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友羅振湘先生曩著 《 醫學闕謬 》 一書 , 於余氏 《 醫述 》 謬妄之點 , 逐一揭出 , 息邪距詖 , 扶翼國學 , 厥功甚偉 , 余受而讀之 , 固已心異之矣 。 今夏又出其所著 《 治痢南針 》 見示 , 蓋集古今治痢方法 , 分為表 、 里 、 寒 、 熱 、 虛 、 實六門 , 條分而列舉之 。 其選方也 , 一依古人成法 , 間亦附以己意 , 補其闕略 , 皆系出自心裁 , 發前人所未發 , 余因是益服羅君之寢饋於斯者深也 。 竊維吾國醫書浩如煙海 , 見解雖非一致 , 而治驗要無不同 。 特淹博之士 , 故執己見 , 往往長篇累牘 , 理論以愈多而愈晦澀 , 學說以愈繁而愈龐雜 , 致令讀者如大海行舟 , 茫然莫知其方向之所指 。 以是為世詬病者 , 比比皆是 , 非獨治痢一書然也 。 誠得如羅君者 , 挈領提綱 , 芟蕪就簡 , 義例務衷一是 , 而論說毋任兩歧 , 如科學程式然 , 一以表解行之 , 則吾國醫絕學行將日即昌明 , 尚何慮拾西人唾餘者之狂吠也哉 ? 抑更有進者 , 讀書固須能會其通 , 而臨床尤宜善觀其變 , 蓋人之賦稟 , 既有膏粱 、 藜藿之不同 , 即其感受 , 自有勞逸飢飽之各異 。 曩余隨軍徐州 , 時值盛暑 , 適因潰敗 , 全師退遁 , 將士兵夫 , 皆日行百里 。 至集合時 , 則病劇痢者十之六七 , 紛紛求診於余 。 餘一一用大承氣加清暑理氣之品 , 無不立愈 。 又某封翁養尊處優 , 患痢疾 , 裡急後重 , 無物可下 , 痛脹難支 , 飛柬召余 , 至則前醫所主之承氣湯已陳榻前 。 余知其深居簡出 , 決無外邪 , 立命傾其前藥而以補中益氣湯重用耆至七八錢 , 參 、 術至一二兩不等 。 一劑而病若失 。 次早親函來謝 , 已如前矣 。 又某太夫人 , 年已六旬 , 陽虛下陷 , 依參 、 耆 、 附 、 桂為命 。 九月 , 因前冒暑患痢 , 醫者均以年老體弱 , 概用溫補 , 日益增劇 。 至次年正月 , 一日夜下鮮血至六七十次 。 余診其脈實大 , 知為失下 , 立用大劑承氣而益以滋陰養榮之品 。 甫半劑 , 即下燥屎甚多 ; 再劑 , 則膿血全無 。 後連用生地 、 石膏至四 、 五斤 , 始得復元 。 可見膏粱安逸之人不必盡屬元弱 , 而勞頓饑饉之餘又不皆如喻嘉言先生所云內虛久困者也 。 總之 , 法者 , 一成不變者也 。 是在用法者神而明之 。 羅君此書既以表裡 、 寒熱 、 虛實揭示方法 , 吾願讀此書者沉幾觀變 , 幸毋食古不化 , 轉令有慈航而不能普渡也 。 余為此序 , 因附及之 , 還以質之羅君 , 並以質之能讀羅君此書者 。
나의 벗 나진상 선생은 전에 《의학궐류》라는 책을 지어 여씨의 《의술》에 있는 그릇되고 망령된 점을 하나하나 밝혀내어 사설을 그치게 하고 편벽된 말을 물리치며 국학을 도왔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나는 그것을 받아 읽고 이미 마음속으로 남다르게 여겼다. 올여름에는 또 자신이 지은 《치리남침》을 내어 보여주었는데, 고금의 이질 치료법을 모아 표·리·한·열·허·실의 여섯 부문으로 나누고 조목별로 분류하여 열거한 것이다. 처방을 고를 때에는 한결같이 옛사람의 완성된 법을 따르면서도 간혹 자신의 뜻을 덧붙여 빠지고 소략한 부분을 보충하였는데, 모두 스스로 헤아려 앞사람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힌 것이었다. 나는 이로써 나군이 이 일에 깊이 몰두해 왔음을 더욱 탄복하였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의서는 연기 낀 바다처럼 방대하여 견해가 비록 일치하지 않더라도 치료의 효험은 대체로 다르지 않다. 다만 박식한 선비들이 자기 견해를 고집하여 흔히 장편의 글을 거듭 쓰니, 이론은 많아질수록 더욱 난해해지고 학설은 번다해질수록 더욱 잡다해져서 독자가 큰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면서 아득히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하는 듯하게 한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비난을 받는 것이 곳곳에 있으니, 이질을 다룬 책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참으로 나군 같은 이가 요점을 들어 강령을 세우고 번잡한 것을 덜어 간명하게 하며, 의례는 하나의 옳은 기준에 맞추기를 힘쓰고 논설은 두 갈래로 갈리게 두지 않으며, 과학의 정식처럼 모두 표로 풀이하여 시행한다면, 우리나라 의학의 끊어질 듯한 학문이 장차 날로 밝아질 것이니, 서양인의 침 찌꺼기를 주워 먹는 자들의 미친 듯한 짖음을 무엇 때문에 걱정하겠는가?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독서는 진실로 서로 통하는 뜻을 깨달아야 하고 임상에서는 더욱 변화에 잘 주목해야 한다. 사람의 타고난 바탕에는 기름진 음식을 먹는 사람과 거친 나물을 먹는 사람의 차이가 있으며, 사기를 받는 데에도 수고롭고 편안함과 굶주리고 배부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에 내가 서주에서 군대를 따라다닐 때 마침 한여름이었는데, 패전으로 전군이 물러나 달아나면서 장사와 병졸, 군부들이 모두 하루에 백 리를 걸었다. 집결할 때에는 심한 이질에 걸린 사람이 열에 예닐곱이나 되어 잇달아 내게 진찰을 청하였다. 나는 하나하나 대승기탕에 더위를 맑히고 기를 다스리는 약물을 더해 썼는데, 곧 낫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또 어느 봉옹은 존귀하고 편안하게 지내다가 이질을 앓아 이급후중이 있고 내보낼 것은 없는데 아프고 더부룩하여 견디기 어려워 급히 글을 보내 나를 불렀다. 가보니 앞서 진료한 의사가 처방한 승기탕이 이미 침상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가 집 안에 깊이 거처하여 좀처럼 나가지 않으니 결코 외사가 없음을 알고, 곧 앞의 약을 쏟아 버리게 하고 보중익기탕을 쓰되 황기는 7~8돈까지, 인삼과 백출은 1~2냥까지 각각 달리하여 많이 썼다. 한 제를 먹자 병이 없어진 듯하였다. 다음 날 아침 직접 편지를 보내 사례하였는데 이미 예전과 같아졌다고 하였다.
또 어느 태부인은 나이가 예순으로 양이 허하여 아래로 처져 인삼·황기·부자·육계에 의지하여 목숨을 유지하였다. 9월에 앞서 더위를 무릅쓴 일로 이질이 생겼는데, 의사들은 모두 늙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온보하는 약만 써서 날로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정월에 이르러 하루 밤낮에 선혈을 예순일흔 번이나 쏟았다. 내가 맥을 짚으니 실하고 커서 설사시켜야 할 때를 놓쳤음을 알고, 곧 많은 양의 승기탕에 음을 기르고 영을 보양하는 약물을 더하여 썼다. 겨우 반 제를 먹고 마른 대변을 매우 많이 내보냈으며, 다시 한 제를 먹자 고름과 피가 모두 없어졌다. 그 뒤 생지황과 석고를 연이어 4~5근까지 쓰고서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이로 보면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편안하게 지내는 사람이 반드시 모두 원기가 약한 것은 아니며, 고생하고 굶주린 뒤라고 해서 모두 유가언 선생이 말한 것처럼 속이 허하여 오래 곤궁한 것도 아니다.
요컨대 법이란 한 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 것이지만, 그 법을 쓰는 사람이 신묘하게 밝혀 쓰는 데 달려 있다. 나군의 이 책은 표리·한열·허실로 방법을 밝혀 보였으니,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이 기미를 깊이 살피고 변화를 관찰하여, 부디 옛것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소화하지 못함으로써 자비의 배를 가지고도 널리 건네주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내가 이 서문을 쓰면서 아울러 이에 언급하였으니, 나군에게 바로잡음을 구하고 또 나군의 이 책을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도 바로잡음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