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天真論昔在黃帝生而神靈弱而能言幼而徇齊長而敦敏成而登大樾謹按成而登天謂登天位也易明夷傳日初登於天照四國也可證此經登天之義故下文即云乃問於天師乃者承土之詞見黃帝既登為帝乃發此問也王冰注白日昇天上說初非經意
「상고천진론」에 “옛날 황제는 태어나면서 신령하였고, 어릴 때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어려서는 사리에 밝고 가지런하였고, 장성해서는 돈후하고 민첩하였으며, 성인이 되어 하늘에 올랐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성인이 되어 하늘에 올랐다’는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뜻이다. 《주역》 명이괘의 전에서 “처음 하늘에 올라 사방의 나라를 비추었다”고 한 것으로 이 경문의 ‘등천’의 뜻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로 아래에 “이에 천사에게 물었다”고 하였다. ‘이에[乃]’는 앞의 말을 잇는 말로서, 황제가 이미 제위에 오른 뒤에 이 질문을 하였음을 나타낸다. 왕빙의 주석이 대낮에 하늘로 올라갔다고 풀이한 것은 애초 경문의 뜻이 아니다.
食飲有節起居有常宋高保衡林億等新校正木引全元起汪云飲食有常節起居有常度樾謹按經文本作食飲有節起居有度故釋之日有常節有常度若如今本則與全氏注不合矣且上丈云法於陰陽和於術數此文度字本與數字為韻今作有常則失其韻矣蓋即因全氏註文有常字而誤入正文遂奪去度字
“먹고 마시는 데 절도가 있고 일상생활에 일정함이 있다.” 송나라 고보형·임억 등의 《신교정》은 전원기의 주석을 인용하여 “음식에는 일정한 절도가 있고 기거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경문은 본래 ‘식음유절, 기거유도’였으므로 ‘일정한 절도가 있다’, ‘일정한 법도가 있다’고 풀이한 것이다. 지금 판본과 같다면 전씨의 주석과 맞지 않는다. 또 윗글에 “음양을 본받고 술수에 조화한다”고 하였으므로 이 글의 ‘도[度]’는 본래 ‘수[數]’와 운을 맞춘 것이다. 지금처럼 ‘유상[有常]’으로 하면 운을 잃는다. 아마 전씨의 주석에 ‘상[常]’자가 있는 탓에 잘못 본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도[度]’자가 빠진 것이다.
以欲竭其精以耗散其真新校正乙甲乙級耗作好樾謹按作好者是也好與欲義相近孟子離嬰篇所欲有甚於生者申論夭壽篇作所好敬子不苟篇欲利而不為所非韓詩外傳作好利是好即欲也以欲竭其精以好散其真兩句文異而義同今作以耗散其真則語意不倫矣王汪曰樂色曰欲輕用曰耗是其所據本已誤也
“욕망으로 그 정을 다 써 버리고 소모하여 그 진기를 흩뜨린다.” 《신교정》에는 《갑을경》의 ‘모[耗]’는 ‘호[好]’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호[好]’로 된 것이 옳다. ‘좋아함’과 ‘욕망’은 뜻이 가깝다. 《맹자》 「이루」편의 “원하는 것이 삶보다 더 심하다”는 말이 《신론》 「요수」편에는 “좋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순자》 「불구」편의 “이익을 원하되 옳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한시외전》에 “이익을 좋아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호’가 곧 ‘욕’이라는 뜻이다. ‘욕망으로 그 정을 다 써 버리고, 좋아함으로 그 진기를 흩뜨린다’는 두 구절은 글자는 다르지만 뜻은 같다. 지금처럼 ‘소모하여 그 진기를 흩뜨린다’고 하면 말뜻이 짝을 이루지 못한다. 왕씨의 주에 “색을 즐기는 것을 욕이라 하고 함부로 쓰는 것을 모라 한다”고 하였으니, 그가 근거로 삼은 판본은 이미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大沖脈盛新校正云全元起注用太素甲乙經俱作伏衝下大沖同樾謹按漠人書太字或作伏漢太尉公墓中書象有伏尉公宇隸續云字書有伏字與大同音此碑所云伏尉公蓋是用伏為大即大尉公也然則全本及太互甲乙經當作伏沖即太衡也後人不識伏字加點作伏遂成異字恐學者疑惑故其論之
“대충맥이 왕성해진다.” 《신교정》에는 전원기 주본과 《태소》·《갑을경》이 모두 ‘복충[伏衝]’으로 쓰며, 아래의 ‘대충’도 같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한나라 사람들의 글에서 ‘태[太]’자를 때로는 ‘복[伏]’의 모양으로 썼다. 한나라 태위공 묘의 글자에는 ‘복위공[伏尉公]’이 있다. 《예속》에는 자서에 ‘복[伏]’자가 있어 ‘대[大]’와 소리가 같으며, 이 비문의 ‘복위공’은 복을 대 대신 쓴 것으로 곧 대위공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씨의 판본과 《태소》·《갑을경》도 마땅히 그 옛 글자에 따른 ‘복충’이어야 하며, 곧 태충이다. 후인들이 그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점을 더하여 ‘伏’로 만들어 마침내 다른 글자가 되었다. 배우는 이들이 의심하고 혼동할까 염려되어 이를 논한다.
四氣調神大論使氣亟奪樾謹按奪即今脫字王注以迫奪說之非是不施則名木多死樾謹按名木猶大木也禮記禮器篇因名山升中於天鄭注曰名猶大也王注以名果珍木說之未得名字之義
「사기조신대론」에 “기로 하여금 급히 빼앗기게 한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탈[奪]’은 지금의 ‘탈[脫]’자이다. 왕씨가 핍박하여 빼앗는다는 뜻으로 풀이한 것은 옳지 않다. “베풀지 않으면 명목[名木]이 많이 죽는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명목은 큰 나무라는 말과 같다. 《예기》 「예기」편의 “명산을 따라 하늘에 중을 올린다”에 대한 정씨 주에 “명은 대와 같다”고 하였다. 왕씨의 주가 이름난 과실나무와 귀한 나무로 설명한 것은 ‘명’자의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다.
逆秋氣則太陰不收肺氣焦滿王汪曰焦謂上焦也太陰行氣主化上焦故肺氣不收上焦滿也樾謹按此注非也經言焦不言上安得臆決為上焦乎焦即焦灼之焦禮記問喪篇干肝焦肺是其義也
“가을의 기를 거스르면 태음이 거두지 못하여 폐기가 타고 그득해진다.” 왕씨의 주에 “초[焦]는 상초를 이른다. 태음은 기를 운행하여 상초의 변화를 주관하므로, 폐기가 거두어지지 않으면 상초가 그득해진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이 주석은 옳지 않다. 경문은 ‘초’라고만 하였지 ‘상’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어찌 억측으로 상초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초’는 곧 타들어 간다는 ‘초작’의 초이다. 《예기》 「문상」편의 “간이 마르고 폐가 탄다”는 것이 그 뜻이다.
逆冬氣則少陰不藏腎氣獨沉樾謹按獨當為濁字之誤也腎氣言濁猶上文肺氣言焦矣新校正云獨沉太素作沉濁其文雖到而字正作濁可據以訂正今本獨字之誤
“겨울의 기를 거스르면 소음이 저장하지 못하여 신기가 홀로 가라앉는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독[獨]’은 ‘탁[濁]’의 오자일 것이다. 신기를 ‘탁하다’고 하는 것은 위에서 폐기를 ‘탄다’고 하는 것과 같다. 《신교정》에는 ‘독침’이 《태소》에서는 ‘침탁’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글자의 순서는 뒤집혀 있지만 글자는 바로 ‘탁’으로 되어 있으니, 이에 근거하여 지금 판본의 ‘독’자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
道者聖人行之愚者佩之王注曰愚者性守於迷故佩服而樾謹按王注非也佩當為倍釋名釋衣服曰佩倍也旬子大略篤一佩易之楊倞注曰佩成為倍是佩與倍聲近義通倍猶背也昭二十六年左傳倍奸齊盟盂子滕文公篇師死而遂倍之倍並與背同聖人行之愚者倍之謂聖人行道而愚民倍道也下文云從陰陽則生逆之則死從之則治逆之則亂曰從曰逆正分承聖人愚者而言行之故從倍之故逆也王注泥本字為說未達假借之旨
“도는 성인은 행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찬다.” 왕씨의 주에 “어리석은 사람은 본성이 미혹에 머물러 있으므로 패복한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의 주는 옳지 않다. ‘패[佩]’는 ‘배[倍]’가 되어야 한다. 《석명》 「석의복」에 “패는 배이다”라고 하였고, 《순자》 「대략」의 ‘一佩’라는 구절에 양량은 “패는 아마 배일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는 패와 배가 소리가 가까워 뜻이 통함을 나타낸다. 배는 등을 돌린다는 배[背]와 같다. 《좌전》 소공 26년의 “맹약을 배반하여 어긴다”, 《맹자》 「등문공」의 “스승이 죽자 곧 그를 배반한다”에서 배[倍]는 모두 배[背]와 같다. ‘성인은 행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등진다’는 성인은 도를 행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도에 등을 돌린다는 뜻이다. 아래에서 “음양을 따르면 살고 거스르면 죽으며, 따르면 다스려지고 거스르면 어지러워진다”고 한 것은 따름과 거스름을 각각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에게 이어 말한 것이다. 행하므로 따르고 등지므로 거스른다. 왕씨의 주는 글자의 본래 뜻에 얽매여 풀이하여 가차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生氣通天論其氣九州九竅五臟十二節皆通乎天氣王注曰外布九州而內應九竅故云九州九竅也樾謹按九竅與九州初不相應如王氏說將耳目口鼻各應一州能晰言之乎今接九竅二字實為衍文九州即九竅也爾雅釋獸篇白州驠郭注曰州竅北山經倫山有獸加麋其川在尾上郭注曰川竅也川即州宇之誤是古謂竅為州此云九州不必更言九竅九竅二字疑即古注之誤入正文者味王注云云似舊有九州九竅也之說而王氏申說之如此此即可推其致誤之由矣六節藏象論與此同誤
「생기통천론」에 “그 기와 구주·구규·오장·십이절은 모두 하늘의 기와 통한다”고 하였다. 왕씨의 주에 “밖으로 구주에 퍼지고 안으로 구규에 응하므로 구주·구규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구규와 구주는 애초 서로 대응하지 않는다. 왕씨의 말대로라면 귀·눈·입·코가 각각 어느 주에 대응하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살펴보건대 ‘구규’ 두 글자는 실로 군더더기이다. 구주가 곧 구규이다. 《이아》 「석수」편에 “흰 주[州]가 있는 것을 연[驠]이라 한다”고 한 데 대해 곽씨는 “주는 구멍이다”라고 주석하였다. 《북산경》 윤산에는 고라니 같은 짐승이 있는데 “그 천[川]이 꼬리 위에 있다”고 하였고 곽씨는 “천은 구멍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천은 곧 주[州]의 오자이다. 옛날에는 구멍을 주라 하였으니, 여기서 구주라 하였으면 다시 구규라 할 필요가 없다. 구규 두 글자는 옛 주석이 잘못 본문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왕씨의 주를 음미하면 예전에 ‘구주란 구규이다’라는 풀이가 있었고 왕씨가 그것을 이렇게 부연한 듯하다. 여기에서 오류가 생긴 연유를 추측할 수 있다. 「육절장상론」에도 이와 같은 오류가 있다.
故聖人傳精神王注曰夫精神可傳惟聖人得道者乃能爾樾謹按王注非也傳讀為搏聚也摶聚其精神即上古天真論所謂精神不散也管子內業篇摶氣如神萬物備存尹知章注摶謂結聚也與此文語意相近作傳者古字通用陽氣者煩勞則張精絕樾謹按張字之上奪筋字筋張精絕兩文相對今奪筋字則義不明王注曰筋脈脹張精氣竭絕是其所據本未奪也
“그러므로 성인은 정신을 전한다.” 왕씨는 “정신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를 얻은 성인만이 그러할 수 있다”고 주석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의 주는 옳지 않다. ‘전[傳]’은 ‘단[摶]’으로 읽어야 하며 모은다는 뜻이다. 정신을 한데 모은다는 것은 「상고천진론」에서 말한 ‘정신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자》 「내업」편에 “기를 신묘하게 모으면 만물이 모두 갖추어 존재한다”고 하였고, 윤지장은 “단은 맺어 모은다는 뜻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 글의 말뜻과 가깝다. 전으로 쓴 것은 옛 글자의 통용이다. “양기는 번거롭게 수고하면 펴지고 정이 끊어진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장[張]’ 앞에 ‘근[筋]’자가 빠졌다. ‘힘줄이 팽팽해진다’와 ‘정이 끊어진다’가 서로 짝을 이루는데, 이제 근자가 빠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왕씨 주에 “근맥이 팽창하고 정기가 고갈되어 끊어진다”고 하였으니, 그가 근거로 삼은 판본에는 아직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高粱之變足生大丁王注曰所以丁生於足者四支為諸陽之本也樾謹按王注非也如其說則手亦可生何必足乎新校正云丁生之處不常於足蓋謂膏染之變饒生大丁非偏著足也是以足為饒足之足義亦迂曲足疑是字之誤上云乃生痤痱此云是生大丁語意一律是誤為足於是語詞而釋以實義遂滋曲說矣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이 변하면 발에 큰 종기가 생긴다.” 왕씨의 주에 “종기가 발에 생기는 까닭은 팔다리가 모든 양의 근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이 주는 옳지 않다. 그 설명대로라면 손에도 생길 수 있는데 어찌 꼭 발이겠는가. 《신교정》은 “종기가 생기는 곳은 늘 발인 것은 아니다.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의 변질로 큰 종기가 많이 생긴다는 뜻이지 발만을 지목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족[足]을 풍족하다는 족으로 읽은 것이지만 뜻이 역시 우회적이다. 족은 시[是]의 오자인 듯하다. 위에 ‘이에 여드름과 땀띠가 생긴다’고 하고 여기서는 ‘이에 큰 종기가 생긴다’고 한 것이니 말뜻이 한결같다. 시가 족으로 잘못되어 어조사를 실질적인 뜻으로 풀이하게 되었으므로, 억지 해설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故陽氣者一日而主外樾謹按上文云是故陽因而上衛外者也下文雲陽者衛外而為固也是陽氣固主外然云一日而主外則義不可通主外疑生死二字之誤下文云平旦人氣生日中而陽氣隆日西而陽氣已虛氣門乃閉雖言生不言死然既有生即有死陽氣生於平旦則是日西氣虛之後已為死氣也故云陽氣者一日而生死生與主死與外並形似而誤
“그러므로 양기는 하루 동안 밖을 주관한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윗글에 “그러므로 양은 이로써 위로 올라가 밖을 지킨다”고 하고 아랫글에 “양은 밖을 지켜 견고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양기가 본래 밖을 주관하기는 한다. 그러나 ‘하루 동안 밖을 주관한다’고 하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주외[主外]’는 ‘생사[生死]’ 두 글자가 잘못된 듯하다. 아래에 “새벽에는 사람의 기가 생기고, 한낮에는 양기가 왕성하며,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 양기가 이미 허해지고 기문이 닫힌다”고 하였다. 비록 생김만 말하고 죽음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생김이 있으면 곧 죽음이 있다. 양기가 새벽에 생긴다면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기가 허해진 뒤에는 이미 죽은 기가 된다. 그러므로 ‘양기는 하루 동안 생겼다가 죽는다’고 한 것이다. 생과 주, 사와 외는 모두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다.
味過於辛筋脈沮施精神乃央王注日央久也辛性潤澤散養於筋故令筋緩脈潤精神長久何者辛補肝也新校正云按此論味過所傷難作精神長久之解央乃殃也古文通用樾謹按於注因非校正謂是殃字義亦未安央者盡也楚辭離騷時亦猶其未央兮王逸注日央盡也九歌爛昭昭兮未央注曰央已也已與盡同義精神乃央言精神乃盡也
“매운맛이 지나치면 근맥이 풀어지고 정신이 이에 앙[央]한다.” 왕씨는 “앙은 오래감이다. 매운맛의 성질은 윤택하여 힘줄에 흩어져 영양을 주므로 근육을 느슨하게 하고 맥을 윤택하게 하며 정신을 오래가게 한다. 왜 그러한가? 매운맛은 간을 보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신교정》은 “이 논은 맛이 지나쳐 손상되는 것을 말하므로 정신이 오래간다는 해석을 하기 어렵다. 앙은 재앙의 앙[殃]이며 옛 글자에서 통용하였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의 주도 틀렸지만 교정에서 앙[殃]이라 한 것도 뜻이 편안하지 않다. 앙은 다한다는 뜻이다. 《초사》 「이소」의 “때가 아직 다하지 않았다”에 왕일은 “앙은 다함이다”라고 주석하였고, 「구가」의 “찬란하게 밝아 아직 다하지 않았다”에는 “앙은 그침이다”라고 주석하였다. 그침과 다함은 뜻이 같다. ‘정신내앙’은 정신이 마침내 다한다는 말이다.
陰陽應象大論天有八紀地有五里樾謹按里當為理詩樸棫篇鄭箋云理之為紀白虎通三綱六紀篇紀者理也是紀與理同義天言紀地言理其實一也禮記月今篇無絕地之理無亂人之紀亦以理與記對言下文云故治不法夭之紀不用地之理則災害至矣以後證前知此文本作地有五理也王注曰五行為生育之井坐以井裡說里字迂曲甚矣
「음양응상대론」에 “하늘에는 팔기가 있고 땅에는 오리가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리[里]는 리[理]여야 한다. 《시경》 「역목」편의 정씨 전에는 “리는 기이다”라고 하였고, 《백호통》 「삼강육기」편에는 “기는 리이다”라고 하였다. 기와 리는 뜻이 같다. 하늘을 두고 기라 하고 땅을 두고 리라 하였으나 실은 하나이다. 《예기》 「월령」편에도 “땅의 이치를 끊지 말고 사람의 기강을 어지럽히지 말라”고 하여 리와 기를 대응하여 말하였다. 아래에 “그러므로 다스림이 하늘의 기강을 본받지 않고 땅의 이치를 쓰지 않으면 재해가 닥친다”고 하였으니, 뒤의 글로 앞을 증명하면 이 글이 본래 ‘땅에는 오리[五理]가 있다’였음을 알 수 있다. 왕씨의 주에 “오행은 생육의 정리가 된다”고 하여 정리[井里]로 리[里]를 풀이한 것은 매우 억지스럽다.
陰陽離臺論則出地者命曰陰中之陽樾謹按則當為財旬子勸學篇口耳之間則四寸耳楊倞注曰則當為財與才同是其例也財出地者猶才出地者言始出地也與土文未出地者相對蓋既出地則純乎陽矣惟財出地者乃命之曰陰中之陽也
「음양이합론」에 “곧 땅에서 나온 것을 음중의 양이라 한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칙[則]은 재[財]여야 한다. 《순자》 「권학」의 “입과 귀 사이는 겨우 네 치일 뿐이다”에 양량은 “칙은 마땅히 재이어야 하며, 재[才]와 같다”고 주석하였으니 그 예이다. ‘재출지자’는 ‘겨우 땅에서 나온 것’과 같으며, 처음 땅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윗글의 ‘아직 땅에서 나오지 않은 것’과 상대된다. 이미 땅에서 나왔다면 순전히 양이 되지만, 막 땅에서 나온 것만은 음중의 양이라고 이름한다.
厥陰根起於大敦陰之絕陽名曰陰之絕陰樾謹按即曰陰之絕陽又曰陰之絕陰義不可通據上文太陽陽叨並曰陰中之陽則太陰厥陰應並言陰中之陰疑此文本作厥陰根起大敦陰之絕陽名曰陰中之陰蓋以其兩陰相合有陰無陽故為陰之絕陽而名之曰陰中之陰也兩文相涉因而致誤
“궐음의 뿌리는 대돈에서 시작하며 음의 절양이니, 이를 음의 절음이라 이름한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음의 절양’이라고 한 뒤 다시 ‘음의 절음’이라고 하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윗글의 태양과 양명이 모두 ‘음중의 양’이라고 한 것에 따르면 태음과 궐음도 모두 ‘음중의 음’이라고 해야 한다. 이 글은 본래 ‘궐음의 뿌리는 대돈에서 시작하며 음의 절양이니, 이를 음중의 음이라 이름한다’였던 듯하다. 두 음이 합쳐 음만 있고 양은 없으므로 음의 절양이 되며, 이를 음중의 음이라 이름한 것이다. 두 구절이 서로 영향을 주어 오류가 생겼다.
陰陽別論則於陽者知病忌時別於陰者知死生之期樾謹按忌當作起字之誤也上文云別於陽者知病處也別於陰者知死生之期玉樞真藏論作別於陽者知病從來別於陰者知死生之期來字與期字為韻則處也二字似誤此云知病起時猶彼云知病從來也蓋別於陽則能知所原起別於陰則能知所終極故云爾忌與起隸體相似因而致級
「음양별론」에 “양을 분별하는 사람은 병의 꺼릴 때를 알고, 음을 분별하는 사람은 죽고 사는 기한을 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기[忌]는 기[起]의 오자일 것이다. 윗글에 “양을 분별하는 사람은 병이 있는 곳을 알고, 음을 분별하는 사람은 죽고 사는 기한을 안다”고 하였고, 「옥기진장론」에는 “양을 분별하는 사람은 병이 온 곳을 알고, 음을 분별하는 사람은 죽고 사는 기한을 안다”고 되어 있다. 래[來]가 기[期]와 운을 이루므로 ‘처야[處也]’ 두 글자는 잘못인 듯하다. 여기서 ‘병이 일어난 때를 안다’고 한 것은 저기서 ‘병이 온 곳을 안다’고 한 것과 같다. 양을 분별하면 그 비롯한 바를 알고, 음을 분별하면 끝나는 바를 알 수 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기[忌]와 기[起]는 예서의 자형이 비슷하여 오류가 생겼다.
日二陽之病發心脾有不得隱曲女子不月王注隱曲謂隱蔽委曲之事也夫腸胃發病心脾受之心受之則血不流脾受之則味不化血不流故女於不月味不化則男於少精是以隱蔽委曲之事不能為也樾謹按王氏此注有四失焉本文但言女子不月不言男子少精增益其文其失一也本文先言不得隱曲後言女子不月乃增出男子少精而以不得隱曲總承男女而言使經文到置其失二也女子不月即著其交又申以不得隱曲之言而男子少精必待注家補出使經文詳略失宜其失三也上古天真論曰丈夫八歲腎氣實發長齒更二八腎氣盛天癸至精氣溢寫是男子之精與女子月事並由腎氣少精與不月應是同病乃以女子不月屬之心而以男子少精屬之脾其失四也今按下文云三陰三陽俱搏心腹滿發盡不得隱曲五日死注云隱曲為便寫也然則不得隱曲謂不得便寫王注前後不照當以後注為長便寫謂之隱曲蓋古語如此襄十五年左傳師慧過宋朝私焉杜注曰私小便便寫謂之隱曲猶小便謂之私矣不得隱曲為一病女子不月為一病二者不得併為一談不得隱曲從下注訓為不得便寫正與脾病相應矣
“이양의 병이 심과 비에서 발하면 은곡을 하지 못하고 여자는 월경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왕씨는 “은곡은 은밀하고 완곡한 일을 말한다. 장위에 병이 생기면 심과 비가 이를 받는다. 심이 받으면 혈이 흐르지 않고 비가 받으면 음식이 소화되지 않는다. 혈이 흐르지 않으므로 여자는 월경을 하지 않고, 음식이 소화되지 않으면 남자는 정이 적어진다. 그러므로 은밀하고 완곡한 일을 하지 못한다”고 주석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의 이 주석에는 네 가지 잘못이 있다. 본문은 여자가 월경을 하지 않는다고만 하였지 남자의 정이 적다고 하지 않았는데 글을 보태었으니 첫째 잘못이다. 본문은 먼저 은곡을 하지 못한다고 하고 뒤에 여자의 월경이 없다고 하였는데, 남자의 정이 적다는 말을 더한 다음 ‘은곡을 하지 못한다’는 말로 남녀를 통틀어 받게 하여 경문의 순서를 뒤집었으니 둘째 잘못이다. 여자의 월경이 없다는 것은 이미 글로 밝히고 다시 은곡을 하지 못한다는 말로 덧붙이면서, 남자의 정이 적다는 것은 반드시 주석가가 보충해야 하게 하였으니 경문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적절하지 않은 셈이 된다. 이것이 셋째 잘못이다. 「상고천진론」에 “남자는 여덟 살에 신기가 충실해져 머리카락이 자라고 이가 갈리며, 열여섯 살에 신기가 성하고 천계가 이르러 정기가 넘쳐 배출된다”고 하였다. 남자의 정과 여자의 월경은 모두 신기에서 비롯하므로 정이 적고 월경이 없는 것은 같은 병이어야 한다. 그런데 여자의 무월경은 심에 속하게 하고 남자의 정 부족은 비에 속하게 하였으니 넷째 잘못이다. 이제 살피건대, 아래에 “삼음과 삼양이 모두 서로 치면 가슴과 배가 그득하고 발진(發盡, 뜻 미상)하며 은곡을 하지 못하여 닷새 만에 죽는다”고 하였고 주에 “은곡은 대소변을 배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은곡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소변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씨 주는 앞뒤가 서로 맞지 않으니 뒤의 주석을 더 나은 것으로 삼아야 한다. 배설을 은곡이라 한 것은 옛말이 그러했던 것이다. 《좌전》 양공 15년에 “사혜가 송나라 조정을 지나면서 사[私]하였다”고 하자 두씨는 “사는 소변이다”라고 주석하였다. 배설을 은곡이라 하는 것은 소변을 사라 하는 것과 같다. 은곡을 못 하는 것은 한 병이고 여자가 월경을 하지 않는 것은 또 한 병이니, 둘을 하나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은곡을 못 한다’를 아래 주석대로 ‘배설하지 못한다’고 풀이하면 바로 비의 병과 부합한다.
死陰之屬不過三而死生陽之屬不過四而死樾謹按下文云肝之心謂之生陽心之肺謂之死陰故王注於死陰之屬火乘金也於生陽之屬曰本木乘火也是死陰生陽名雖有生死之分而實則皆死徵也故一曰不過三日而死一曰不過四日而死新校正云別本作四日而生全元起注本作四日而已俱通詳上下文義作死者非此新校之謬說蓋今本作四日而已者已乃亡字之誤別本作生者淺人不察文義以為死陰言死生陽宜言牛故臆改之也新校以死字為非必以生字為是大失厥旨矣
“사음에 속하는 것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며, 생양에 속하는 것은 나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아래에 “간이 심으로 가는 것을 생양이라 하고 심이 폐로 가는 것을 사음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왕씨는 사음에 대해 “화가 금을 누르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생양에 대해서는 “본래 목이 화를 누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음과 생양은 이름에는 생사의 구분이 있으나 실제로는 모두 죽음의 징후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다른 하나는 ‘나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였다. 《신교정》은 “다른 판본에는 ‘나흘 만에 산다’로 되어 있고 전원기의 주본에는 ‘나흘 만에 그친다’로 되어 있는데 모두 통한다. 앞뒤 문장의 뜻을 자세히 살피면 ‘죽는다’로 한 것이 틀렸다”고 하였다. 이것은 《신교정》의 잘못된 주장이다. 지금 판본의 ‘나흘 만에 그친다’에서 이[已]는 망[亡]의 오자이다. 다른 판본의 ‘산다’는 피상적인 사람이 문맥을 살피지 않고 사음에는 죽음을 말하였으므로 생양에는 삶을 말해야 한다고 여겨 제멋대로 고친 것이다. 《신교정》이 사[死]를 틀렸다고 하면 반드시 생[生]을 옳다고 여긴 것이니, 본뜻을 크게 잃었다.
靈蘭秘典論消者瞿瞿孰知其要新校正云太素作肖者濯濯樾謹按太素是也濯與要為韻今作瞿失其韻矣氣交變大論亦有此文濯亦誤作瞿而消字正作肖足證古本與太素同也
「영란비전론」에 “소자는 구구하니 누가 그 요체를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신교정》은 《태소》에 ‘초자탁탁[肖者濯濯]’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태소》가 옳다. 탁[濯]은 요[要]와 운을 이루는데 지금 구[瞿]로 쓰면 운을 잃는다. 「기교변대론」에도 이 글이 있는데, 탁 역시 구로 잘못되었으나 소[消]는 바로 초[肖]로 되어 있다. 옛 판본이 《태소》와 같았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六節藏象論心者生之本神之變也新校正云全元起本並太素作神之處樾謹接處字是也下文云魄之處精之處又云魂之居營之居並以居處言故知變字誤矣
「육절장상론」에 “심은 생명의 근본이며 신의 변화이다”라고 하였다. 《신교정》은 전원기 판본과 《태소》에 ‘신이 머무는 곳’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처[處]가 옳다. 아래에 ‘백이 머무는 곳’, ‘정이 머무는 곳’이라 하고 또 ‘혼이 거처하는 곳’, ‘영이 거처하는 곳’이라 하여 모두 거처를 말하였으니, 변[變]이 오자임을 알 수 있다.
此為陽中之少陽通於春氣新校正云全元起本並甲乙經太素作陰中之少陽樾謹按此言肝藏也據金匱真言論曰陰中之陽肝也則此文自宜作陰中之少陽於義方合王氏據誤本作注而以少陽居陽位說之非是 五藏生成論凝於脈者為泣王注曰泣為血行不利拋謹按字書泣字並無此義泣疑冱宇之誤玉篇水部冱胡故切閉塞也冱字右旁之互誤而為立因改為立而成泣字矣上文云是故多食鹽則脈凝泣而變色泣亦冱字之誤王氐不注於前而注於後或其作許時此文冱字猶未誤故以血以不利說之正冱字之義也湯液醪醴論榮泣衛除八正神明論人血凝泣泣字並當作冱
“이는 양중의 소양이 되어 봄의 기와 통한다.” 《신교정》은 전원기 판본과 《갑을경》·《태소》에 ‘음중의 소양’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간장을 말한다. 「금궤진언론」의 “음중의 양은 간이다”라는 말에 따르면 이 글도 ‘음중의 소양’이라 해야 뜻이 맞는다. 왕씨가 잘못된 판본에 근거하여 주석하면서 소양이 양의 자리에 있다고 설명한 것은 옳지 않다. 「오장생성론」에 “맥에 엉긴 것을 읍[泣]이라 한다”고 하였고, 왕씨는 “읍은 혈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자서에서 읍자에는 이런 뜻이 전혀 없다. 읍은 호[冱]의 오자인 듯하다. 《옥편》 수부에서 ‘호, 호고절, 막힌다는 뜻’이라 하였다. 호자의 오른쪽 호[互]가 잘못 입[立]이 되고, 입으로 바뀌면서 읍자가 된 것이다. 위에 “그러므로 소금을 많이 먹으면 맥이 엉겨 읍하고 색이 변한다”고 한 읍도 호의 오자이다. 왕씨가 앞에서 주석하지 않고 뒤에서 주석한 것은, 주석할 당시 이 글의 호자가 아직 잘못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혈의 운행이 원활하지 않다’고 설명하였으니, 바로 호자의 뜻이다. 「탕액요례론」의 ‘영읍위제’와 「팔정신명론」의 ‘인혈응읍’의 읍도 모두 호로 써야 한다.
徇蒙招尤王注曰徇疾也蒙不明也言目暴疾而不明拋謂掉也搖掉不定尤甚也目疾不明首掉尤甚謂暴疾也樾謹按王氏說招尤之義甚為迂曲殆失其旨今亦未詳其說徇蒙之義則固不然新校止云蓋謂目瞼瞤動疾數而暗蒙也此仍無以易平王注之說今按徇者眴之假字蒙者朦之段字說文目部旬目搖也或作眴朦童蒙也一日不明也是眴朦併為目疾於義甚顯注家泥徇之本義而訓為疾斯多曲說矣 異法方宜論南方者天地所長養陽之所盛處也樾謹按陽之所盛處也當作盛陽之所處也傳寫錯之
“순몽초우[徇蒙招尤].” 왕씨는 “순은 빠름이고 몽은 밝지 못함이다. 눈이 갑자기 병들어 밝지 못하다는 말이다. 초는 흔드는 것이며 흔들려 안정되지 않는 것이다. 우는 심함이다. 눈이 병들어 밝지 못하고 머리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갑작스러운 병이라 한다”고 주석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가 초우의 뜻을 설명한 것은 매우 억지스러워 거의 본뜻을 잃었으나, 지금 나도 그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순몽의 뜻은 본래 그러하지 않다. 《신교정》은 “눈꺼풀이 자주 빠르게 떨리며 어둡고 흐릿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으나, 이것도 왕씨의 설명을 바꿀 만하지 못하다. 이제 살피건대, 순[徇]은 현[眴]의 가차이고 몽[蒙]은 몽[朦]의 가차이다. 《설문》 목부에는 “순[旬]은 눈이 흔들리는 것이며 혹 현[眴]으로 쓴다. 몽[朦]은 동몽이며, 일설에는 밝지 못함이다”라고 하였다. 현과 몽이 모두 눈병이라는 뜻은 매우 분명하다. 주석가들이 순의 본뜻에 얽매여 ‘빠름’으로 풀이하였으므로 억지 설명이 많아진 것이다. 「이법방의론」에 “남방은 천지가 길러 주는 곳이며 양이 왕성하게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양지소성처야’는 ‘성양지소처야’, 곧 ‘왕성한 양이 머무는 곳’이어야 한다. 베껴 전하면서 순서가 어긋났다.
其民嗜酸而食附樾謹按胕即腐字故王注曰言其所食不芳香新校正曰全元起云食魚也食魚不得謂之食胕全說非
“그 백성은 신맛을 좋아하고 부[附]를 먹는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부[胕]는 곧 썩을 부[腐]이므로 왕씨 주에 “먹는 것이 향기롭지 않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신교정》에는 “전원기는 물고기를 먹는 것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나, 물고기를 먹는 것을 식부라 할 수는 없으니 전씨의 설명은 옳지 않다.
移精變氣論故可移精祝由而已樾謹按說文示部□祝□也是字本作□玉篇曰袖□□切古文□是字又作袖此作由者即袖之省也王注曰無假毒藥祝說病由此固望文生訓新校正引全注云祝由南方神則以由為融之假字由融雙聲證以昭五年左傳蹶由韓子說林作蹶融則古字本通然祝融而已
「이정변기론」에 “그러므로 정을 옮기고 축유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설문》 시부의 “[결자], 축[祝] [결자]이다”에 따르면 그 글자는 본래 [결자]로 쓴다. 《옥편》에는 “수[袖], [반절 두 글자 결자], 고문은 [결자]”라고 하였으니 그 글자는 또 수로도 쓴다. 여기서 유[由]로 쓴 것은 곧 수에서 생략한 것이다. 왕씨의 주에 “독약을 빌릴 필요 없이 병의 까닭을 빌어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글자만 보고 뜻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신교정》이 인용한 전씨 주의 “축유는 남방의 신이다”라는 말은 유를 융[融]의 가차로 본 것이다. 유와 융은 쌍성이다. 《좌전》 소공 5년의 궐유[蹶由]가 《한자》 「설림」에는 궐융[蹶融]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증명하면 옛 글자가 본래 통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축융일 뿐이다.
湯液醪醴論岐伯曰當今之世必齊毒藥攻其中鑱石鑑艾治其外也樾謹按齊當讀為資資用也言必用毒藥及鑱石鑑艾以攻治其內外也攻工記或四通方之珍異以資之注曰故書資作齊是資齊古字通
「탕액요례론」에서 기백은 “오늘날에는 반드시 독약을 갖추어 그 안을 공격하고 참석과 침과 쑥으로 그 밖을 치료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제[齊]는 자[資]로 읽어야 한다. 자는 쓴다는 뜻이다. 반드시 독약 및 참석·침·쑥을 써서 그 안팎을 공격하고 치료한다는 말이다. 「고공기」의 “혹 사방의 진귀한 물건을 교통시켜 그것을 쓴다”는 구절의 주에 “옛 책에는 자가 제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니, 자와 제는 옛 글자에서 통용하였다.
精神不進志意不治故病不可愈新校正云全元起本雲精神進志意定故病可愈太素雲精神越志氣散故痛不可愈樾謹按此當以全本為長試連上文讀之帝曰何謂神不使岐伯曰鑑石道也精神進志氣定故病可愈蓋精神進志意定即鑑石之道所謂神也若如今本則鑑石之道尚未申說而即言病不可愈之故失之不倫矣又試連下文讀之精神進志意定故病可愈今精壤神去營衛不可復收何者嗜欲無窮而憂患不止精氣□壤營泣衛除故神去之而病不愈也病不愈句正與病可愈句反復相明若如今本則上已言不可愈又言不愈文義復矣且中間何必以今字作轉乎此可知王氏所據本之訣太素本失與王同
“정신이 나아가지 않고 지의가 다스려지지 않으므로 병이 나을 수 없다.” 《신교정》은 “전원기 판본은 ‘정신이 나아가고 지의가 안정되므로 병이 나을 수 있다’로 되어 있고, 《태소》는 ‘정신이 벗어나고 지기가 흩어지므로 병이 나을 수 없다’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여기서는 전씨 판본이 더 낫다. 시험 삼아 윗글과 이어 읽어 보면, 황제가 “신이 부리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기백이 “침석의 도입니다. 정신이 나아가고 지기가 안정되므로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정신이 나아가고 지의가 안정되는 것이 곧 침석의 도에서 말하는 신이다. 지금 판본처럼 하면 침석의 도를 아직 풀이하지도 않고 곧바로 병이 낫지 못하는 까닭을 말하므로 논리가 맞지 않는다. 또 시험 삼아 아랫글과 이어 읽어 보자. “정신이 나아가고 지의가 안정되므로 병이 나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정이 무너지고 신이 떠나 영위를 다시 거둘 수 없다. 어째서인가? 기욕은 끝이 없고 근심은 그치지 않아 정기가 [결자] 무너지고 영은 막히며 위는 제거되므로 신이 떠나 병이 낫지 않는 것이다.” ‘병이 낫지 않는다’는 구절은 바로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구절과 반대로 반복하여 서로 밝힌다. 지금 판본처럼 하면 위에서 이미 낫지 못한다고 하고 다시 낫지 않는다고 하므로 뜻이 중복된다. 또 중간에 굳이 ‘지금[今]’으로 전환할 필요가 무엇인가. 여기서 왕씨가 근거로 삼은 판본의 잘못을 알 수 있다. 《태소》 판본의 잘못도 왕씨 것과 같다.
去宛陳莝新校正云太素莝作莖樾謹按王注云去宛陳莝謂去積久之水物猶如草莖之不可久留於身中也全本作草莝然則王所據本亦是莖字故以草莖釋之而又引全本之作莝者以見異字也今作莝則與注不合矣高保衡等失於校正
“울체되고 오래된 잘게 썬 풀[莝]을 제거한다.” 《신교정》은 《태소》에 좌[莝]가 경[莖]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 주에 “거완진좌는 오래 쌓인 물을 없애는 것이다. 마치 풀줄기를 몸속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전씨 판본은 초좌[草莝]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왕씨가 근거로 삼은 판본 역시 경이었으므로 풀줄기로 풀이하고, 다시 전씨 판본의 좌를 인용하여 다른 글자임을 나타낸 것이다. 지금 좌로 되어 있으면 주석과 맞지 않는다. 고보형 등은 교정을 잘못하였다.
玉版論要著之玉版命曰合玉機樾謹按合字即命字之誤而衍者玉機真藏論曰著之玉版藏之藏府每旦讀之名曰玉機正無合字王氏不據以訂正而曲為之說失之
「옥판논요」에 “옥판에 적어 합옥기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합[合]은 곧 명[命]의 오자가 덧들어간 것이다. 「옥기진장론」에 “옥판에 적고 장부에 보관하여 날마다 아침에 읽으며, 이를 옥기라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합자가 없다. 왕씨가 이에 근거하여 바로잡지 않고 억지로 설명한 것은 잘못이다.
容色見上下左右各在其要新校止云全元起本容作客樾謹按王注曰容色者他氣也如肝木部內見赤黃白黑皆為他氣也然則王所據木亦是客字故以他氣釋上他氣謂非本部之氣所謂客也今作容誤高保衡等失於校正脈要精微論渾渾革如湧泉病進而色弊綿綿其去如弦絕死新校正云甲乙經及脈經作渾渾革革至如湧泉病進而色弊弊綽綽其去如弦絕者死樾謹按王本有奪誤當依甲乙經及脈經訂正惟病進而色義不可通色乃絕之壞字言待其病進而後絕也至如湧泉者一時未即死病進而後絕去如絕弦則即死矣兩者不同故分別言之
“용색이 위아래와 좌우에 나타나는 것은 각각 그 요처에 있다.” 《신교정》은 전원기 판본에 용[容]이 객[客]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 주에 “용색이란 다른 기이다. 가령 간목의 부위에 붉고 누렇고 희고 검은색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다른 기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왕씨가 근거로 삼은 판본 역시 객이었으므로 다른 기로 풀이한 것이다. 다른 기란 본래 그 부위의 기가 아니라는 말로, 이른바 객이다. 지금 용으로 된 것은 잘못이다. 고보형 등은 교정을 잘못하였다. 「맥요정미론」에 “혼혼혁하게 솟는 샘과 같으면 병이 진행하여 색이 쇠하고, 면면하게 물러가는 것이 끊어진 줄과 같으면 죽는다”고 하였다. 《신교정》은 《갑을경》과 《맥경》에 “혼혼혁혁하여 이르는 것이 솟는 샘과 같으면 병이 진행하여 색이 폐폐하고, 작작하게 물러가는 것이 끊어진 줄과 같으면 죽는다”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 판본에는 탈자와 오자가 있어 《갑을경》·《맥경》에 따라 고쳐야 한다. 다만 ‘병진이색’은 뜻이 통하지 않으니 색[色]은 절[絕]이 무너진 글자이다. 병이 진행한 뒤에 끊어진다는 뜻이다. 이르는 것이 솟는 샘과 같으면 당장 죽는 것은 아니고 병이 진행한 뒤 끊어지지만, 물러가는 것이 끊어진 줄과 같으면 곧 죽는다. 둘은 다르므로 구별하여 말하였다.
夫精明五色者氣之華也王注曰五氣之精華上見為五色變化於精明之間也樾謹按王注殊誤精明五色本是二事精明以以言五色以顏色言蓋人之目與顏色皆如以決人之生死下文曰赤欲如白里朱不欲如赭白欲如鵝羽不欲如鹽青欲如蒼璧之澤不欲如藍黃欲如羅里友黃不欲如黃土黑欲如重漆色不欲如地蒼五色精微象見矣其壽不久也此承五色言之以人之顏色決生死他又曰夫精明者所以視萬物別白黑審短長以長為短以內為黑如是則精衰矣此承精明言之以人之目決生死也王氏不解此節之義故注下文精明一節云誡其誤也不知此文是示人決生死之法非誡庸工之誤也失經旨甚矣
“정명과 오색은 기의 영화이다.” 왕씨 주에 “다섯 기의 정화가 위로 나타나 오색이 되며 정명 사이에서 변화한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 주는 매우 잘못되었다. 정명과 오색은 본래 두 가지 일이다. 정명은 눈을 두고 말한 것이며 오색은 얼굴빛을 두고 말한 것이다. 사람의 눈과 얼굴빛으로 모두 생사를 판정할 수 있다. 아래에 “붉은색은 흰 것에 주사를 싸 넣은 것 같아야 하고 붉은 흙 같아서는 안 된다. 흰색은 거위 깃털 같아야 하고 소금 같아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푸른 옥의 윤기 같아야 하고 쪽빛 같아서는 안 된다. 누런색은 얇은 비단에 싸인 웅황 같아야 하고 황토 같아서는 안 된다. 검은색은 겹쳐 칠한 옻빛 같아야 하고 땅의 검푸른 빛 같아서는 안 된다. 오색의 정미한 상이 드러나면 그 수명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오색을 이어서 말한 것으로 사람의 얼굴빛으로 생사를 판정하는 것이다. 또 “정명은 만물을 보고 흑백을 구별하며 길고 짧음을 살피는 것이다. 긴 것을 짧다고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면 정이 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명을 이어서 말한 것으로 사람의 눈으로 생사를 판정한다. 왕씨는 이 대목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래 정명 대목에 주석하면서 ‘그 잘못을 경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은 생사를 판정하는 법을 알려 주는 것이지 서투른 의사의 잘못을 경계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으니, 경문의 뜻을 매우 크게 잃었다.
反四時者有餘為精不足為消王注曰諸有餘皆為邪氣勝精也樾謹按邪氣勝精豈得但謂之精王注非也精之言甚也呂氏春秋勿躬篇自蔽之精者也至忠篇乃自伐之精者高誘注並訓精為甚有餘為精言諸有餘者皆為過甚耳王注未達古語
“사시에 어긋나는 것은 유여하면 정[精]이 되고 부족하면 소[消]가 된다.” 왕씨 주에 “모든 유여는 사기가 정을 이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사기가 정을 이긴 것을 어찌 단지 정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왕씨 주는 옳지 않다. 정은 심하다는 말이다. 《여씨춘추》 「물궁」편의 “스스로를 가림이 심하다”와 「지충」편의 “곧 스스로 자랑함이 심하다”에서 고유의 주는 모두 정을 심함으로 풀이하였다. ‘유여하면 정이 된다’는 모든 유여는 지나치게 심함을 뜻할 뿐이다. 왕씨 주는 옛말을 깨닫지 못하였다.
生之有慶四時為宜新校止云太互宜作數樾謹按作數者是也度與數為韻溢飲者渴暴多飲而易入肌皮腸胃之外也新校正云甲乙經易作溢樾謹按王本亦當作溢其注云以水飲滿溢故滲溢易而入肌皮腸冒之外也此易字無義蓋正文誤溢為易欲後人於汪中妄增易字耳非王本之舊5推而上之上而不下腰足清也推而下之下而不上頭項痛也新校正云甲乙經上而不下作下而不上下而不上作上而不下樾謹按甲乙經是也上文云推而外之內而不外有心腹積也推而內之外而不內身有熱也是外之而不外內之而不內皆為有病然則此文亦當言上之而不上下之而不下方與上文一例若如今本推而上之上而不下推而下之下而不上則固其所耳又何病焉且陽升陰降推而上之而不上則陰氣大過故腰足為之清推而下之而不下則陽氣太過故頭項為之痛王氏據誤本作注曲為之說殆失之矣又按清當為清說文冫部清寒也故王注云腰足冷
“삶에 경사가 있게 하며 사시에 맞게 한다.” 《신교정》은 《태소》에서 의[宜]가 수[數]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수로 된 것이 옳다. 도[度]와 수가 운을 이룬다. “일음은 목이 말라 갑자기 물을 많이 마셔 쉽게 기피와 장위의 바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교정》은 《갑을경》에서 이[易]가 일[溢]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왕씨 판본 역시 일로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주에 “수음이 가득 넘치므로 스며 넘쳐 쉽게 기피와 장위의 바깥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이 ‘쉽게[易]’는 뜻이 없다. 본문에서 일이 이로 잘못된 뒤 후인이 주석에 함부로 이자를 넣은 것일 뿐, 왕씨의 옛 주석이 아니다. “밀어 위로 가게 하였는데 위로 가고 내려오지 않으면 허리와 발이 차며, 밀어 아래로 가게 하였는데 내려가고 올라오지 않으면 머리와 목덜미가 아프다.” 《신교정》은 《갑을경》에서 ‘위로 가고 내려오지 않는다’는 ‘아래로 가고 올라오지 않는다’로, ‘아래로 가고 올라오지 않는다’는 ‘위로 가고 내려오지 않는다’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갑을경》이 옳다. 윗글에 “밀어 밖으로 가게 하였는데 안으로 가고 밖으로 가지 않으면 가슴과 배에 적이 있는 것이고, 밀어 안으로 가게 하였는데 밖으로 가고 안으로 가지 않으면 몸에 열이 있다”고 하였다. 밖으로 가게 해도 밖으로 가지 않고 안으로 가게 해도 안으로 가지 않으면 모두 병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글도 위로 가게 해도 올라가지 않고 아래로 가게 해도 내려가지 않는다고 해야 앞글과 같은 예가 된다. 지금 판본처럼 위로 밀었더니 올라가고 내려오지 않으며 아래로 밀었더니 내려가고 올라오지 않는다면 본래 그래야 하는 것인데 무슨 병이겠는가. 또 양은 오르고 음은 내리니, 위로 밀어도 올라가지 않으면 음기가 지나치므로 허리와 발이 차지고, 아래로 밀어도 내려가지 않으면 양기가 지나치므로 머리와 목덜미가 아프다. 왕씨가 잘못된 판본에 근거하여 주석하고 억지로 설명한 것은 거의 본뜻을 잃은 것이다. 또 살피건대, 청[清]은 추위를 뜻하는 글자여야 한다. 《설문》 빙부에 ‘청, 차다’라고 하였으므로 왕씨 주에는 허리와 발이 차다고 하였다.
平人氣象論死心脈來前曲後居樾謹按居者直也言前曲而後直也釋名釋衣股曰裾倨也倨倨然直居與倨通王注曰居不動也失之
「평인기상론」에 “죽을 심맥이 오는 것은 앞에서는 굽고 뒤에서는 거[居]하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거는 곧다는 뜻이다. 앞에서는 굽고 뒤에서는 곧다는 말이다. 《석명》 「석의복」에 “거[裾]는 거[倨]이다. 꼿꼿하게 곧은 모양이다”라고 하였으니 거[居]는 거[倨]와 통한다. 왕씨 주에서 “거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玉機真象論冬脈如營王注曰脈沉而深如營動也樾謹按深沉與營動義不相應據下文其氣來沉以搏王注以沉而搏擊於手釋之營動之義或取於此然新校正云甲乙經搏字為濡濡古軟字乃冬脈之平調若沉而搏於手則冬脈之太過脈也當從甲乙經濡字然則經文搏字本是誤文不得據以為說今汪營之言迴繞也詩齊譜正義曰水所營繞故曰螢□漢書吳王濞傳劉向傳注並曰營謂迴繞之也字亦通作縈詩□木篇傳曰榮旋也旋亦迴繞之義冬脈深沉狀若迴繞故如營
「옥기진장론」에 “겨울맥은 영[營]과 같다”고 하였다. 왕씨는 “맥이 가라앉고 깊어 영동하는 것과 같다”고 주석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깊이 가라앉는 것과 영동한다는 뜻은 서로 맞지 않는다. 아래의 “그 기가 오는 것이 가라앉아 치는 듯하다”에 왕씨가 ‘가라앉아 손을 친다’고 풀이한 것에 따르면 영동의 뜻을 여기서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교정》에는 《갑을경》의 박[搏]이 유[濡]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유는 연[軟]의 옛 글자로 겨울맥의 정상적인 조화를 나타낸다. 가라앉아 손을 친다면 겨울맥의 태과이므로 《갑을경》의 유를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경문의 박자는 본래 오자여서 그에 근거하여 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제 살피건대, 영은 휘감아 돈다는 말이다. 《시경》 제보의 정의에 “물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형[螢]□이라 한다”고 하였고, 《한서》 「오왕비전」과 「유향전」의 주에서도 모두 “영은 둘러싼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자는 영[縈]과도 통한다. 《시경》의 「□목」편 전에는 “영[榮]은 선[旋]이다”라고 하였는데, 선도 돌아 둘러싼다는 뜻이다. 겨울맥은 깊이 가라앉아 그 모습이 휘감아 도는 것 같으므로 영과 같다고 하였다.
五藏受氣於其所生傳之於其所勝氣舍於其所生死於其所不勝樾謹按兩言其所生則無別矣疑下句衍其字所生者其子也所生者其母也藏氣法時論夫邪氣之客於身也以勝相加至其所生而愈至其所不勝而甚至於所生而持王註解其所生曰謂至已所生也解所生曰謂至生已之氣也一日其所生一曰所生分別言之此亦當同矣寶命全形論岐伯對曰夫鹽之味鹹者其氣令器津泄弦絕者其音嘶敗水敷者其葉發病深者其聲噦人有此三者是為壞府毒藥無治短鑑無取此皆絕皮傷肉血氣爭黑新校正云按太素云夫鹽之味鹹者其氣令器律泄弦絕者其音嘶敗木陳者其葉落病深者幾聲噦人有此三者是為壞府毒藥無治短鑑無取此皆絕成傷肉血氣爭黑三字與此經不同而注意大異楊上善云言欲知病微者須知其候鹽之在於器中津液泄於外見律液而知鹽之有咸也聲嘶知琴瑟之弦將絕葉落知陳水之已盡舉此三物衰壞之微以比聲硯識病深之候人有聲噦同三譬者是為府壞之候中府壞者病之深也其病既深故鑑藥不能取以其皮肉血氣各不相得故也再詳上善作此等注義方與黃帝上下問答義柑貫穿王人解鹽器津義總淵微至於注弦絕音嘶木敷葉發殊不與帝問相協攻之不若楊義之得多也樾□按楊上善注以上三句譬下一句義殊切當木敷葉發亦當從彼作木陳葉落本是喻其衰壞自以陳落為宜也惟人有此三者句尚未得解經云有此三者不云同此三者何得以同三譬說之疑此皆絕皮傷肉血氣爭黑十字當在人有此三者之上絕皮一也傷肉二也血氣爭黑三也所謂三者也病深而至於聲噦此皆絕皮傷肉血氣爭黑人有此三者是謂壞府毒藥無治短鑑無取文義甚明傳寫顛倒遂失其義又按太素與此經止陳落二字不同而新校正云三字者蓋其音嘶敗王本作其音嘶嗄故注云陰囊津泄而脈弦絕者診當言音嘶嗄敗易舊聲爾又曰肺主音聲故言音嘶嗄皆以嘶嗄連文是其所據經文必作嘶嗄不作嘶敗與太素不同故得有三字之異也
“오장은 그 소생에서 기를 받아 그 이기는 곳으로 전하고, 기는 그 소생에 머물며 그 이기지 못하는 곳에서 죽는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두 번 모두 ‘그 소생’이라고 하면 구분이 없다. 아랫구절의 기[其]는 군더더기인 듯하다. ‘그 소생’은 그 자식이고 ‘소생’은 그 어머니이다. 「장기법시론」에 “사기가 몸에 머무르면 이기는 관계로 서로 더하여, 그 소생에 이르면 낫고 그 이기지 못하는 곳에 이르면 심해지며 소생에 이르면 유지된다”고 하였다. 왕씨는 ‘그 소생’을 “자기가 낳은 곳에 이르는 것”이라 풀이하고, ‘소생’을 “자기를 낳은 기에 이르는 것”이라 풀이하였다. 하나는 ‘그 소생’, 하나는 ‘소생’이라 구별하여 말하였으니 여기서도 같아야 한다. 「보명전형론」에서 기백이 대답하였다. “소금의 맛이 짠 것은 그 기로 하여금 그릇에서 진액이 새게 합니다. 줄이 끊어지는 것은 그 소리가 쉬고 무너지는 것이며, 나무가 퍼지는 것은 그 잎이 피는 것이고, 병이 깊은 것은 그 소리가 딸꾹질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 세 가지가 있으면 장부가 무너진 것입니다. 독약으로 다스릴 수 없고 짧은 침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모두 피부가 끊어지고 살이 상하며 혈기가 다투어 검어지는 것입니다.” 《신교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소》에는 ‘소금의 맛이 짠 것은 그 기가 그릇에서 진액을 새게 하는 것이다. 줄이 끊어지는 것은 그 소리가 쉬고 무너지는 것이며, 나무가 오래되면 그 잎이 떨어지고, 병이 깊으면 그 소리가 딸꾹질한다. 사람에게 이 세 가지가 있으면 장부가 무너진 것이다. 독약으로 다스릴 수 없고 짧은 침으로 취할 수 없다. 이는 모두 피부가 끊어지고 살이 상하며 혈기가 다투어 검어지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세 글자가 이 경문과 다르며 주석의 뜻은 크게 다르다. 양상선은 ‘병의 미세함을 알려면 그 징후를 알아야 한다. 소금이 그릇 안에 있으면 진액이 밖으로 새니 진액을 보고 소금이 짠 줄 안다. 소리가 쉰 것을 보고 금슬의 줄이 끊어지려 함을 알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오래된 나무가 이미 다한 줄 안다. 이 세 물건이 미세하게 쇠하고 무너지는 것을 들어, 딸꾹질하는 소리로 병이 깊은 징후를 아는 데 비유한 것이다. 사람에게 딸꾹질 소리가 있어 이 세 비유와 같으면 장부가 무너지는 징후이다. 속의 장부가 무너졌다는 것은 병이 깊다는 뜻이다. 병이 이미 깊으므로 침과 약으로 취할 수 없으니, 피부·살·혈·기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거듭 살피면 상선의 이런 주석이어야 황제의 앞뒤 문답과 뜻이 서로 통한다. 왕빙은 소금 그릇의 진액이 새는 뜻을 매우 깊고 미묘하게 풀이하였지만, 줄이 끊어져 소리가 쉬는 것과 나무가 퍼져 잎이 피는 것에 대한 주석은 황제의 질문과 전혀 맞지 않으니, 살펴보면 양씨의 풀이가 훨씬 낫다.” 유월이 살피건대, 양상선의 주가 위 세 구절로 아래 한 구절을 비유한 것은 뜻이 매우 적절하다. ‘나무가 퍼지고 잎이 핀다’도 저 판본을 따라 ‘나무가 오래되고 잎이 떨어진다’로 해야 한다. 본래 쇠하고 무너짐을 비유한 것이므로 진[陳]·낙[落]이 알맞다. 다만 ‘사람에게 이 세 가지가 있다’는 구절은 아직 풀이되지 않았다. 경문은 ‘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지 ‘이 세 가지와 같다’고 하지 않았는데, 어찌 세 비유와 같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 피부가 끊어지고 살이 상하며 혈기가 다투어 검어진다’는 열 글자는 ‘사람에게 이 세 가지가 있다’의 위에 있어야 할 듯하다. 피부가 끊어지는 것이 첫째, 살이 상하는 것이 둘째, 혈기가 다투어 검어지는 것이 셋째이니 이른바 세 가지이다. “병이 깊어 소리가 딸꾹질하기에 이르면, 이는 모두 피부가 끊어지고 살이 상하며 혈기가 다투어 검어지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 세 가지가 있으면 장부가 무너진 것이니 독약으로 다스릴 수 없고 짧은 침으로 취할 수 없다”고 하면 뜻이 매우 분명하다. 베껴 전하며 순서가 뒤집혀 뜻을 잃은 것이다. 또 살피건대, 《태소》는 이 경문과 진·낙 두 글자만 다른데 《신교정》에서 세 글자라고 한 까닭은 ‘기음시패’가 왕씨 판본에는 ‘기음시아’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에 “음낭에서 진액이 새고 맥이 현절한 사람을 진찰할 때에는 소리가 쉬고 거칠어져 예전 소리와 달라졌다고 해야 한다”고 하였고, 또 “폐는 소리를 주관하므로 소리가 쉬고 거칠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시아[嘶嗄]를 이어 썼으니, 그가 근거로 삼은 경문은 반드시 시아였지 시패[嘶敗]가 아니었다. 《태소》와 다르므로 세 글자의 차이가 있게 된 것이다.
八正神明論故日月生而寫是為藏虛樾謹按上云月始生則血氣始精衛氣始行又云月生無寫並言月不言日且亦不當言生也日疑曰字之誤
「팔정신명론」에 “그러므로 일월이 생겨날 때 사하면 장이 허해진다”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위에서 “달이 처음 생겨나면 혈기가 비로소 정성해지고 위기가 처음 운행한다”고 하였으며, 또 “달이 생겨날 때 사하지 말라”고 하였다. 모두 달만 말하고 해는 말하지 않았으며, 해가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 또한 마땅하지 않다. 일[日]은 왈[曰]의 오자인 듯하다.
四時者所以分春秋夏冬之氣所在以時調之也八正之虛邪而避之勿犯也樾謹按調下衍之也二字本作四時者所以分春秋夏冬之氣所在以時調八正之虛邪而避之勿犯也今衍之也二字文義隔絕
“사시는 봄·가을·여름·겨울의 기가 있는 곳을 나누어 때에 맞게 이를 조절하는 것이다. 팔정의 허사를 피하여 범하지 말아야 한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조[調] 아래의 ‘지야[之也]’ 두 글자는 군더더기이다. 본래 “사시는 봄·가을·여름·겨울의 기가 있는 곳을 구분하여, 때에 맞게 팔정의 허사를 살펴 피하고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였다. 지금 지야 두 글자가 덧들어가 뜻이 끊어졌다.
慧然在前按之不得不知其情故曰形樾謹按慧然在前本作卒然在前據注云慧然在前按之不得言三部九候之中卒然逢之不可為之期准也離合真邪論曰在陰與陽不可為度從而察之三部九候卒然逢之早遏其路此其義也注中兩卒然字正釋經文卒然在前之義因經文誤作慧然遂改注經文亦作慧然在前非王氏之舊也尋經文所以致誤者蓋涉下文慧然獨悟口弗能言而誤土於下文往曰慧然謂清爽也則知此文之不作慧然矣不然何不注於前而注於後乎  離臺真邪論不可掛以發者待邪之至時而發鑑寫矣樾謹按不可掛以發者六字衍文寫字乃焉字之誤本作待邪之至時而發鑑焉矣蓋總承上文而結之上文一則曰其來不可逢此之謂也一則曰其往不可追此之謂也此則總結之曰待邪之至時而發鑑焉矣正對黃帝侯氣奈何之問今衍此六字蓋涉下文而誤下文云故曰知機道者不可掛以發不知機者如之不發今誤入此文義不可通又據上文總是言寫然發鑑寫矣殊苦不詞蓋寫與為形似而誤耳
“혜연히 앞에 있으나 눌러도 얻을 수 없고 그 실정을 알지 못하므로 형이라 한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혜연재전’은 본래 ‘졸연재전’, 곧 갑자기 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주석에 “혜연히 앞에 있으나 눌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삼부구후 가운데 갑자기 만나게 되어 일정한 기준을 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합진사론」에 “음과 양 사이에 있어 헤아릴 수 없으니, 따라가며 살펴 삼부구후에서 갑자기 만나면 일찍 그 길을 막는다”고 한 것이 이 뜻이다. 주석의 두 ‘졸연’은 바로 경문의 ‘졸연재전’을 풀이한 것이다. 경문이 혜연으로 잘못되자 주석 안에 인용한 경문까지 혜연재전으로 고쳤으니, 왕씨의 옛 글이 아니다. 경문에 이런 오류가 난 까닭을 찾아보면, 아래의 “혜연히 홀로 깨달으나 입으로 말할 수 없다”는 글에 영향을 받아 잘못된 듯하다. 왕씨가 아랫글에 “혜연은 맑고 상쾌함이다”라고 주석한 것을 보면 이 글은 혜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앞에서는 주석하지 않고 뒤에서 주석하였겠는가. 「이합진사론」에 “터럭만큼의 틈도 둘 수 없다는 것은 사기가 이르는 때를 기다려 침을 놓아 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월이 삼가 살피건대, ‘불가괘이발자’ 여섯 글자는 군더더기이며 사[寫]는 언[焉]의 오자이다. 본래 “사기가 이르는 때를 기다려 그때 침을 놓는 것이다”였다. 윗글을 통틀어 받아 맺은 말이다. 위에서는 하나는 “그 오는 것을 맞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또 하나는 “그 가는 것을 뒤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를 모두 맺어 “사기가 이르는 때를 기다려 그때 침을 놓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로 황제의 “기를 살피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지금 이 여섯 글자가 더 들어간 것은 아랫글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듯하다. 아래에 “그러므로 기틀의 도를 아는 사람은 터럭만큼의 틈도 두지 않고, 기틀을 모르는 사람은 두드려도 발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 잘못 이곳에 들어가 뜻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또 윗글이 모두 사법을 말하는 것에 근거하더라도 ‘발침사의’는 매우 어색한 문장이다. 사[寫]와 위[為]는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