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土材曰痢之為症多本脾腎腳司倉凜土為萬物之母腎主蟄藏水為萬物之原二臟皆根本之地投治少差冤沉幽冥究其疵誤皆寒熱未明虛實不辨也晚近不足論即在前賢頗有偏僻如局方與復庵例行辛熱河間與丹溪專用苦寒何其執而不圓相去天壞耶夫痢起於豆秋濕蒸熱鬱本乎天也因熱求涼過吞生冷由於人也氣壯而傷於天者鬱熱居多氣弱而傷於人者陰寒為甚濕土寄旺於四時或從火化則陽土有餘而濕熱為病經所謂墩阜是也或從於水則陰土不足而寒濕為病經所謂插監是也言熱者遣寒言寒者廢熱豈非立言之過乎至於赤為熱白為寒亦非確論果爾則赤白相兼者豈真寒熱同病乎必以見證與色脈辨之而後寒熱不淆也須知寒者多虛熱者多實更以虛實細詳之而寒熱愈明矣脹滿惡食急痛拒接者實也煩渴引飲喜冷畏熱者熱也脈強而實者實也脈敝而滑者熱也外此者靡非虛寒矣而相似之際尤常審察如以口渴為實熱似矣不知凡瀉痢必亡津液液亡於下則津涸於上安得不渴更當以喜熱喜冷分虛實他以腹痛為實熱似矣不知痢也晚近不足論即在前賢頗有偏僻如局方與復庵例行辛熱河間與丹溪專用苦寒何其執而不圓相去天壞耶夫痢起於豆秋濕蒸熱鬱本乎天也因熱求涼過吞生冷由於人也氣壯而傷於天者鬱熱居多氣弱而傷於人者陰寒為甚濕土寄旺於四時或從火化則陽土有餘而濕熱為病經所謂墩阜是也或從於水則陰土不足而寒濕為病經所謂插監是也言熱者遣寒言寒者廢熱豈非立言之過乎至於赤為熱白為寒亦非確論果爾則赤白相兼者豈真寒熱同病乎必以見證與色脈辨之而後寒熱不淆也須知寒者多虛熱者多實更以虛實細詳之而寒熱愈明矣脹滿惡食急痛拒接者實也煩渴引飲喜冷畏熱者熱也脈強而實者實也脈敝而滑者熱也外此者靡非虛寒矣而相似之際尤常審察如以口渴為實熱似矣不知凡瀉痢必亡津液液亡於下則津涸於上安得不渴更當以喜熱喜冷分虛實他以腹痛為實熱似矣不知痢出於臟腸胄必傷膿血剝膚安得不痛更當以痛之緩急按之可否臟之陰陽腹之脹奧不脹脈之有力無力分虛實也以小便之黃赤短少為實熱似矣不知水從痢去溲必不長液以陰亡溺因色變更當以便之熱與不熱液之涸與不涸色之澤與不澤分虛實也以裡急後重為實熱似矣不知氣陷則倉凜不藏陰亡則門戶不閉更當以病之新久質之強弱脈之盛衰分虛實也
이토재가 말하였다. “이질이라는 증은 대부분 비와 신에 근본을 둔다. 각은 창름을 맡고 토는 만물의 어머니이며, 신은 잠복하고 저장하는 일을 주관하고 수는 만물의 근원이다. 두 장은 모두 근본이 되는 곳이니 치료에 조금만 차이가 나도 원통하게 저승으로 가라앉는다. 그 잘못을 따져 보면 모두 한열이 분명하지 않고 허실을 분별하지 못한 데 있다. 근래는 논할 것도 없고 앞선 현인들에게도 편벽됨이 꽤 있다. 《국방》과 복암은 으레 맵고 더운 약을 쓰고, 하간과 단계는 쓰고 찬 약만 썼으니, 어찌 그리 고집하여 원만하지 못하고 천괴만큼 서로 차이가 나는가? 이질이 두추에 일어나 습이 찌고 열이 울체되는 것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더위 때문에 서늘함을 찾으며 생랭한 것을 지나치게 삼키는 것은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기가 왕성하면서 하늘에 손상된 사람은 울열이 많고, 기가 약하면서 사람의 행위로 손상된 사람은 음한이 심하다. 습토는 사시에 의탁하여 왕성해지니, 혹 화를 따라 변화하면 양토가 유여하여 습열이 병이 된다. 경에서 말한 돈부가 이것이다. 혹 수를 따르면 음토가 부족하여 한습이 병이 된다. 경에서 말한 삽감이 이것이다. 열을 말하는 이는 한을 버리고 한을 말하는 이는 열을 버리니, 어찌 입론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붉으면 열이고 희면 한이라는 말도 확실한 논의가 아니다. 과연 그렇다면 적백이 함께 있는 것은 참으로 한열이 함께 병든 것이겠는가? 반드시 나타난 증상과 색, 맥으로 분별한 뒤라야 한열이 뒤섞이지 않는다. 한에는 허가 많고 열에는 실이 많음을 알아야 하며, 다시 허실을 세밀하게 살피면 한열이 더욱 분명해진다. 팽만하고 음식을 싫어하며 급히 아파 손대기를 거부하는 것은 실이다. 번갈로 물을 찾고 찬 것을 좋아하며 더운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열이다. 맥이 강하고 실한 것은 실이고 맥이 폐하고 활한 것은 열이다. 이 밖에는 허한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서로 비슷한 경우를 더욱 자세히 살펴야 한다. 입이 마른 것을 실열로 여기는 것은 그럴듯하나, 설사와 이질에는 반드시 진액을 잃는다는 것을 모른다. 액을 아래에서 잃으면 진이 위에서 마르니 어찌 목마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더운 것을 좋아하는지 찬 것을 좋아하는지로 허실을 나누어야 한다. 또 복통을 실열로 여기는 것은 그럴듯하나, 이질을 알지 못한다.
근래는 논할 것도 없고 앞선 현인들에게도 편벽됨이 꽤 있다. 《국방》과 복암은 으레 맵고 더운 약을 쓰고, 하간과 단계는 쓰고 찬 약만 썼으니, 어찌 그리 고집하여 원만하지 못하고 천괴만큼 서로 차이가 나는가? 이질이 두추에 일어나 습이 찌고 열이 울체되는 것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더위 때문에 서늘함을 찾으며 생랭한 것을 지나치게 삼키는 것은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기가 왕성하면서 하늘에 손상된 사람은 울열이 많고, 기가 약하면서 사람의 행위로 손상된 사람은 음한이 심하다. 습토는 사시에 의탁하여 왕성해지니, 혹 화를 따라 변화하면 양토가 유여하여 습열이 병이 된다. 경에서 말한 돈부가 이것이다. 혹 수를 따르면 음토가 부족하여 한습이 병이 된다. 경에서 말한 삽감이 이것이다. 열을 말하는 이는 한을 버리고 한을 말하는 이는 열을 버리니, 어찌 입론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붉으면 열이고 희면 한이라는 말도 확실한 논의가 아니다. 과연 그렇다면 적백이 함께 있는 것은 참으로 한열이 함께 병든 것이겠는가? 반드시 나타난 증상과 색, 맥으로 분별한 뒤라야 한열이 뒤섞이지 않는다. 한에는 허가 많고 열에는 실이 많음을 알아야 하며, 다시 허실을 세밀하게 살피면 한열이 더욱 분명해진다. 팽만하고 음식을 싫어하며 급히 아파 손대기를 거부하는 것은 실이다. 번갈로 물을 찾고 찬 것을 좋아하며 더운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열이다. 맥이 강하고 실한 것은 실이고 맥이 폐하고 활한 것은 열이다. 이 밖에는 허한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서로 비슷한 경우를 더욱 자세히 살펴야 한다. 입이 마른 것을 실열로 여기는 것은 그럴듯하나, 설사와 이질에는 반드시 진액을 잃는다는 것을 모른다. 액을 아래에서 잃으면 진이 위에서 마르니 어찌 목마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더운 것을 좋아하는지 찬 것을 좋아하는지로 허실을 나누어야 한다. 또 복통을 실열로 여기는 것은 그럴듯하나, 이질이 장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른다. 장위가 반드시 손상되고 농혈이 피부를 깎아 내니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통증의 완급과 누를 수 있는지 없는지, 장의 음양과 배가 부른지 부르지 않은지, 맥에 힘이 있는지 없는지로 허실을 나누어야 한다. 소변이 누렇거나 붉고 짧으며 적은 것을 실열로 여기는 것은 그럴듯하나, 수분이 이질로 빠져나가면 소변이 반드시 길게 나오지 못하고 액이 음을 따라 없어지면 소변의 빛이 변한다는 것을 모른다. 다시 소변이 뜨거운지 뜨겁지 않은지, 액이 말랐는지 마르지 않은지, 빛이 윤택한지 윤택하지 않은지로 허실을 나누어야 한다. 이급후중을 실열로 여기는 것은 그럴듯하나, 기가 꺼지면 창름이 저장하지 못하고 음을 잃으면 문호가 닫히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다시 병의 신구와 체질의 강약, 맥의 성쇠로 허실을 나누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