已經 , 遵而道之 , 方信予言之不謬也 , 茲又為之現身說法焉 。 向云懶於用心 , 非我之懶於用自己之心 , 實自己之心懶為我用也 , 是懶也 。 何以未揉前如彼 , 既揉後如此 , 期月間前後各異 , 或即前所云即是病之說耶 ? 自揉至今 , 不知心已收得否 , 又不知肯為我用否 , 因作心說一首 、 自偈一首 , 心中不似竟無頭緒者 , 不知是否揉而收得 , 一而二 、 二而一者也 。 然耶 , 否耶 ? 若果然耶 ? 則懶竟是病矣 。 既可揉去 , 則凡心之失其常者 , 無莫非病 , 且無莫不可揉而復之也 。 予眼白向多紅絲 , 揉後盡消 。 以此推之 , 心有翳膜 , 當亦可退 , 功夫到時 , 自必有驗 , 今則不敢必也 , 後亦未可諒也 。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와 죽기 전의 세상일은 모두 기꺼이 쉬게 되었다. 다만 기꺼이 쉬고자 해도 쉬도록 허락되지 않는 것은 이 몸의 생기뿐이다.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며 몸을 닦아 하늘이 쉬게 할 때를 기다릴 뿐이다. 수년 이래 글과 붓의 일도 쉬며 마음 쓰기가 게으르다고 핑계 댔으나 사실은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생각하는 마음을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전에는 스스로 수양하는 방법으로 햇볕 쬐기가 있었고 지금은 주무름이 있다. 모두 앞사람이 이루어 둔 방법이지만 밝혀 설명한 말이 없고 증험의 실제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후세는 늙은이의 흔한 말로 치부하고 도리어 남에게 의술을 구하고 초목에 효험을 빈다. 누가 이것을 탈태환골하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신묘한 술법으로 알겠는가? 그러므로 번거롭게 자세히 논설하여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내가 이미 지나온 길을 물어 그대로 따라 걸으면 그제야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믿게 될 것이다. 이제 다시 몸을 드러내어 법을 말한다. 전에 마음 쓰기가 게으르다고 한 것은 내가 자기 마음을 쓰기 게으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마음이 나를 위해 쓰이기를 게을리한 것이다. 이것이 게으름이다. 왜 주무르기 전에는 저러했고 뒤에는 이러하여 한 해 사이 앞뒤가 달라졌는가? 혹 앞서 말한 곧 병이라는 설명인가? 주무른 뒤 지금까지 마음을 이미 거두었는지, 또 기꺼이 나를 위해 쓰이려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심설 한 편과 자기 게송 한 편을 지었다. 마음속에 아주 실마리가 없는 것 같지는 않으나 주물러 거둔 것인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지는 모르겠다. 그런가, 아닌가? 참으로 그렇다면 게으름은 마침내 병이다. 이미 주물러 없앨 수 있다면 마음이 정상을 잃은 것은 모두 병이고 모두 주물러 회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 내 눈 흰자위에는 전부터 붉은 실 같은 혈관이 많았는데 주무른 뒤 모두 사라졌다. 이로 미루어 심에 예막이 있어도 마땅히 물러날 수 있을 것이다. 공이 이르면 반드시 증험이 있겠지만 지금은 감히 단정하지 못하고 뒤의 일도 아직 헤아리지 못한다.
以上三則 , 揉後所得 , 理近於揉 , 故附於後 。
이상 세 조목은 주무른 뒤 얻은 것으로 이치가 주무름에 가까우므로 뒤에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