甚矣 , 吾道之不孤也 。 滬上行醫人多於鯽 , 然求其精通三墳五典績學之士 , 惜焉罕覯 。 良以頻年兵火災祲 , 致入山之吏 、 失幕之儒為飢驅所迫 , 略知湯頭本草 , 陡然大膽懸壺 。 世有以耳代目之儔 , 樂為揄揚 , 十失三四 , 偶爾徼倖時髦 , 遂以成名 。 以此例彼 , 皆因成本尚輕 , 不惜以醫為市 , 遑論利害死生 。 性命攸關 , 出必高車駟馬 , 儼然醫界萬能 , 詢以 《 素問 》、《 靈樞 》、《 難經 》、《 金匱 》、《 外臺 》、《 千金 》、《 神農本草 》、《 太素 》、《 脈經 》、《 巢氏病源 》、《 聖濟總錄 》、《 王氏準繩 》、《 醫宗金鑑 》, 以及前後四大名家諸先賢醫學薪 傳 , 乃瞠乎其目 , 曰現在新法 , 勿用舊方 , 趁我十年運 , 有病早來醫而已 。 從此醫倪莫別 , 男婦不分 , 無怪癸丑歲劉 、 汪兩教育部長有廢棄中醫之議 。 詠曾仕山東 , 歲庚子拳匪滋擾京師時 , 項城袁大帥開府齊魯統領武衛全軍駐此 , 緣其生母劉太夫人病亟 , 經徐大軍醫長華清等六十人輪流進院調治 , 醫藥無功 , 帥心焦急 , 乃邀胡方伯景桂潘廉訪延祖兩司上院商榷 , 於同僚中可有知醫者否 。 兩司以詠暨陝西張蘭洲封翁舉薦 , 經姜軍門桂題勸進服詠擬方 , 一藥頓瘳 , 神乎技矣 。 兄世廉 、 弟世輔互相為之駭愕(方案曾登上海醫報) 。 嗣即奉委步衛軍糧臺差使 。 回憶昔日武衛同輩 , 半多民國偉人 , 亦幸事也 。 有此原因 , 民國二年 , 滬上諸同志發起神州醫藥總會 , 公舉詠為文牘員 , 明知濫竽充數 , 然嘗聞顧亭林先生有言 : 國家興亡 , 匹夫有責 。 當仁不讓 , 聊盡義務 。 廢棄中醫之議起 , 適大總統府內秘書長阮鬥瞻舊友忠樞銜命南來 , 調和張馮對調事宜 。 襜帷暫駐南京四象橋湖楚軍械所 , 詠乃趨謁南京寓門簾橋廣陵春旅館守候四天晚上 , 始見面 , 將公訂申辦理由五端呈覽 。 閱竣 , 回言 : 甚好 , 此事廢不了 。 詠即切懇云 : 苟能轉圓 , 為蒼生一線生機 , 公乃萬家生佛也 。 告辭返滬 , 次年春奉大總統發下國務院第三十五號命令 , 會長余德塤等原呈批諭中有初非有廢棄中醫之意也句 , 得達目的不廢 , 詠以年老力衰 , 文牘非我所能為 , 就此卸肩告辭 。 此舉多阮君斡旋之力 。 而中醫所以不廢者 , 要各有其淵源 , 並非中醫竟若牛溲馬勃 , 用藥投機 , 亦可賞鑑乎 。 宗工寒家醫學溯自唐都察院 , 竹隱公避居苕濠 , 藉醫濟世 , 代有傳人 , 入志乘者不鮮 。 詠為先胞伯曉五公第七弟子侍診十年 , 其時就診者戶限幾穿 , 門牆甚盛 , 見多識廣 , 濟以經書 , 知認證當以陰陽寒熱表裡虛實八字辨別的確 , 方可稱為有道之士 。 更於一發千鈞之際 , 能下重劑 , 希冀轉危為安 , 斯即道德猶存 , 仁人之術 , 醫所以寄死生 , 半積陰功 , 半養身 , 談何容易 。 若以之謀利 , 因循誤事 , 則其心不可問矣 。 滬上醫家林立 , 不乏專長 , 先府君嘉六公及詠尤以婦女科鳴於市 , 社會信用幸尚不惡 , 古者扁鵲自稱帶下醫 ,《 金匱 》 書中載有古人列經脈為病三十六種 , 皆謂之帶下病 , 非今人所謂赤白帶下也 。 至其陰陽虛實之機 , 針藥安危之故 , 苟非醫者辨之有素 , 烏能施之而無誤耶?三十六病者 , 如十二癥 、 九痛 、 七害 、 五傷 、 三痼是歟 。 後賢群起 , 又有一百八病之論 , 總之婦女病有與男子不同者 , 蓋有衝任督帶陰陽蹺維 、 奇經八脈之辨別 , 病由斯致為多 。 先哲且云 : 崩中日久為淋帶 , 漏下多時骨髓枯 。 故有 「 寧治十男子 , 莫治一婦人 」 之誡 , 而烏鰂雀卵經籍載有專方 。 蓋以婦女病有種種隱情難以形容者 , 在言傳意會 , 固非人人可學也 。 若雜亂無章 , 莫衷一是 , 何從何去 , 端賴發明 。 是以先府君嘉六公心焉傷之 , 乃纂輯諸大名家要義 , 名曰 《 女科折衷纂要 》, 經胞兄先師曉五公鑑定 , 詠妄參末議 , 不揣譾陋 , 詳加引注 。 孟子曰 : 人之患在好為人師 。 所以先府君只收梁溪李澹平君燮一徒而已 , 斯稿本作子孫師範模型簡易楷則不敢問世 , 茲承越中裘君吉生暨社中諸同仁 , 有流傳遺稿之求 , 發刊淩氏醫學遺書之議 , 爰將先府君嘉六公德採入 《 上海縣誌 》 藝文遊宦類諸遺稿郵呈斧政 , 曷敢自秘 , 公諸同好 , 瑜瑕不計 , 要使後學率循有自 , 簡練揣摩 , 方知婦女科中有此一葦慈航 , 未始不可寶慶耳 。
참으로 우리 도가 외롭지 않구나. 상해에서 의술을 행하는 사람은 붕어보다 많지만, 삼분오전에 정통하고 학문을 쌓은 선비를 찾으려 하면 아쉽게도 드물다. 여러 해 전란과 재앙 때문에 산으로 들어간 관리와 막부를 잃은 선비들이 굶주림에 내몰려, 탕두와 본초를 조금 알고는 갑자기 대담하게 의원의 간판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귀로 들은 것을 눈으로 본 것 대신 삼는 무리가 있어 기꺼이 추켜세우니, 열에 서넛을 그르쳐도 우연히 요행으로 한때 유행하면 마침내 이름을 얻는다. 이것으로 저것을 헤아리건대, 모두 밑천이 적게 든다는 까닭으로 의술을 장사로 삼기를 서슴지 않으니, 어찌 이해와 생사를 논하겠는가. 사람의 목숨이 달렸는데 나갈 때에는 반드시 높은 수레와 네 필의 말을 갖추어 엄연히 의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듯하다. 『소문』·『영추』·『난경』·『금궤』·『외대』·『천금』·『신농본초』·『태소』·『맥경』·『소씨병원』·『성제총록』·『왕씨준승』·『의종금감』과 앞뒤 사대 명가를 비롯한 여러 선현의 의학 전승을 물으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금은 새 법을 쓰니 옛 처방은 쓸 것이 없고 내 십 년 운수를 타서 병이 있으면 일찍 와서 치료받으라고 할 뿐이다. 이로부터 의예(醫倪)를 구별하지 못하고 남녀를 나누지 못하니, 계축년에 유·왕 두 교육부장이 중의를 폐기하자는 의논을 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일찍이 산동에서 벼슬하였다. 경자년에 권비가 경사를 어지럽힐 때 항성의 원 대수가 제로에 개부하고 무위 전군을 거느려 이곳에 주둔하였다. 그 생모 유 태부인이 위독하여 서 대군의장 화청 등 육십 명이 번갈아 관저로 들어가 조치하였으나 의약이 공효가 없었다. 대수는 마음이 초조하여 호 방백 경계와 반 염방 연조 두 사를 상원으로 불러 동료 가운데 의술을 아는 이가 있는지 의논하였다. 두 사가 나와 섬서의 장난주 봉옹을 천거하였다. 강 군문 계제가 권하여 내가 낸 처방을 먹게 하였는데 한 번 약을 먹고 곧 나으니 신묘한 의술이었다. 형 세렴과 아우 세보가 서로 놀라워하였다. 처방과 의안은 일찍이 『상해의보』에 실렸다. 이어 보위군 양대의 임무를 맡으라는 명을 받았다. 지난날 무위의 동료를 돌이켜 보니 절반 이상이 민국의 위인이 되었으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었다.
이런 연유로 민국 2년에 상해의 여러 동지가 신주의약총회를 발기하고 나를 문독원으로 함께 뽑았다. 재주 없이 자리를 채우는 것임을 잘 알았으나, 일찍이 고정림 선생이 나라의 흥망에는 필부도 책임이 있다고 한 말을 들었다. 인을 행함에 사양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의무를 다하려 하였다. 중의 폐기론이 일어났을 때 마침 대총통부 내비서장으로 있던 옛 벗 완두첨 충추가 명을 받고 남쪽으로 와서 장·풍의 맞바꾸는 인사 일을 조정하였다. 그 수레가 잠시 남경 사항교 호초군계소에 머물렀으므로, 나는 알현하러 남경으로 가서 문렴교 광릉춘여관에 묵으며 나흘 밤을 기다린 뒤에야 만났다. 공동으로 정한 신청 이유 다섯 조항을 올려 보였다. 다 읽은 뒤 매우 좋으며 이 일은 폐기하지 못한다고 답하였다. 나는 곧 간절히 청하여, 일이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해 주어 백성에게 한 가닥 살길을 열어 주신다면 공은 만가의 살아 있는 부처라고 하였다. 작별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이듬해 봄 대총통이 국무원에 내린 제35호 명령을 받았는데, 회장 여덕훈 등의 원래 상신에 대한 비유 가운데 애초 중의를 폐기할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구절이 있었다. 폐기하지 않는 목적을 이루었으므로, 나는 늙고 힘이 쇠하여 문서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책임을 내려놓고 사임하였다. 이 일은 완군이 주선한 힘이 컸다. 중의가 폐기되지 않은 까닭은 저마다 연원이 있기 때문이지, 중의가 마침내 우수마발처럼 약을 쓰면서 요행을 바라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니, 이 또한 살펴볼 만하지 않은가.
우리 집안의 의학 종장은 당나라 도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죽은공이 조호로 피하여 살면서 의술로 세상을 구제한 뒤 대대로 전하는 사람이 있었고 지방지에 오른 이도 적지 않다. 나는 돌아가신 백부 효오공의 일곱째 제자로 십 년 동안 진료를 모셨다. 그때 진료받으러 오는 이들이 거의 문지방을 닳게 할 정도로 문하가 매우 성하였다. 보고 들은 것이 넓고 경서로 보탰으므로, 증을 알아보려면 음양·한열·표리·허실 여덟 글자로 정확히 분별해야 비로소 도가 있는 선비라 할 수 있음을 알았다. 더구나 머리카락 하나에 천 균이 매달린 때 중한 약제를 써서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돌리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도덕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요 어진 사람의 술법이다. 의술은 생사를 맡기는 것으로, 반은 음공을 쌓고 반은 몸을 기르는 것이니 어찌 쉬이 말하겠는가. 이를 이익을 꾀하는 데 써서 미루다 일을 그르친다면 그 마음은 물어볼 것도 없다.
상해에는 의가가 숲처럼 많고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이도 적지 않다. 돌아가신 아버님 가륙공과 나는 특히 부인과로 시중에 이름이 났으며 사회의 신용도 다행히 아직 나쁘지 않다. 옛날 편작은 스스로 대하의라 하였다. 『금궤』에는 옛사람이 경맥의 병을 서른여섯 가지로 나누고 모두 대하병이라 불렀다고 실려 있는데,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적백대하가 아니다. 그 음양허실의 기미와 침·약에 따른 안위의 까닭을 의사가 평소 분별해 놓지 않았다면 어찌 시행하면서 그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른여섯 병이란 십이징·구통·칠해·오상·삼고 같은 것인가. 뒤의 현자들이 잇달아 일어나 또 백팔 병이라는 논의도 하였다. 요컨대 부녀자의 병은 남자와 다른 것이 있으니, 충·임·독·대·음양교·음양유의 기경팔맥을 분별해야 하며 병이 이로부터 생기는 경우가 많다. 선철은 붕중이 오래되면 임대가 되고 누하가 오래되면 골수가 마른다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차라리 열 남자를 치료할지언정 한 부인을 치료하지 말라는 경계가 있으며, 오적과 참새알에 대해서도 경적에 전용 처방이 실려 있다. 부녀자의 병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갖가지 숨은 사정이 있어 말로 전하고 뜻으로 알아차리는 데 달렸으니, 본래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지럽고 질서가 없어 하나로 절충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이를 밝히는 데 달렸다.
이에 돌아가신 아버님 가륙공이 마음 아파하시어 여러 대명가의 요의를 모아 『여과절충찬요』라 이름하였다. 그 친형이자 나의 선사인 효오공의 감정을 거쳤고, 나도 외람되이 말석의 의논에 참여하여 천박하고 누추함을 헤아리지 않고 자세히 인용 주석을 달았다. 맹자는 사람의 걱정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아버님은 양계의 이담평군 섭 한 사람만 제자로 받으셨다. 이 원고는 본래 자손에게 사범과 모형이 될 간이한 규칙으로 삼은 것이라 감히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이제 월중의 구길생군과 사중의 여러 동인이 유고를 전하자고 청하고 『능씨의학유서』를 간행하자고 의논하였으므로, 돌아가신 아버님 가륙공 덕의 『상해현지』 예문·유환류에 채록된 여러 유고를 우편으로 올려 바로잡아 주기를 청하였다. 어찌 감히 혼자 감추겠는가.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 공개하여 장단을 따지지 않고, 뒤에 배우는 이들이 따를 근거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간추려 익히고 헤아려 보면 비로소 부인과에 이 같은 한 갈대의 자비로운 배가 있음을 알 것이니, 보배롭게 여기고 기뻐할 만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