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喉險症也 。 靈素以來 。 未詳著錄 。 國朝道光間湖南陳氏雨春始著白喉嚨證論 。 (見白喉捷要常敘)其鄉人瀏陽張善吾紹修本其意作白喉捷要 。 大旨言足三陰受病 。 傳之於肺 。 已失白喉本來面目 。 而用藥又不出風火喉痹之範圍 。 與手太陰燥火了無關涉 。 鄭氏梅澗所著重樓玉鑰 。 言此症或遇燥氣流行而發 。 用藥以清肺養陰為主 。 頗為中的 。 然語焉不詳 。 得失參半 。 似未能洞徹源流者 。 (如既言或遇燥氣流行而發又言此症在少陰一經熱邪伏其間盜肺金之母氣云云用藥既以養陰清肺為主又言只宜紫正散夫紫正散之荊芥防風荊皮細辛與養陰清肺湯之冬地白芍丹皮奚啻冰炭何鄭氏竟相提並論也)光緒戊子京師是症大發 。 有耐修子者 。 以戚串中多遭其厄 。 悉心講求 。 托之神道 。 採二家之言 。 著白喉治法忌表抉微 。 選擇頗為簡要 。 然此君非素業岐黃之術者 。 於受病之源流經絡 。 用藥之色味氣性 。 茫無真知灼見 。 故語多不根 。 尤不足以津逮後學 。 癸巳春余及二女一子於數日間次第傳染 。 (壬辰秋冬之交天久不雨燥氣盛行冬至後大霜雪尋常湖漵冰厚寸許甌郡地氣極暖不見此氣候者已六七十年至立春後雨水驟至是症輒大發聞郡城醫者多以辛溫表散從事小兒遭厄者甚夥)長女以張氏法治之 。 幾至不起 。 幸以大辛涼合甘鹹寒法日進三大劑獲效 。 (張氏所列無治之症十一條已居其八)次女少子遂悉用養陰法 。 次女愈而少子夭 。 此中疑團 。 幾不可破 。 甲午秋季少女(時才周歲)患伏暑病 。 身熱痙厥 。 痰嗽而喘 。 投以清熱化痰 。 通絡息風劑 。 痙厥愈而諸症不減 。 至日晡時痰喘愈甚 。 與白喉病將絕時形象 。 宛然無異 。 急用前方加入西洋參石膏大辛涼法與之 。 痰喘頓止 。 而身熱亦愈 。 始恍然於白喉病之標本傳變 。 從前醫治之或得或失 。 一一瞭如指掌 。 且深悉張氏鄭氏耐修氏三先生之書 。 雖各有心得 。 實未能窮極源流也 。 於是潛心探索 。 彙集眾長 。 證以經誼 。 參以閱歷 。 遲之數年 。 作白喉訂正論一卷 。 呈政於蟄廬主講 。 主講曰 。 是論雖詳 。 然頭緒繁多 。 篇幅長冗 。 恐閱者未易貫徹 。 盍仿吳鞠通氏著溫病例為白喉條辨 。 庶幾綱舉目張 。 作者既易於發明 。 閱者復易於尋繹 。 余曰 。 善 。 退而作條辨一十五條 。 稿既脫 。 因為敘其大旨 。 雖當仁不讓 。 於張氏鄭氏耐修氏三先生之言 。 間多指摘 。 然非三先生開先河之功 。 余亦安能遽集其成也 。 後有作者 。 倘能闡發微旨 。 匡茲不逮 。 豈特余與三先生之幸 。 抑天下生靈有厚望焉 。
백후는 위험한 병증이다. 《영추》와 《소문》 이래 자세한 기록이 없다가 우리 왕조 도광 연간에 호남의 진우춘이 처음 《백후롱증론》을 지었다. 《백후첩요》의 상씨 서문에 보인다. 같은 고장 유양의 장선오 소수가 그 뜻을 바탕으로 《백후첩요》를 지었다. 대지는 족삼음이 병을 받아 폐에 전한다고 하였으니 이미 백후 본래의 면목을 잃었고, 용약도 풍화후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 수태음의 조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정매간이 지은 《중루옥약》은 이 증이 조기가 유행할 때 발한다고 하며 용약은 청폐양음을 위주로 하였으니 꽤 핵심을 맞혔다. 그러나 말이 자세하지 않고 득실이 반반이어서 근원과 흐름을 꿰뚫지는 못한 듯하다. 조기가 유행할 때 발한다고 하면서 또 소음 한 경에 열사가 숨어 폐금의 모기를 빼앗는다고 하였다. 용약도 양음청폐를 주로 한다면서 자정산만 써야 한다고 하였다. 자정산의 형개·방풍·형피·세신과 양음청폐탕의 맥문동·지황·백작약·목단피는 얼음과 숯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데 어찌 정씨는 함께 논하였는가? 광서 무자년에 수도에서 이 병이 크게 유행했다. 내수자라는 이는 친척 가운데 많이 재앙을 당하자 온 마음으로 연구하고 신도에 의탁하여 두 집안의 설을 채택해 《백후치법기표결미》를 지었다. 선택은 꽤 간명하고 요긴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평소 의술을 업으로 삼던 이가 아니어서 병을 받는 근원과 경락, 약의 색·맛·기·성에 참으로 분명한 지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말에 근거 없는 것이 많아 더욱 후학을 인도하기에 부족하다. 계사년 봄 나와 두 딸, 아들 하나가 며칠 사이 차례로 전염되었다. 임진년 가을과 겨울이 바뀔 때 오래 비가 오지 않아 조기가 성행했고, 동지 뒤 큰 서리와 눈이 내려 평소의 호수와 물가에도 얼음이 한 치쯤 두꺼웠다. 구군은 지기가 매우 따뜻하여 이런 기후를 보지 못한 지 60~70년이었다. 입춘 뒤 비가 갑자기 오자 이 병이 크게 발생하였다. 군성 의사들이 대부분 맵고 따뜻한 약으로 표를 발산하여 소아가 재앙을 당한 경우가 매우 많다고 들었다. 큰딸은 장씨의 방법으로 치료하다 거의 살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다행히 크게 맵고 서늘한 방법과 달고 짜며 찬 방법을 합하여 하루 세 대제를 투여해 효과를 얻었다. 장씨가 열거한 불치증 열한 조 가운데 이미 여덟에 해당했다. 둘째 딸과 어린 아들에게는 모두 양음법을 썼는데 둘째 딸은 낫고 어린 아들은 요절했다. 이 의문은 거의 풀 수 없었다. 갑오년 가을에 어린 딸이, 당시 겨우 돌이었는데, 복서병으로 몸에 열이 나고 경궐하며 가래 섞인 기침과 천식이 있었다. 청열화담하고 통락식풍하는 약을 투여하자 경궐은 나았으나 다른 증은 줄지 않았으며, 해 질 무렵에는 담천이 더욱 심해져 백후로 숨이 끊어지려 할 때의 모습과 완연히 같았다. 급히 앞 처방에 서양삼·석고를 넣어 대신량법으로 주자 담천이 갑자기 멎고 신열도 나았다. 비로소 백후의 표본과 전변, 이전 치료의 성공과 실패가 하나하나 손바닥을 보듯 분명해졌다. 또한 장씨·정씨·내수씨 세 선생의 책은 각각 얻은 바가 있지만 실로 근원과 흐름을 끝까지 밝히지는 못했음을 깊이 알았다. 이에 마음을 가라앉혀 탐구하고 여러 장점을 모아 경전의 뜻으로 증명하고 경험을 참작하며 몇 년을 기다려 《백후정정론》 한 권을 지어 칩려 주강에게 올려 바로잡아 달라고 했다. 주강은 논의는 자세하지만 갈래가 많고 길고 번다하여 읽는 사람이 꿰뚫기 어려우니 오국통의 온병 저술 예를 따라 《백후조변》으로 만들면 큰 줄기와 세목이 분명해져 짓는 이도 밝히기 쉽고 읽는 이도 찾아 이해하기 쉽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나는 좋다고 하고 물러나 조변 열다섯 조를 지었다. 원고를 마친 뒤 그 대지를 서술한다. 마땅한 일을 남에게 양보하지 않다 보니 장씨·정씨·내수씨 세 선생의 말에 지적한 부분이 많지만, 세 선생이 먼저 물길을 연 공이 없었다면 나 또한 어찌 갑자기 그 성과를 모을 수 있었겠는가? 뒤에 저술할 이가 미묘한 뜻을 밝혀 이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준다면 어찌 나와 세 선생만의 다행이겠는가? 천하 백성이 크게 바라는 바이다.
光緒二十三年歲丁酉夏月
광서 23년 정유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