維乾隆三十有七年 , 恭逢聖天子稽古右文 , 特詔徵購遺書 , 用儲乙覽 。 而余以向任館職 , 奉上游委以彙覈之任 , 凡江右諸書所得見者 , 幾千百種 , 其間純駁互出 , 固不盡為不朽之業 , 然巨編單帙 , 盈積箱案 , 固已顯晦無遺矣 , 得與寓目者 , 洵洋洋乎大觀也哉 。 宜黃黃太學宮繡 , 以其故父為鶚所著理解體要二卷 , 并所自著醫學求真錄數卷 , 並本草求真數卷 , 來上兼請敘 。 余惟義理之學 , 至宋儒而大明 , 發明宋儒之蘊 , 更元明諸儒而大備 ; 宜黃古臨川郡也 , 計是郡之談理者 , 宋有象山 、 元有草廬 、 明則康齋 , 皆以絕人之資 , 發其自得之學 。 黃君之書 , 其資既與數先哲相若 , 且能於章句訓詁之餘 , 不溺於口耳詞華之習 , 薈粹儒家者流以為此書 , 可不謂能自拔於流俗之外者歟 。 太學於敬讀父書餘暇 , 肆力軒岐 , 夫古人以良醫之功 , 比方良相 , 蓋古仁者 , 及人利物之心 , 類如是耳 , 否則博施惠眾 , 其事靡窮 , 而良相良醫 , 厥人有數 , 矢願固谹 , 恐反於仁之術隘矣 。 今太學之為此書也 , 於史為方技家言 , 而能歸重立品正情 , 則不獨藉以寄其良相之思 , 亦將自溥其近譬之念 , 固迥與世之鬻技者殊矣 。 爰不卻其請 , 以所上二書 , 郵申書局 , 以備採擇 , 而并敘其概如此云 。
건륭 37년에 마침 성천자께서 옛것을 상고하고 문치를 숭상하시어, 특별히 조서를 내려 남아 전하는 책들을 수집·구매하여 황제의 열람에 대비하게 하셨다. 나는 앞서 관각의 직책을 맡았던 인연으로 상급 관원에게서 책을 모아 검토하는 임무를 받았다. 강우(江右)의 여러 책 가운데 직접 본 것이 거의 수천수백 종이었다. 그중에는 순정한 것과 잡박한 것이 섞여 있어 모두 불후의 저술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큰 책과 작은 책이 상자와 책상에 가득 쌓여, 드러나 있던 것이든 묻혀 있던 것이든 빠짐없이 모였으니, 눈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참으로 성대한 장관이었다.
의황(宜黃)의 태학생 황궁수는 돌아가신 아버지 위악(為鶚)이 지은 『이해체요(理解體要)』 두 권과 자신이 지은 『의학구진록(醫學求真錄)』 몇 권 및 『본초구진(本草求真)』 몇 권을 가져와 올리고, 아울러 서문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의리의 학문은 송대 유학자들에 이르러 크게 밝혀졌고, 송대 유학자들이 품은 뜻을 밝혀내는 일은 원·명대의 여러 유학자를 거치며 더욱 갖추어졌다. 의황은 옛 임천군(臨川郡)에 속한 곳이다. 이 고장에서 이치를 논한 사람을 헤아리면 송대에는 상산(象山), 원대에는 초려(草廬), 명대에는 강재(康齋)가 있었는데, 모두 남보다 뛰어난 자질로 스스로 터득한 학문을 펼쳤다. 황군의 책을 보니, 그 역시 이 여러 선철과 비슷한 자질을 지녔고, 장구와 훈고를 익히는 가운데서도 입과 귀로만 주고받는 학문과 화려한 문구를 좇는 습속에 빠지지 않았다. 유가의 학설을 모아 정수를 취하여 이 책을 만들었으니, 스스로 세속의 풍조를 벗어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학생은 아버지의 책을 공경히 읽는 여가에 헌기(軒岐)의 학문에 힘을 기울였다. 옛사람들이 훌륭한 의사의 공을 훌륭한 재상의 공에 견준 것은, 옛 어진 사람들의 남을 돕고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대개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널리 베풀어 뭇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일은 끝이 없는데, 훌륭한 재상과 의사가 될 사람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세운 뜻이 본래 크더라도 도리어 인을 실천하는 길을 좁힐까 두렵다. 이제 태학생이 지은 이 책은 사서의 분류로는 방기가(方技家)의 말이지만, 품성을 세우고 정을 바르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훌륭한 재상을 지향하는 뜻을 이 책에 담았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서 가까이 비추어 남을 헤아리는 마음도 스스로 넓히려 한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기술을 파는 사람들과 참으로 크게 다르다. 이에 그 청을 물리치지 않고, 올린 두 책을 역편으로 서국에 보내 채택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그 대강을 아울러 이와 같이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