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帝問五勞七傷於高陽負 , 負曰 「 一曰陰衰 , 二曰精清 , 三曰精少 , 四曰陰消 , 五曰囊下 濕, 六曰腰 ( 一作 胸 ) 脅苦痛 , 七曰膝厥痛冷 , 不欲行 , 骨蒸 , 遠視淚出 , 口乾 , 腹中鳴 , 時有熱 , 小便淋瀝 , 莖中痛或精自出 , 有病如此 , 所謂七傷 。 一曰志勞 , 二曰思勞 , 三曰心勞 , 四曰憂勞 , 五曰疲勞 , 此為五勞 」。 ( 見 《 千金 》 石韋丸下 ) 孫真人曰 「 五勞者 , 一曰志勞 , 二曰想勞 , 三曰憂勞 , 四曰心勞 , 五曰疲勞 。 七傷者 , 一曰肝傷善夢 , 二曰心傷善忘 , 三曰脾傷善飲 , 四曰肺傷善痿 , 五曰腎傷善唾 , 六曰骨傷善饑 , 七曰 脈 傷善嗽 。 凡遠思強慮傷人 , 憂恚悲哀傷人 , 喜樂過度傷人 , 忿怒不解傷人 , 汲汲所願傷人 , 慼慼所患傷人 , 寒暄失節傷人 , 故曰 『 五勞七傷 』 也 」。 ( 《 千金 》〈 腎臟門 〉 補腎論 ) 其述五勞略同 , 七傷則有異 。 即孫真人之論 , 亦有兩端 。 蓯蓉所主 , 究以何者為是 ? 夫此 , 固不必深求其合 , 第別其用力 、 用心 , 可矣 。 且蓯蓉 , 須補中者乃可用 , 設中氣自旺而不必補 , 則非所宜 。 如善飲 、 善饑等候 , 何嘗不蒸騰有力 , 運化有權 , 猶可以味甘性溫之物與之乎 ? 與之 , 是使渴者益渴 , 饑者益饑也 。 然則宜補中者 , 果安在 ? 夫蓯蓉之生精固優 , 故能撓夫氣 。 氣固旺 , 故不致汨於精 。 五勞七傷 , 名目雖多 , 約其歸 , 不越傷氣 、 傷精二種 。 傷氣者 , 如燭之燃 , 芯盡而膏亦竭也 ; 傷精者 , 如舟之行 , 水涸而棹難鼓也 。 是故 , 或精枯於下 , 而火浮於上 ; 或火熾於上 , 而引精自資 。 中央者 , 須火下畜 , 其氣乃生 , 生乃固 。 火 既 違順 , 容納自拙 , 得此 「 以氣致精 , 藉精行氣 」 之蓯蓉 , 使火回精聚 , 則在中之生氣 , 又何能不受益耶 ? 就使善飲 、 善饑 , 亦難保無精竭火離 , 仍須補中者 。 是故 , 謂補中於五勞七傷 , 僅得治法之一節 , 則可 ; 謂蓯蓉於補中 , 猶有所隔閡 , 則不可 。 謂蓯蓉之補中 , 僅得施於五勞七傷 , 則可 ; 謂凡補中者 , 皆得用蓯蓉 , 則不可 。 以 《 本經 》 固云 「 主五勞七傷補中 」, 不云 「 補中主五勞七傷 」 也 。
황제가 고양부(高陽負)에게 오로칠상을 물으니 고양부가 말하였다. “첫째는 음이 쇠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이 묽은 것이며, 셋째는 정이 적은 것이고, 넷째는 음이 소모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음낭 아래가 습한 것이고, 여섯째는 허리〔어떤 판본에는 가슴으로 되어 있다.〕와 옆구리가 심하게 아픈 것이며, 일곱째는 무릎에 궐증이 있어 아프고 차며 걷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골증, 먼 곳을 보면 눈물이 나는 것, 입마름, 배에서 소리가 나는 것, 때때로 열이 있는 것, 소변이 방울방울 나오는 것, 음경 속이 아프거나 정이 저절로 나오는 것 등 이러한 병이 있는 것을 이른바 칠상이라 한다. 첫째는 지로(志勞), 둘째는 사로(思勞), 셋째는 심로(心勞), 넷째는 우로(憂勞), 다섯째는 피로(疲勞)이니, 이것을 오로라 한다.” (《천금》 석위환 조목 아래에 보인다.) 손진인은 말하였다. “오로란 첫째 지로, 둘째 상로(想勞), 셋째 우로, 넷째 심로, 다섯째 피로이다. 칠상이란 첫째 간이 상하여 꿈을 잘 꾸는 것, 둘째 심이 상하여 잘 잊는 것, 셋째 비가 상하여 물을 잘 마시는 것, 넷째 폐가 상하여 잘 위축되는 것, 다섯째 신이 상하여 침을 잘 뱉는 것, 여섯째 뼈가 상하여 쉽게 배고픈 것, 일곱째 맥이 상하여 기침을 잘하는 것이다. 멀리 생각하고 억지로 궁리하면 사람을 상하고, 근심하고 성내며 슬퍼하면 사람을 상하며, 기쁨과 즐거움이 지나치면 사람을 상하고, 분노가 풀리지 않으면 사람을 상하며, 바라는 일에 급급하면 사람을 상하고, 걱정하는 일에 근심하면 사람을 상하며, 추위와 따뜻함에 절도를 잃으면 사람을 상하므로 ‘오로칠상’이라 한다.” (《천금》 〈신장문〉의 보신론.) 오로에 대한 서술은 대략 같지만 칠상에는 차이가 있다. 손진인의 논설에도 두 갈래가 있으니, 종용의 주치는 도대체 어느 것을 옳다고 해야 하는가? 이는 본디 그 일치를 깊이 구할 필요 없이, 힘을 썼는지 마음을 썼는지만 구별하면 된다. 또 종용은 중을 보해야 하는 경우라야 쓸 수 있으며, 중기가 저절로 왕성하여 보할 필요가 없으면 알맞지 않다. 물을 잘 마시거나 쉽게 배고픈 등의 증후는 어찌 증등하는 힘이 있고 운화하는 권능이 있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맛이 달고 성질이 따뜻한 물건을 줄 수 있겠는가? 이를 주면 목마른 사람을 더욱 목마르게 하고 배고픈 사람을 더욱 배고프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을 보해야 하는 경우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종용은 정을 만들어 내는 데 뛰어나므로 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으며, 기가 본디 왕성하므로 정에 잠겨 버리지는 않는다. 오로칠상은 명목이 많지만 귀결을 요약하면 기를 상한 것과 정을 상한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기를 상한 것은 촛불이 타면서 심지가 다하면 기름도 고갈되는 것과 같고, 정을 상한 것은 배가 가려는데 물이 마르면 노를 젓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정이 말라 위로 화가 뜨기도 하고, 위에서 화가 치성하여 정을 끌어다 자신을 돕기도 한다. 중앙은 화가 아래에 쌓여야 기가 생기며, 생겨나야 견고해진다. 화가 이미 순조로움을 어겼으므로 받아들이는 일이 저절로 서툴러진다. “기로써 정을 이르게 하고 정을 빌려 기를 운행시키는” 이 종용을 얻어 화가 돌아오고 정이 모이면, 중의 생기가 어찌 이익을 받지 않겠는가? 물을 잘 마시고 쉽게 배고프더라도 정이 고갈되고 화가 떠나 여전히 중을 보해야 하는 경우가 없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중을 보하는 것이 오로칠상의 치료법 가운데 한 부분만을 얻은 것이라 하면 옳지만, 종용이 중을 보하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고 하면 옳지 않다. 종용으로 중을 보하는 것은 오로칠상에만 시행할 수 있다고 하면 옳지만, 중을 보하는 모든 경우에 종용을 쓸 수 있다고 하면 옳지 않다. 《본경》에서는 본디 “오로칠상을 주치하여 중을 보한다”라고 하였지, “중을 보하여 오로칠상을 주치한다”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