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甫脫稿 , 客有見者 , 嫌猶未鬯厥旨 。 然愚為明於醫理者言也 , 必不護已 , 試更疏之 。 乾薑倍用之義 , 注家多忽之 。 不知利止脈不出用人參者 , 加減法也 。 倍用乾薑而即名之曰通脈 , 乾薑實通脈之所繫 , 其故安在 , 壅遏營氣 , 令無所避 , 是謂脈 , 營出中焦 , 中焦既大為寒累 , 而利不止 , 營氣下泄 , 脈何從出 , 溫中不較溫下為急乎 ? 乾薑無他 , 所以逐累脈之寒而脈自通也 。 蔥白所以通陽 , 自成無已後 , 多主是說 , 理非不是 , 而語實籠侗 , 或云入營通脈 , 或云入陽明止利 , 執是以譽蔥白 , 而與姜附何異 ? 或云通上焦之陽 , 下交於腎 , 或云入陰迎陽而復其脈 , 此較親切矣 。 但謂通上焦之陽 , 而上越之陽 , 胡可再通 , 謂其復脈 , 而加蔥之故 , 則因面赤 , 終不免於齟齬 。 或云通下焦之陰氣以達於上焦 , 此語固好 , 而又以自利而渴之文扭合一處 , 遂成謬解 。 或云蔥白但能通陽 , 必加膽汁 , 乃能入陰 , 則並通陽之故而昧之 。 凡此難以悉數 。 夫蔥者 , 葉青而辛溫 , 莖白而辛涼 , 葉空中而銳末 , 莖含汁而緊裹 , 惟含汁緊裹 , 性涼味辛 , 陰中有陽 , 陽中有陰 , 恰似少陰中寓有真陽 , 莖之上即空中而銳末 。 故其功能在上升而散 , 非下納而斂 。 面赤是陰格陽 , 非陽格陰 , 陰既格之 , 必當使陰仍向之 。 蔥白入陰升陰 , 俾不格而知向 , 陰向陽而陽自下返 , 面即不赤 , 然則白通湯證 , 無面赤 , 何為亦升其陰 。 夫陽在上宜降 , 陰在下宜升 , 今少陰下利一往不返 , 失地道上行之德 , 非用蔥白入陰而升之 。 徒有驅寒之姜附何益 ? 升之則與陽通 , 故以蔥白冠首 , 而名之曰白通 , 通非通脈之謂也 。 膽汁用佐姜附 , 是為從治 , 王太僕云 : 甚大寒熱 , 必能與違性者爭雄 , 異氣者相格 , 此訓反佐之義至精 。 但太僕兼寒熱而言 , 考之古方 , 寒熱並用 , 以治證兼寒熱者有之 。 若治大熱之證 , 而用大熱藥為反佐者實未之見 。 愚蓋仍即太僕之言思之 , 而得其故焉 。 曰爭曰格 , 必敢於爭敢於格 。 非有火何能若是 , 而甚大之熱 , 其陰中之火 , 已與熱為一家 , 陰惟失其所恃 , 大為熱侮 , 那得有火敢與爭格 。 治宜救陰 , 緩則生變 , 無反以熱藥竭陰之理 , 然則寒證而加膽汁 , 固所以清爭格之火 。 愚前論為不虛矣 , 抑又思之 。《 別錄 》 膽汁主傷寒熱渴 , 而仲景用於少陰寒證 , 非明於陰陽消息之微者 , 不能有此卓識 。 然證不至告危 , 未肯輕加 , 以人尿灌之 , 亦寧無膽汁 。 蓋以苦寒傷正 , 慎之至也 。 喻氏於開手用之 , 已失仲景心法 。 而張隱菴陳修園輩 , 轉謂膽汁能起腎臟之精汁 , 上資心主之血 , 視以為通脈之要藥 。 果爾 , 仲景何故用於最後 , 而必以乾薑人參先之 。 醫不研求實理 , 務為穿鑿 , 將任舉一物 , 悉可牽合 , 誤人有甚於此者乎 ? 附子 、 甘草 、 人參三味 , 前論已無餘蘊 , 不續贅云 。 拙擬
논설을 막 탈고하였을 때 본 손님이 있었는데 아직 그 뜻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의리에 밝은 이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며 결코 감싸지 않을 것이니(必不護已), 시험 삼아 다시 풀이한다.
건강을 배로 쓰는 뜻은 주석가들이 대개 소홀히 하였다. 하리가 멎고 맥이 나오지 않을 때 인삼을 쓰는 것이 가감법임을 알지 못한다. 건강을 배로 쓰고 곧 이름을 통맥이라 하였으니 건강은 실로 통맥이 달린 곳인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영기를 에워막아 피할 곳이 없게 하는 것을 맥이라 한다. 영은 중초에서 나오는데 중초가 이미 한에 크게 얽매이고 하리가 멎지 않아 영기가 아래로 새면 맥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중초를 덥히는 것이 하초를 덥히는 것보다 급하지 않은가? 건강은 다름이 아니라 맥을 얽매는 한을 몰아내어 맥을 저절로 통하게 하는 것이다.
총백이 양을 통하게 한다는 것은 성무이(成無已) 이후 대개 주장한 말이다. 이치는 틀리지 않지만 말이 실로 모호하다. 혹 영에 들어가 맥을 통하게 한다고 하고, 혹 양명에 들어가 하리를 멎게 한다고 한다. 이것으로 총백을 칭찬한다면 건강·부자와 무엇이 다른가? 혹 상초의 양을 통하게 하여 아래로 신과 교통시킨다고 하며, 혹 음에 들어가 양을 맞아 맥을 회복시킨다고 하니 이는 비교적 절실하다. 그러나 상초의 양을 통하게 한다고만 하면 이미 위로 넘친 양을 어찌 다시 통하게 하겠는가? 맥을 회복시킨다고 하지만 파를 더한 까닭은 얼굴이 붉기 때문이니 끝내 어긋남을 면하지 못한다. 혹 하초의 음기를 통하게 하여 상초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좋지만, 또 자리하면서 갈증난다는 문장을 억지로 한데 합쳐 마침내 잘못된 풀이가 되었다. 혹 총백은 양만 통하게 할 수 있고 반드시 담즙을 더해야 음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이는 양을 통하게 하는 까닭마저 모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모두 헤아리기 어렵다.
파는 잎이 푸르고 맵고 따뜻하며, 줄기는 희고 맵고 서늘하다. 잎은 속이 비고 끝이 뾰족하며, 줄기는 즙을 머금고 단단히 싸여 있다. 즙을 머금고 단단히 싸여 있으며 성질이 서늘하고 맛이 매워 음중에 양이 있고 양중에 음이 있으니, 마치 소음 안에 진양이 깃든 것과 같다. 줄기 위는 곧 속이 비고 끝이 뾰족하므로 그 공능은 위로 올라 흩어지는 데 있지 아래로 받아들여 거두는 데 있지 않다. 얼굴이 붉은 것은 음이 양을 막은 것이지 양이 음을 막은 것이 아니다. 음이 이미 막았다면 반드시 음으로 하여금 다시 양을 향하게 해야 한다. 총백은 음에 들어가 음을 올려 막지 않고 향할 줄 알게 하므로, 음이 양을 향하면 양은 저절로 아래로 돌아와 얼굴이 붉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백통탕증에는 얼굴이 붉지 않은데 어째서 역시 음을 올리는가? 양은 위에 있으면 내려야 하고 음은 아래에 있으면 올라야 한다. 지금 소음하리로 한 번 가고 돌아오지 않아 지도상행의 덕을 잃었으니, 총백으로 음에 들어가 올리지 않고 한을 몰아내는 건강·부자만 있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올리면 양과 통하므로 총백을 맨 앞에 두고 백통이라 이름하였다. 여기서 통은 통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담즙을 건강·부자의 보좌로 쓰는 것은 종치이다. 왕태복은 ‘매우 심한 한열은 반드시 성질이 거슬리는 것과 자웅을 다투고 기가 다른 것과 서로 막는다’라고 하였으니, 반좌의 뜻을 설명한 것이 지극히 정밀하다. 그러나 태복은 한열을 함께 말하였다. 고방을 살펴보면 한열을 함께 써서 증이 한열을 겸한 것을 치료하는 경우는 있지만, 큰 열증을 치료하면서 크게 뜨거운 약을 반좌로 쓴 것은 실로 보지 못하였다. 나는 여전히 태복의 말에서 생각하여 그 까닭을 얻었다. 다툰다거나 막는다고 하려면 반드시 감히 다투고 감히 막을 수 있어야 한다. 화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매우 큰 열에서는 음중의 화가 이미 열과 한집안이 되었고, 음은 의지할 것을 잃어 크게 열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니, 어찌 화가 있어 감히 더불어 다투고 막을 수 있겠는가? 치료는 음을 구해야 하고 늦추면 변증이 생기므로, 도리어 열약으로 음을 고갈시킬 이치는 없다. 그렇다면 한증에 담즙을 더하는 것은 본래 다투고 막는 화를 맑히는 것이니 나의 앞 논설은 헛되지 않다.
또 생각하건대 《별록》에서 담즙은 상한의 열갈을 주치한다고 하였는데 중경은 소음한증에 썼으니, 음양 소식의 미묘함에 밝지 않으면 이런 탁월한 식견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증이 위급한 데 이르지 않으면 가볍게 더하지 않았고, 사람의 소변을 부을 때에도 차라리 담즙은 없어도 되게 하였다. 고한이 정기를 상하는 것을 지극히 신중히 여긴 것이다. 유씨가 처음부터 쓴 것은 이미 중경의 심법을 잃었다. 그런데 장은암·진수원 같은 이들은 도리어 담즙이 신장의 정즙을 일으켜 위로 심주의 혈을 돕는다고 하여 통맥의 요약으로 보았다. 참으로 그렇다면 중경은 왜 맨 마지막에 쓰고 반드시 건강·인삼을 먼저 썼겠는가? 의사가 실제 이치를 연구하지 않고 천착에만 힘쓰면 아무 물건이나 들어도 모두 억지로 끌어 맞출 수 있으니,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경우가 있겠는가? 부자·감초·인삼 세 가지는 앞의 논설에서 남은 뜻이 없으므로 더 덧붙이지 않는다. 나의 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