脈學診斷之書 , 以李瀕湖 、 朱丹溪二家最為細膩 , 凡相似相異之處 , 皆能分別清楚 , 用筆描摹 , 比擬形狀 , 俾後學無誤認之處 , 可謂大有功於斯世 。 惜察舌一法 , 二公未有專書 , 世所傳者 , 惟傷寒舌鑑 、 溫疫舌鑑而已 , 欲求其如脈學之詳細者 , 未之有也 。 瑞因用心三十餘年 , 將診斷試驗 , 醫治得效 , 歷歷不爽者 , 筆記於冊 , 以授徒輩 , 未敢自以為是也 。 庚戌 , 鎮郡同志袁君桂生等創辦 《 醫學扶輪報 》, 以昌明醫學 , 瑞以有志於此者十年 , 獨力未能舉行 , 一旦有袁君登高一呼 , 同志響應 , 成斯盛舉 , 瑞不覺鼓舞附驥 , 分任印費報料之責 。 至庚戌歲冬 , 諸君有退志者甚多 , 印費報料因而缺乏 , 將成中止之局 。 瑞與楊君燧熙 、 袁君桂生 、 葉君子實 , 竭力勉為之 。 因來稿不多 , 遂將瑞所授徒之 《 察舌新法 》 濫竽充數 , 刻印未終 , 至辛亥八月 , 而瑞等之 《 扶輪報 》, 亦與清鼎同時革命矣 。 今紹興醫會 、 上海醫會閱報諸君 , 時有來函 , 向袁 、 楊二君索閱全稿者 。 此皆閱 《 扶輪報 》 之舊友 , 不以葑菲見棄 。 殆以管見之比擬描摹 , 尚有可採處 。 爰從二君之議 , 抄錄全稿 , 加序送 《 紹學醫學報 》 社 , 遵周君小農流通書籍辦法 , 版權歸於貴社 , 印成賜瑞若干份 , 以就正親友同志 , 於願足矣 。 不揣固陋 , 非敢勇於公益 , 亦拋磚引玉之苦心耳 , 是為序 。 伏乞諸大名家誨政 , 以匡不逮 , 是幸 。
맥학과 진단을 다룬 책 가운데에는 이빈호와 주단계 두 사람의 책이 가장 세밀하다. 서로 비슷하거나 다른 부분을 모두 분명하게 구별하고, 글로 묘사하며 형상을 비유하여 후학이 잘못 알아볼 여지가 없게 하였으니, 세상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할 만하다. 아쉽게도 혀를 살피는 방법에 관하여 두 분은 전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세상에 전하는 것은 오직 『상한설감』과 『온역설감』뿐이며, 맥학처럼 상세한 것을 찾으려 해도 아직 없다. 이에 나 서(瑞)는 삼십여 년 동안 마음을 기울여, 진단하여 시험하고 치료하여 효과를 보아 하나하나 어긋남이 없었던 것을 책에 적어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나,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경술년에 진군의 동지 원계생 군 등이 의학을 밝히고 널리 펴기 위해 『의학부륜보』를 창간하였다. 나는 이 일에 뜻을 둔 지 십 년이었으나 혼자 힘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원군이 높은 곳에서 한 번 외치자 동지들이 호응하여 이 성대한 일을 이루었으므로, 나도 모르게 고무되어 그 뒤를 따라 인쇄비와 신문 원고를 분담하는 책임을 맡았다. 경술년 겨울에 이르자 물러나려는 뜻을 가진 이가 매우 많아져 인쇄비와 원고가 부족해졌고, 중단될 형편에 이르렀다. 나와 양수희 군·원계생 군·엽자실 군은 힘을 다하여 애써 계속하였다. 투고가 많지 않았으므로, 내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찰설신법』을 변변치 않게나마 끼워 넣어 수를 채웠다. 인쇄를 끝내지 못한 채 신해년 8월에 이르렀고, 우리들의 『부륜보』도 청나라 왕조(清鼎)와 때를 같이하여 혁명을 맞았다. 지금도 소흥의학회와 상해의학회에서 이 신문을 읽던 여러 분이 때때로 편지를 보내, 원군과 양군 두 사람에게 전체 원고를 읽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들은 모두 『부륜보』를 읽던 옛 벗들로, 나의 보잘것없는 글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좁은 견문으로 비유하고 묘사한 가운데 취할 만한 곳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의 의논을 따라 전체 원고를 베껴 쓰고 서문을 더하여 『소학의학보』사에 보내며, 주 소농 군의 서적 유통 방법에 따라 판권을 귀사에 돌린다. 인쇄가 끝나면 나에게 몇 부를 주어 친우와 동지들에게 바로잡음을 구할 수 있게 해 주면 소원에 족하다. 고루함을 헤아리지 않고 나섰지만 감히 공익에 용감한 체하려는 것은 아니며, 벽돌을 던져 옥을 얻고자 하는 고심일 뿐이다. 이를 서문으로 삼는다. 여러 대가께서 가르쳐 바로잡아 부족한 점을 구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니, 그리된다면 다행이겠다.
歲次柔兆執徐春分後三日劉恆瑞自序於京江之有預齋停雲傳舍 。
유조집서년 춘분 사흘 뒤, 유항서가 경강의 유예재 정운전사에서 직접 서문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