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醫猶理也 , 醫之有瘍醫 , 猶理之有兵也 。 善為理者 , 正其五官 , 齊其百司 , 使紀綱法度 , 各有所攝而不弛 , 則垂拱委裘而天下可以無變 , 不幸而一隅乘釁 , 然後不得已而兵之 。 故兵非理之所尚也 , 將藉之以除亂也 。 彼其平居無事之時 , 而吾所以弭亂之本 , 既已縝密完固 , 而無所疏漏 , 一旦有急則除之而已耳 。 故兵雖試而國家之元氣不虧 , 醫之為道也亦然 。 方其病在腠理也 , 湯液之所及也 。 其在腸胃也 , 湔浣之所及也 。 若夫隆然皮膚之間 , 甚至不可名狀者 , 彼何為哉 , 其能不攻刺乎 ! 其能不搏擊乎 ! 顧攻有守而後攻 , 擊有備而後擊 。 苟不諦其虛實 , 不量其壯羸 , 而動曰攻擊之 , 吾恐病未卻而精已耗 。 譬則忿兵數逞 , 而國計內空 , 疥癬之疾 , 將不為腹心之患者幾希 , 噫 , 可不慎乎 。 故明於理者 , 可與語醫也 。 已世之以瘍名家者多矣 , 然孰有如我立齋先生者耶 。 蓋先生以岐黃世業 , 旁通諸家 , 微詞頤旨 , 靡不究竟 。 其言以為不知外科者 , 無以通經絡之原委 。 不精 《 內經 》 者 , 無以究陰陽之變合 。 內外殊科 , 其揆一也 。 故其視病不問大小 , 必以治本為第一義 。 無急效 , 無近期 , 紓徐從容 , 不勞而病自愈 。 間出 《 癘瘍機要 》 一編 , 屬其友沈生梓之以傳 。 沈生讀之 , 大率以己意而訂古方 , 以醫案而驗治效 , 以調補為守備之完策 , 以解利為攻擊之權宜 。 蓋不出乎廟堂之訐謨 , 而坐得夫催陷廓清之術 。 假令業醫者而執是焉 , 既不病於滯而不通 , 又不病於膚而無本 , 奚至攻其所習 , 而毀所不見耶 。 噫 ! 若先生者可謂醫而通於理者矣 。 是錄也 , 顧不可傳哉 。 或者曰 : 誠若所言 , 則內外醫分門異業者非歟 。 周官有疾醫 、 瘍醫二職 , 並存何也 ? 曰 : 非是之謂也 。 昔秦越人之為醫也 , 聞秦貴小兒則小兒醫 , 趙貴婦人則帶下醫 , 周貴老人則耳目痹醫 。 一醫而三習 , 非其術誠奇幻 , 理固不殊也 。 若周官所存 , 則以其職言耳 , 豈知後世判為兩途 , 絕不相通者哉 。 古之任官 , 居則為命卿 , 而出則為命將 。 夫一人也 , 而理與兵兼焉 , 孰謂內外醫果不相通者哉 。
의술은 다스림과 같다. 의술에 양의가 있는 것은 다스림에 군사가 있는 것과 같다. 잘 다스리는 이는 오관을 바로잡고 백사를 가지런히 하여 기강과 법도가 저마다 거느리는 바가 있어 해이하지 않게 한다. 그러면 팔짱을 끼고 갖옷을 맡겨 두어도 천하에 변고가 없을 수 있다. 불행히 한 모퉁이가 틈을 타면 그 뒤에 부득이 군사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는 다스림에서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빌려 난을 없애려는 것이다. 평소 일이 없을 때 난을 그치게 할 근본을 이미 치밀하고 완고하게 하여 소홀하거나 빠진 곳이 없다면, 하루아침에 급한 일이 생겨도 그것을 없애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군사를 쓰더라도 국가의 원기가 이지러지지 않으니, 의술의 도리도 그러하다. 병이 주리에 있을 때에는 탕액이 미치는 바이고, 장위에 있을 때에는 씻어 내는 것이 미치는 바이다. 피부 사이에 불룩하게 솟아 심지어 형용할 수도 없는 것은 어찌해야 하겠는가? 공격하고 찌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지킬 것이 있은 뒤에 공격하고 대비가 있은 뒤에 쳐야 한다. 그 허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장실함과 여윔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걸핏하면 공격한다고 하면, 병이 물러가기 전에 정이 이미 소모될까 두렵다. 비유하면 분노하여 군사를 거듭 함부로 써서 나라의 살림이 안으로 비게 되는 것과 같으니, 개선의 질환이 복심의 우환이 되지 않을 경우는 드물 것이다. 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스림에 밝은 이와 의술을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창양으로 이름난 이가 많지만 누가 우리 입재 선생만 하겠는가? 선생은 기황의 학문을 대대로 이어 다른 여러 학설에도 널리 통하였으며, 미묘한 말과 깊은 뜻을 끝까지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말에 외과를 알지 못하면 경락의 시말에 통할 수 없고, 『내경』에 정밀하지 못하면 음양의 변화와 합함을 궁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과와 외과는 분야가 다르지만 그 법도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병을 살필 때 크고 작음을 묻지 않고 반드시 근본을 치료하는 것을 첫째 뜻으로 삼았다. 급한 효과를 구하지 않고 기한을 짧게 잡지 않으며 느긋하고 여유 있게 하여 수고하지 않아도 병이 저절로 나았다. 간간이 『여양기요』 한 편을 내어 벗 심생에게 판각하여 전하도록 부탁하였다. 심생이 읽어 보니 대체로 자기 뜻으로 옛 처방을 바로잡고 의안으로 치료 효과를 징험하였으며, 조보를 수비의 온전한 계책으로 삼고 해리를 공격의 임시 방편으로 삼았다. 묘당의 계책을 벗어나지 않고도 앉아서 적을 무너뜨리고 말끔히 쓸어 내는 술법을 얻은 것이다. 의술에 종사하는 이가 이것을 잡고 행한다면 막혀 통하지 못하는 병폐도 없고 얕아서 근본이 없는 병폐도 없을 것이니, 어찌 자신이 익힌 분야에만 힘쓰고 보지 못한 것을 헐뜯는 데 이르겠는가? 아, 선생 같은 이는 의술을 하면서 다스림에 통했다고 이를 만하다. 이 기록을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참으로 말한 바와 같다면 내과와 외과가 문호를 나누고 업을 달리하는 것은 그른가? 주관에 질의와 양의 두 직책이 함께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답하기를, 그런 뜻이 아니다. 옛날 진월인이 의술을 행할 때 진나라에서 어린아이를 귀히 여긴다는 말을 듣고 소아의가 되었고, 조나라에서 부인을 귀히 여기므로 대하의가 되었으며, 주나라에서 노인을 귀히 여기므로 이목비의가 되었다. 한 의사가 세 가지를 익힌 것은 그 술법이 참으로 기이하고 변화무쌍해서가 아니라 이치가 본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주관에 있는 것은 직책으로 말했을 뿐이니, 어찌 후세에 두 길로 갈라져 전혀 서로 통하지 않게 될 줄 알았겠는가? 옛날 관직을 맡은 이는 안에 있으면 명경이 되고 밖에 나가면 명장이 되었다. 한 사람인데 다스림과 군사를 겸하였으니, 누가 내과와 외과가 과연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