瘧 、 利兩症 , 每年於夏秋兩季 , 所在多有 。 大抵由寒熱夾雜 、 飲食不調所致 。 診治得法 , 藥數服可愈 。 乃近見患此者 , 或數月始瘳 , 或竟以不起 。 根究其由 , 率皆用藥之誤 。 五邑王先生祉庭 , 人品高潔 , 學問深邃 , 人徒見其文章 , 而不知其深明於醫學也 。 壬午 , 余同客金陵 , 其年寒暑不時 , 同鄉人率多患瘧 、 利 , 其應募營伍者 , 死亡相繼 , 惟吾友胡君蔗農 、 李君石舫 、 吳君少云 、 易君桐仙 , 皆先生主治 , 隨手取效 。 去年餘病瘧 , 凡四閱月而愈 ; 今年復發 , 問方先生 , 不數劑而病霍如也 。 因勸著為書以廣其傳 , 越日稿出 , 各僅三方 。 余問曰 : 人體之強弱 , 受病之淺深 , 自然各異 , 而先生概以三方 , 得毋泥乎 ? 曰 : 非泥也 , 體之強弱 , 病之淺深 , 誠哉不同 , 而受病之由與病之在某經 , 則無不同 。 如瘧之在少陽 , 痢之在陽明 , 千萬人如一轍 , 惟於第二方中 , 善為變通而已 。 且驪珠在握 , 自無須多方 。 若今日用某藥 , 明日用某藥 , 非涼即溫 , 茫無把握 , 如攻敵然 , 有敵之處 , 兵甲不加 , 無敵之處 , 肆行屠戮 , 欲其不死也得乎 ? 予雖用三方 , 其實只二方也 。 先生之治病 , 其有定見如此 。 曩先生有 《 白喉辨症 》 之刻 , 匿其名 , 現已不脛而走 。 是書之出 , 殆又有甚焉者與 。 外戒洋菸方 , 亦先生所得諸友人者 , 較林文忠公所傳諸方 , 其效為尤捷 , 因附刊於後 。
학질과 이질 두 증상은 해마다 여름과 가을 두 철에 곳곳에서 많이 발생한다. 대개 한열이 뒤섞이고 음식 섭취가 고르지 못하여 생긴다. 진찰과 치료가 법도에 맞으면 약 몇 번으로 나을 수 있다. 그런데 근래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을 보니, 몇 달이 지나서야 낫기도 하고 끝내 일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 원인을 깊이 따져 보면 대체로 모두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오읍(五邑)의 왕지정(王祉庭) 선생은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깊으나, 사람들은 그의 문장만 알고 의학에도 깊이 밝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임오년에 내가 함께 금릉(金陵)에 머물렀는데, 그해에는 추위와 더위가 때에 맞지 않아 동향 사람들이 대부분 학질과 이질에 걸렸고, 군영에 모집되어 들어간 사람들은 잇따라 죽었다. 그러나 나의 벗 호자농(胡蔗農), 이석방(李石舫), 오소운(吳少云), 역동선(易桐仙)은 모두 선생이 맡아 치료하여 곧바로 효험을 얻었다. 지난해 나는 학질을 앓아 꼬박 넉 달이 지나서야 나았는데, 올해 다시 발병하여 선생에게 처방을 물었더니 몇 첩을 넘기지 않고 병이 갑자기 사라졌다. 이에 책으로 지어 널리 전하도록 권하였더니, 이튿날 원고가 나왔는데 각각 처방이 세 가지뿐이었다. 내가 물었다. “사람마다 몸의 강약과 병을 받은 깊고 얕음이 저절로 다른데, 선생께서 모두 세 처방으로 다스리신다면 너무 한 가지에 얽매이는 것 아닙니까?” 선생이 말하였다.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강약과 병의 깊고 얕음은 참으로 서로 다르지만, 병을 받은 까닭과 병이 어느 경에 있는지는 다르지 않습니다. 학질은 소양에 있고 이질은 양명에 있다는 것은 천만 사람이 한결같으니, 다만 두 번째 처방에서 잘 변통하면 될 뿐입니다. 또 귀한 여의주를 손에 쥐고 있다면 많은 처방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은 어떤 약을 쓰고 내일은 다른 약을 쓰며 서늘한 약 아니면 따뜻한 약을 쓰면서 아무런 확신이 없는 것은, 적을 공격하면서 적이 있는 곳에는 군사를 보내지 않고 적이 없는 곳에서는 마구 도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고서 사람이 죽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세 처방을 쓰지만 실제로는 두 처방뿐입니다.” 선생이 병을 치료할 때 확고한 견해를 가진 것이 이와 같다. 예전에 선생은 이름을 숨기고 『백후변증(白喉辨症)』을 간행하였는데, 지금은 발이 없어도 저절로 널리 퍼졌다. 이 책이 나오면 아마 그보다 더욱 널리 퍼질 것이다. 덧붙인 아편 끊는 처방 또한 선생이 벗에게 얻은 것으로, 임문충공(林文忠公)이 전한 여러 처방보다 효험이 더욱 빠르므로 뒤에 함께 실어 간행한다.
光緒八年同邑蔣世芳序於金陵節署
광서(光緒) 8년, 같은 고을 장세방(蔣世芳)이 금릉의 절서(節署)에서 서문을 쓰다.
王君芷庭 , 吾楚之中湘人也 。 常耳其為人 , 輒心敬之 , 以未得一見為恨 。 從事今歲來金陵 , 從事侯相幕中 , 而先生在焉 , 乃得親其言論風采 , 覺品概之高 , 學問之邃 , 顧視流輩 , 無與倫比 , 益深佩之 , 而未知先生之精於醫學也 。 適今夏金陵寒暑不時 , 同輩患瘧者踵相接 , 王君出方治之 , 應手輒愈 。 問其術何神 ? 曰 : 無多方也 , 瘧之為疾 , 僅在一經 , 非如傷寒 , 一日傳一經 , 甚至兩經 、 三經合病也 , 惟導之使出 , 遏之不使入 , 解其表 , 清其熱 , 毋誤用別經藥而已 。 因念吾鄉人來此 , 病瘧而死者 , 已不乏人 , 商之同鄉蔣君蘋笙 , 將王君所著三方付之剞劂氏 , 並倡資印送 , 如世俗善書之例 。 嗟乎 ! 醫之為道 , 學者多以為雜伎而不屑為 , 而市井之徒 , 每挾方書以為利藪 , 投之偶效 , 遂驚以為神 , 而聲價倍增 ; 及其不效 , 則諉之曰命限之也 , 抑孰知其誤人不淺哉 ! 先生非業此者 , 其著為此方 , 固其慈愛惻怛之衷流露而不容已也 , 推而廣之 , 其亦濟人之一道也夫 !
왕지정(王芷庭) 군은 우리 초(楚) 땅의 중상(中湘) 사람이다. 평소 그 사람됨을 듣고 늘 마음속으로 공경하였으며, 한 번 만나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금년에 금릉에 와서 후상(侯相)의 막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선생도 그곳에 계셨으므로, 비로소 그 언론과 풍채를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품격의 높음과 학문의 깊이가 동류들을 둘러보아도 견줄 사람이 없음을 느껴 더욱 깊이 탄복하였으나, 선생이 의학에도 정통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마침 올여름 금릉은 추위와 더위가 때에 맞지 않아 동료들 가운데 학질을 앓는 사람이 잇따랐는데, 왕군이 처방을 내어 치료하면 손을 대는 대로 나았다. 그 의술이 어찌 그토록 신묘한지 물었더니 말하였다. “처방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학질이라는 병은 오직 한 경에만 있으니, 하루에 한 경으로 전하고 심지어 두 경이나 세 경의 병이 합쳐지기도 하는 상한과는 다릅니다. 다만 이끌어 밖으로 나가게 하고 막아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표를 풀고 열을 맑히면서 다른 경의 약을 잘못 쓰지 않으면 될 뿐입니다.” 이에 우리 고향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학질을 앓다가 죽은 이가 이미 적지 않음을 생각하여, 동향인 장빈생(蔣蘋笙) 군과 의논하고 왕군이 지은 세 처방을 판각하는 이에게 맡겼다. 아울러 세상에서 선서를 펴내듯이 출자를 권하여 인쇄하고 나누어 주기로 하였다. 아! 의술의 도를 학자들은 흔히 잡된 기예라 여겨 하찮게 보고, 시정 사람들은 곧잘 처방서를 끼고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삼는다. 약을 주어 우연히 효험이 나면 사람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고 그 명성과 몸값은 배로 올라간다. 효험이 없으면 명이 다한 탓이라며 핑계를 대니, 도대체 누가 그들이 사람을 그르침이 얕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선생은 의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며, 이 처방을 지은 것은 참으로 자애롭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드러나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널리 펴는 것 또한 사람을 구제하는 한 길일 것이다!
光緒壬午長沙李宗裕序於金陵節署之東偏
광서 임오년에 장사(長沙) 이종유(李宗裕)가 금릉 절서의 동쪽 곁채에서 서문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