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農本草經三卷所傳白字書 , 見大觀本草 。 按 : 嘉祐補注序云 :「 所謂神農本經者 , 以朱字 。 名醫因神農舊條而有增補者 , 以墨字間於朱字 。」 開寶重定序云 : 「 舊經三卷 , 世所流傳 , 名醫別錄互為編纂 。 至梁貞白先生陶弘景乃以別錄參其本經 , 朱墨雜書 , 時謂明白 。 」 據此則宋所傳黑白字書 , 實陶弘景手書之本 。 自梁以前 , 神農 、 黃帝 、 岐伯 、 雷公 、 扁鵲 , 各有成書 。 魏吳普見之 , 故其說藥性主治 , 各家殊異 。 後人纂為一書 , 然猶有旁注 , 或朱墨字之別 , 本經之文以是不亂 。 舊說本草之名 , 僅見漢書平帝紀及樓護傳 。 予按 : 藝文志有神農黃帝食藥七卷 , 今本譌為食禁 。 賈公彥周禮醫師疏引其文 , 正作食藥 。 宋人不考 , 遂疑本草非七略中書 。 賈公彥引中經簿 , 又有子儀本草經一卷 , 疑亦此也 。 梁七錄有神農本草三卷 。 其卷數不同者 , 古今分合之異 。 神農之世 , 書契末作 , 說者以此疑經 。 如皇甫謐言 , 則知四卷成於黃帝 。 陶弘景云 :「 軒轅已前 , 文字未傳 , 藥性所主 , 當以識識相因 。 至於桐 、 雷 , 乃著在於編簡 。 此書當與素問同類 。」 其言良是 。 且藝文志農兵 、 五行 、 雜占 、 經方 、 神僊諸家 , 俱有神農書 。 大抵述作有本 , 其傳非妄 。 是以博物志云 : 「 太古書 , 今見存有神農經 。 春秋傳注 。 賈逵以三墳為三皇之書 , 神農預其列 。 」 史記言 :「 秦始皇不去醫藥卜筮之書 。」 則此經幸與周易並存 。 顏之推家訓乃云 : 「 本草神農所述 , 而有豫章 、 朱崖 、 趙國 、 常山 、 奉高 、 真定 、 臨淄 、 馮翊等郡縣名出諸藥物 , 皆由後人所羼 , 非本文 。」 陶弘景亦云 :「 所出郡縣 , 乃後漢時制 , 疑仲景 、 元化等所記 。」 按 : 薛綜注張衡賦 , 引本草經 「 太一禹餘糧 , 一名石腦 , 生山谷 。」 是古本無郡縣名 。 太平御覽引經 , 上云 :「 生山谷或川澤 。 」 下云 :「 生某山某郡 。」 明 「 生山谷 」, 本經文也 , 其下郡縣 , 名醫所益 。 今大觀本俱作黑字 , 或合其文 。 云 「 某山川谷 」、「 某郡川澤 」, 恐傳寫之誤 , 古本不若此 。 仲景 、 元化後 , 有吳普 、 李當之 , 皆修此經 。 當之書 , 世少行用 。 魏志華佗傳言 :「 普從佗學 。」 隋經籍志稱 :「 吳普本草 , 梁有六卷 。」 嘉祐本草云 : 「 普修神農本草 , 成四百四十一種 。 唐經籍志尚存六卷 。 今廣內不復存 , 惟諸書多見引據 。 其說藥性寒溫五味最為詳悉 。」 是普書宋時已佚 。 今其文惟見掌禹錫所引藝文類璨 、 初學記 、 後漢書注事類賦諸書 。 太平御覽引據尤多 , 足補大觀所缺 , 重是別錄前書 。 因采其文 , 附於本桱 , 亦略備矣 。 其普所稱 , 有 「 神農說者 」 即是木經 。 大觀或誤作黑字 , 亦據增其藥物 , 或數浮于三百六十五種 , 由後人以意分合 , 難以定之 。 其藥名有禹餘糧 、 王不留行 、 徐長卿 、 鬼督郵之屬 , 不類太古時文 。 按十字書以 「 禹 」 為 「 蟲 」, 不必夏禹 。 其餘名號 , 或係後人所增 , 或聲音傳述 , 改古舊稱所致 。 又經有云 :「 宜酒漬者 。 」 或以酒非神農時物 。 然本草衍義已據素問首言 :「 以妄為常 , 以酒為漿 。 」 謂 「 酒自黃帝始 。」 又按 : 文選注引博物志亦云 :「 杜康作酒 。 」 王著與杜康緧交書曰 :「 康字仲寧 , 或云黃帝時人 。」 則俱不得疑經矣 。 孔子曰 : 「 述而不作 , 信而好古 。」 又云 :「 多識於鳥獸草木之名 。」 今儒家拘泥耳目 , 未能及遠 , 不覩醫經本草之書 。 方家循守俗書 , 不察古本藥性異同之說 。 又見明李時珍作本草綱目 , 其名已愚 , 僅取大觀本割裂舊文 , 妄加增駁 , 迷誤後學 。 予與家鳳卿集成是書 , 庶以輔翼完經 。 敵蒙方伎 , 略以所知 , 如之考證 。 本經云 : 「 上藥本上經 , 中藥本中經 , 下藥本下經 。」 是古以玉石草木等上中下品分卷 , 而序錄別為一卷 。 陶序朱書云 :「 本草經卷上注云 :『 序藥性之源本 , 論病名之形診 。 』 卷中云 :『 玉石草木三品 。』 卷下云 :『 蟲獸果菜米合三品 。』 此名醫所改 , 今依古為次 。」 又帝王世紀及陶序稱四卷者 , 掌禹錫云 :「 按 : 舊本亦作四卷 。 」 韓保昇又云 :「 神農本草上中下 , 并序錄 , 合四券 。」 若此 , 則三 、 四之異 , 以有序錄 。 則抱朴子 、 養生要略 、 太平御覽所引神農經 , 或云 「 問于太乙于 」, 或引 「 太乙子 」 云云 , 皆經所無 , 或亦在序錄中 , 後人節去之耳 。 至其經文 , 或以痒為癢 , 創為瘡 , 淡為痰 , 注為蛀 , 沙為砂 , 免為菟之類 , 皆由傳寫之誤 。 據古訂正 , 勿嫌驚俗也 。 其辨析物類 , 引據諸書 , 本之毛詩 、 爾雅 、 說文 、 方言 : 廣雅 , 誰子雜家 , 則鳳卿增補之力居多云 。 陽湖孫星衍撰
『신농본초경』 3권의 전해지는 흰 글씨 부분은 『대관본초』에 보인다. 살펴보건대 「가우보주서」에 “이른바 신농의 본경은 붉은 글씨로 썼다. 명의가 신농의 옛 조문에 따라 증보한 것은 먹글씨로 붉은 글씨 사이에 끼워 넣었다.”라고 하였다. 「개보중정서」에는 “옛 경전 3권은 세상에 전해지면서 『명의별록』과 서로 섞여 편찬되었다. 양나라 정백선생 도홍경에 이르러 『별록』을 그 본경에 대조하여 붉은 글씨와 먹글씨로 섞어 썼으니, 당시에는 분명하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송나라에 전해진 검고 흰 글씨의 책은 실로 도홍경이 손수 쓴 판본이다. 양나라 이전에는 신농·황제·기백·뇌공·편작에게 각기 완성된 책이 있었다. 위나라 오보가 이를 보았으므로 약성과 주치에 관한 각가의 설명이 달랐다. 후인이 한 책으로 모았으나 여전히 곁주나 붉은 글씨와 먹글씨의 구별이 있었으므로 본경의 글이 어지럽혀지지 않았다. 옛 설명에서는 본초라는 이름이 『한서』 「평제기」와 「누호전」에만 보인다고 한다. 내가 살펴보니 「예문지」에는 『신농황제식약』 7권이 있는데, 지금 판본에는 ‘식금’으로 잘못되어 있다. 가공언의 『주례』 「의사소」에서 그 글을 인용한 것은 정확히 ‘식약’으로 되어 있다. 송나라 사람들은 고찰하지 않고 마침내 본초는 『칠략』에 수록된 책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가공언이 인용한 『중경부』에는 또 『자의본초경』 1권이 있으니, 이 역시 이 책인 듯하다. 양나라 『칠록』에는 『신농본초』 3권이 있다. 권수가 다른 것은 고금에 나누고 합친 차이이다. 신농의 시대에는 글자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논자들이 이 때문에 경전을 의심한다. 황보밀의 말에 따르면 4권이 황제 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홍경은 “헌원 이전에는 문자가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약성이 주치하는 바는 마땅히 기억에서 기억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동(桐)과 뇌(雷)에 이르러서야 죽간에 기록되었다. 이 책은 마땅히 『소문』과 같은 부류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참으로 옳다. 또 「예문지」의 농병·오행·잡점·경방·신선의 여러 부류에는 모두 신농의 책이 있다. 대체로 서술과 저작에는 근본이 있으니 그 전승은 망령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박물지』에 “태고의 책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에는 『신농경』이 있다. 『춘추전』 주석에서 가규는 삼분을 삼황의 책이라 하였으며, 신농도 그 반열에 든다.”라고 하였다. 『사기』에 “진시황은 의약과 복서의 책을 없애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 경전은 다행히 『주역』과 함께 남았다. 안지추의 『가훈』에는 “본초는 신농이 서술한 것인데, 여러 약물에 예장·주애·조국·상산·봉고·진정·임치·풍익 등의 군현 이름이 나오는 것은 모두 후인이 섞어 넣은 것으로 본래의 글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도홍경도 “산출되는 군현은 후한 때의 제도이니, 중경과 원화 등이 기록한 듯하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설종은 장형의 부를 주석하면서 『본초경』의 “태일우여량은 석뇌라고도 하며 산골짜기에서 난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는 옛 판본에 군현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태평어람』이 경전을 인용하면서 위에는 “산골짜기나 냇가의 습지에서 난다.”라고 하고 아래에는 “어느 산, 어느 군에서 난다.”라고 하였으니, “산골짜기에서 난다.”는 본경의 글이고 그 아래 군현은 명의가 더한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 대관본은 모두 검은 글씨로 되어 있거나 그 글을 합하여 “어느 산의 냇가와 골짜기”, “어느 군의 냇가와 습지”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전사하면서 생긴 잘못일 것이며 옛 판본은 이와 같지 않았다. 중경과 원화 뒤에는 오보와 이당지가 모두 이 경전을 정리하였다. 당지의 책은 세상에서 드물게 쓰였다. 『위지』 「화타전」에 “보는 타에게 배웠다.”라고 하였다. 수나라 「경적지」에는 “『오보본초』는 양나라에 6권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가우본초』에는 “보는 『신농본초』를 정리하여 441종을 이루었다. 당나라 「경적지」에는 아직 6권이 남아 있었다. 지금 궁중 서고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나 여러 책에서 인용한 것이 많이 보인다. 약성의 차고 따뜻함과 오미에 관한 설명이 가장 상세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보의 책은 송나라 때 이미 없어졌다. 지금 그 글은 장우석이 인용한 『예문유찬』·『초학기』·『후한서』 주석·『사류부』 등의 책에만 보인다. 『태평어람』의 인용이 특히 많아 『대관』에서 빠진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더구나 이는 『별록』 이전의 책이다. 이에 그 글을 모아 「本桱」에 붙이니 또한 대략 갖추어졌다. 오보가 말한 것 가운데 “신농이 말한 것”이 바로 「木經」이다. 『대관』에서 혹 잘못 검은 글씨로 쓴 것도 이에 따라 그 약물을 보충하였다. 혹 그 수가 365종을 넘는 것은 후인이 뜻대로 나누고 합쳐서이므로 정하기 어렵다. 약 이름 가운데 우여량·왕불류행·서장경·귀독우 같은 것은 태고 시대의 글과 같지 않다. 살펴보건대 『십자서』에서는 ‘우(禹)’를 ‘충(蟲)’으로 풀이하였으니 반드시 하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 명칭은 혹 후인이 보탰거나 소리로 전해지면서 옛 이름이 바뀐 것일 것이다. 또 경전에는 “술에 담그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혹 술은 신농 때의 물건이 아니라고 하지만, 『본초연의』는 이미 『소문』 첫머리의 “망령됨을 일상으로 삼고 술을 음료로 삼는다.”라는 말에 근거하여 “술은 황제 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문선』 주석에서 인용한 『박물지』에도 “두강이 술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왕저의 「여두강추교서」에는 “강의 자는 중녕이며, 혹 황제 때 사람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 경전을 의심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공자는 “전술하되 창작하지 않고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라고 하였고, 또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안다.”라고 하였다. 지금 유가들은 귀와 눈에 얽매여 먼 데까지 미치지 못하고 의경과 본초의 책을 보지 못한다. 방술가는 세속의 책만 지키며 옛 판본의 약성이 같고 다른 설명을 살피지 않는다. 또 명나라 이시진이 지은 『본초강목』을 보니 그 이름부터 이미 어리석고, 그저 대관본을 가져다가 옛 글을 잘라 흩뜨리고 함부로 증보하고 반박하여 후학을 미혹시켰다. 나는 집안의 봉경과 함께 이 책을 모아 이루어 경전을 돕고 완전하게 하고자 하였다. 「敵蒙方伎」, 대략 아는 바를 가지고 「如之考證」하였다. 본경에 “상약은 상경에 근거하고 중약은 중경에 근거하며 하약은 하경에 근거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옛날 옥석과 초목 등의 상·중·하품으로 권을 나누고 서록은 따로 한 권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도씨 서문의 붉은 글씨에는 “『본초경』 권상 주석에 ‘약성의 근원을 서술하고 병명의 형상과 진찰을 논한다.’라고 하였으며, 권중에는 ‘옥석과 초목의 삼품’이라 하고 권하에는 ‘벌레·짐승·과실·채소·곡식을 합한 삼품’이라 하였다. 이는 명의가 고친 것이므로 이제 옛것에 따라 차례를 정한다.”라고 하였다. 또 『제왕세기』와 도씨 서문에서 4권이라고 한 것에 대해 장우석은 “살펴보건대 옛 판본에도 4권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한보승도 “『신농본초』는 상·중·하에 서록을 더하여 모두 4권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다면 3권과 4권의 차이는 서록의 유무 때문이다. 『포박자』·『양생요략』·『태평어람』에서 인용한 『신농경』에 혹 “태을우에게 물었다”라고 하거나 “태을자”라는 말을 인용한 것들은 모두 이 경전에 없는 내용이니, 혹 서록에 있었으나 후인이 잘라 없앴을 뿐일 것이다. 그 경문에서 혹 痒을 癢으로, 創을 瘡으로, 淡을 痰으로, 注를 蛀로, 沙를 砂로, 免을 菟로 쓴 것 같은 것은 모두 전사하면서 생긴 잘못이다. 옛것에 근거하여 바로잡으니 세속을 놀라게 한다고 꺼리지 말 것이다. 물류를 분별하여 분석하고 여러 책을 인용하면서 『모시』·『이아』·『설문』·『방언』·『광아』와 「誰子雜家」에 근거한 것은 봉경이 증보한 공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양호 손성연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