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叔和 《 脈經 》 序
왕숙화의 《맥경》 서문
脈理精微 , 其體難辨 。 弦緊浮芤 , 展轉相類 。 在心易了 , 指下難明 。 謂沉為伏 , 則方治永乖 。 以緩為遲 , 則危殆立至 。 況有數候俱見 , 異病同脈者乎 ? 夫醫藥為用 , 性命所繫 , 和鵲至妙 , 猶或加思 。 仲景明審 , 亦候形證 , 一毫有疑 , 則考校以求驗 。 故傷寒有承氣之戒(叔和 《 傷寒例 》 云 : 桂枝下咽 , 陽盛以斃 , 承氣入胃 , 陰盛以亡 。 自謂其例耳 。 非仲景有此語) , 嘔噦發下焦之問(未詳所出 ,《 傷寒雜病論 》 有上焦竭善噫 , 下焦竭即遺溺失便 , 殆因此誤記) 。 而遺文遠旨 , 代寡能用 。 舊經秘述 , 奧而不售 , 遂令末學昧於原本 , 互滋偏見 , 各逞己能 , 致微疴成膏肓之變 , 滯固絕振起之望(固 , 古通痼) , 良有以也(當云良可嘆也) 。 今撰集岐伯以來逮於華陀經論要訣 , 合為十卷(言上自岐伯 , 下至華陀之書 , 各撰集之 , 叔和未曾下一語也 。 今按其註明出處者 , 有 《 素問 》、《 針經 》、 扁鵲 、 華陀 、 張仲景 , 又有 《 脈法贊 》、《 醫律 》 二種 , 未知誰氏之書 。 其餘不注出者甚多 , 注而今亡者亦有 , 今各補輯之 , 以還原書 。 惟以不知所出者類為二卷 , 又有新撰及四時經者 , 疑叔和句集群書而題上事 , 撰此名目 , 非別有一書也 。 又更有不注出而書尚存者 , 若 《 難經 》 是) , 百病根源 , 各以類例 , 相從聲色證候 , 靡不該備 。 其王 、 阮 、 傅 、 戴 、 吳 、 葛 、 呂 、 張 , 所傳異同 , 咸悉載錄之(八人者 , 未詳其名 , 蓋謂自岐伯以及華陀之書 , 有此八人傳寫本不同 。 今注中有一曰 、 一云者即是 , 咸悉載錄其異同也) 。 誠能留心研窮 , 究其微賾 , 則可以比蹤古賢 , 代無夭橫矣(橫即傷寒病別名 , 見 《 千金方 》 四) 。
맥의 이치는 정미하여 그 실체를 분별하기 어렵다. 현·긴·부·규는 서로 바뀌며 비슷하다. 마음으로는 알기 쉬우나 손가락 아래에서는 분명히 하기 어렵다. 침을 복이라고 하면 처방과 치료가 끝내 어긋나고 완을 지로 여기면 위태로움이 곧 이른다. 하물며 여러 후가 함께 나타나고 서로 다른 병에 같은 맥이 있는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의약의 쓰임에는 목숨이 달려 있으므로 의화와 편작처럼 지극히 뛰어나도 오히려 생각을 더하였고, 중경처럼 밝고 자세히 살펴도 또한 형증을 살펴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고찰하고 비교하여 증거를 구하였다. 그러므로 상한에는 승기의 경계가 있고(숙화의 《상한례》에서는 계지가 목구멍으로 내려가면 양이 성하여 죽고 승기가 위에 들어가면 음이 성하여 죽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그 예를 말한 것일 뿐 중경에게 이런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역과 딸꾹질에는 하초에서 발생하는지를 묻는 문답이 있다(출처는 자세하지 않다. 《상한잡병론》에 상초가 고갈되면 자주 트림하고 하초가 고갈되면 대소변을 흘린다는 말이 있으니 아마 이로 말미암아 잘못 기억한 듯하다). 그러나 남겨진 글의 심원한 뜻을 세상에서 능히 쓰는 자가 드물고, 옛 경전의 비밀스러운 서술은 깊어 널리 쓰이지 않으므로 후학들이 근본에 어두워 서로 편견을 불리고 각자 자신의 능력을 뽐내어 작은 병이 고황의 병변이 되게 하고 고질로 막혀 다시 일어날 희망을 끊어 버리게 하니(固는 옛날에 痼와 통용되었다), 참으로 까닭이 있다(참으로 탄식할 만하다고 해야 한다). 이제 기백 이래 화타에 이르기까지 경론의 요결을 찬집하여 합해 열 권으로 만들었다(위로 기백부터 아래로 화타의 책까지 각각 찬집하였으며 숙화는 일찍이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음을 말한다. 지금 그 출처를 밝힌 것을 살펴보면 《소문》·《침경》·편작·화타·장중경이 있고 또 《맥법찬》·《의율》 두 종류가 있는데 누구의 책인지 알지 못한다. 나머지 출처를 달지 않은 것은 매우 많고 출처를 달았으나 지금 없어진 것도 있다. 이제 각각 보충하여 모아 원래 책으로 돌렸다. 다만 출처를 알지 못하는 것을 분류하여 두 권으로 만들었다. 또 신찬 및 사시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숙화가 여러 책의 구절을 모아 위의 일을 제목으로 삼아 이 항목을 지은 듯하며 별도로 한 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출처를 달지 않았으나 책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난경》 같은 것이다). 온갖 병의 근원을 각각 종류와 예에 따라 서로 따르게 하고 소리·빛깔·증후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왕·완·부·대·오·갈·여·장에게서 전해진 같고 다른 것을 모두 빠짐없이 실었다(여덟 사람은 이름이 자세하지 않으니, 대개 기백부터 화타의 책에 이르기까지 이 여덟 사람이 베껴 전한 판본에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지금 주석 가운데 一曰·一云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며 그 같고 다른 것을 모두 실은 것이다). 진실로 마음을 두고 연구하여 미묘하고 깊은 뜻을 궁구할 수 있다면 옛 현인의 자취에 견줄 수 있고 세상에는 요절과 횡액이 없을 것이다(횡은 곧 상한병의 다른 이름이며 《천금방》 4에 보인다).
叔和事略
숙화의 행적 개요
後魏高湛 《 養生論 》 云 : 王叔和 , 高平人也 。 博好經方 , 洞識攝生之道 。 嘗謂人曰 : 食不欲雜 , 雜則或有所犯( 《 千金 》 三十六載高平王熙稱食不欲雜 , 與此正同 。 然則熙乃王叔和之名 , 今世通稱其字 , 其名則鮮有知者) 。 當時或無災患 , 積久為人作疾 。 尋常飲食 , 每令得所多飧 , 令人彭亨短氣 , 或致暴疾 。 夏至秋分 , 少食肥膩餅臛之屬 , 此物與酒食瓜果相妨 。 當時不必即病 , 入秋節變陽消陰長 , 寒氣總至 , 多至暴卒 。 良由涉夏取冷太過 , 飲食不節故也 。 而不達者 , 皆以病至之日 , 便謂是受病之始 , 而不知其所由來者漸矣 , 豈不惑哉( 《 御覽 》 七百二十 《 養生 》 ) !
후위 고담의 《양생론》에서 말하였다. 왕숙화는 고평 사람이다. 경방을 널리 좋아하고 섭생의 도리를 깊이 알았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음식은 섞어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섞으면 혹 범하는 것이 있게 된다(《천금》 36에는 고평의 왕희가 음식은 섞어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어 이것과 꼭 같다. 그렇다면 희가 왕숙화의 이름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모두 그의 자를 부르므로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당시에는 재앙이 없더라도 오래 쌓이면 사람에게 병을 일으킨다. 평소 음식은 매번 알맞게 해야 하며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르고 숨이 짧아지거나 갑작스러운 병이 생긴다. 하지에서 추분까지는 기름진 음식과 떡·고깃국 같은 것을 적게 먹어야 한다. 이런 것은 술·음식·오이와 과일과 서로 방해한다. 당시에 반드시 곧 병들지는 않지만 가을에 들어 절기가 바뀌고 양이 줄며 음이 자라 한기가 한꺼번에 이르면 갑자기 죽는 데까지 이르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여름을 지내며 찬 것을 지나치게 취하고 음식을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치를 모르는 자들은 모두 병이 이른 날을 곧 병을 받은 시작이라고 하면서 그 유래가 점진적이었음을 알지 못하니,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어람》 720 양생)!
又曰 : 王叔和性沉靜 , 好著述 。 考覈遺文 , 採摭群論 , 撰成 《 脈經 》 十卷 , 編次張仲景方論為三十六卷(有誤) , 大行於世( 《 御覽 》 七百二十二醫二按 : 宋熙寧林億等校定 《 脈經 》 進呈 。 札子云 : 叔和 , 西晉高平人 , 性度沉靖 , 尤好著述 , 博通經方 , 精意診處 , 洞識修養之道 。 其行事具唐甘伯宗 《 名醫傳 》 中 , 高湛此論猶較在前也 。 孫星衍 《 續古文苑 》 前條採入 , 後條失收 , 蓋偶疏略 。 又按 : 皇甫謐 《 甲乙 》 序稱 , 近代太醫令王叔和 , 撰次仲景遺論甚精 , 甘露中吾病風百日方治 , 乃撰集三部 , 是叔和著書在甘露前 。 但甘露即太始元年 , 士安不書曲午年號 , 豈稱近代謂吳之太醫邪 ? 而世通以叔和為晉人 , 蓋習讀億書故也 。 高湛論亦未明著時代也) 。
또 말하였다. 왕숙화는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저술을 좋아하였다. 남겨진 글을 고찰하고 여러 논의를 채집하여 《맥경》 열 권을 지었으며, 장중경의 방론을 편차하여 서른여섯 권으로 만들어(잘못이 있다)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어람》 722 의2. 살펴보건대 송나라 희녕 연간에 임억 등이 《맥경》을 교정하여 올렸다. 차자에서 숙화는 서진의 고평 사람으로 성품과 도량이 침착하고 고요하며 특히 저술을 좋아하고 경방에 널리 통달하며 진찰과 처치에 정성을 기울이고 수양의 도리를 깊이 알았다고 하였다. 그의 행적은 당나라 감백종의 《명의전》에 갖추어져 있는데 고담의 이 논의가 오히려 그보다 앞선다. 손성연의 《속고문원》에서는 앞 조목은 채집하여 넣고 뒤 조목은 빠뜨렸으니 우연히 소략했던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황보밀의 《갑을》 서문에서는 근대의 태의령 왕숙화가 중경의 남겨진 논의를 매우 정밀하게 찬차하였으며, 감로 연간에 내가 풍병을 백 일 앓고서야 치료되어 이에 세 부를 찬집하였다고 하였으니 숙화가 책을 쓴 것은 감로 이전이다. 다만 감로는 곧 태시 원년인데 사안이 곡오의 연호를 쓰지 않았으니, 근대라고 한 것은 혹 오나라의 태의를 말한 것인가? 그런데 세상에서 모두 숙화를 진나라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대개 임억의 글을 익숙히 읽었기 때문이다. 고담의 논의에서도 시대를 분명히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