鑫曩者從事覺來先生有年 , 倏一日問於先生曰 : 醫書以幼科為啞科 , 謂其有疾 , 不能自言也 , 豈不難乎?先生曰 : 夫幼子者精神未受七情六慾之攻 , 臟腑未經八珍五味之漬 , 投之以藥 , 易為見功 , 猶膏粱之變難窮 , 而藜藿之腹易效也 , 有何難哉 。 但今之醫 , 見小兒燒熱 , 未審關紋浮沉 , 悉用表藥以汗之 ; 睹稚子號啼 , 不按胸腹強弱 , 盡行消藥以攻之 。 不知胎嬰元氣微薄 , 用藥一誤 , 變證百出矣 , 可不慎乎?繼而訓曰 : 凡看小兒先觀元氣厚薄 , 手探口息寒熱 , 次察唇舌潤燥 , 再看關紋色氣 , 問其飲食二便 , 方才酌方調治 , 庶不有誤 。 余體先生之訓 , 不敢自私 。 至於暇日 , 將歷來幼科善本 , 摘其切實認證之法 , 選其當要歷驗之方 , 每證之下 , 專變陰陽諸方之中 , 悉論虛實 , 故顏之曰 《 幼科切要 》。 意欲公諸同人 , 使窮鄉僻壤得見是篇 。 見小兒有恙 , 輕者不必求醫 , 病重者不為醫誤 。 能讀而習之 , 終身知醫 。 奈歷年來蝟務鞅掌 , 有志未逮 。 迄丁未余客渝城 , 幸遘傅君怡如 、 艾君頊堂 、 邱君東山並坐談心 , 與言及此 , 遂毅然有倡助之意 , 實先得我心之所同 , 然者遂將諸科亦同付之剞劂 。 不數月書成 , 惟冀四方樂善君子 , 廣為印布 , 於保赤子之意 , 不無小補 , 庶不負覺來先生訓誨之心 , 而諸公公世之忱 , 亦不致湮沒矣 , 是為序 。
나 흠은 예전에 각래 선생을 여러 해 섬겼다. 어느 날 선생께 ‘의서에서 유과를 아과라 하는 것은 병이 있어도 스스로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선생은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는 정신이 아직 칠정육욕의 공격을 받지 않았고 장부도 아직 팔진오미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약을 주면 쉽게 효과를 볼 수 있다. 기름진 음식을 먹는 사람의 변화는 끝까지 헤아리기 어렵고 거친 나물을 먹는 사람의 배는 쉽게 효과를 보는 것과 같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다만 오늘날 의사들은 소아에게 열이 나는 것을 보면 관문의 부침을 살피지 않고 모두 표약으로 땀을 내며, 어린아이가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보면 가슴과 배의 단단함과 약함을 눌러보지 않고 모두 소도약으로 공격한다. 태영의 원기가 미약하여 약을 한 번 잘못 쓰면 변증이 온갖 모습으로 생김을 알지 못하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어 ‘소아를 볼 때에는 먼저 원기의 두터움과 얇음을 살피고, 손으로 입에서 나오는 숨의 차고 뜨거움을 알아본 다음, 입술과 혀의 윤택함과 마름을 살피며, 다시 관문의 빛깔과 기운을 보고 음식과 대소변을 물은 뒤에야 처방을 헤아려 치료해야 거의 잘못이 없을 것이다’라고 가르치셨다. 나는 선생의 가르침을 체득하여 감히 혼자 간직하지 못하였다. 한가한 날마다 예로부터 내려온 유과의 좋은 책에서 실제에 절실한 증상 판별법을 뽑고, 요긴하며 거듭 검증된 처방을 골랐다. 각 증 아래에서는 음양의 변화를 전문으로 다루고 여러 처방에서는 허실을 모두 논하였으므로 《유과절요》라 이름하였다. 뜻은 동인들에게 공개하여 궁벽한 시골에서도 이 글을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소아가 병들면 가벼운 경우는 의사를 구할 필요가 없고, 심한 경우는 의사의 잘못을 당하지 않으며, 읽고 익히면 평생 의학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일이 고슴도치 털처럼 많아 바쁘게 지내느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미년에 유성에 머물 때 다행히 부이여 군·애욱당 군·구동산 군을 만나 함께 앉아 마음을 나누며 이 일을 이야기하자, 마침내 의연히 앞장서 돕겠다는 뜻을 보였다. 실로 먼저 내 마음에 함께 동의할 바를 얻었으므로, 마침내 여러 과도 함께 판각에 넘겼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책이 완성되었다. 오직 사방의 선을 즐기는 군자들이 널리 인쇄하여 퍼뜨려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뜻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각래 선생이 가르치신 마음을 저버리지 않고, 여러 공이 세상에 공개하려던 정성도 묻히지 않을 것이다. 이에 서문을 쓴다.
時道光二十七年丁未歲桂月朔日魚泉王錫鑫亞拙氏謹識
도광 27년 정미년 계월 초하루, 어천의 왕석흠 아졸씨가 삼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