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褚澄遺書一卷 , 初得蕭氏父子護其石而其書始全 , 繼得僧義堪筆之紙而其書始存 , 今得則繼先鋟之木而其書始傳 , 亦可謂多幸矣 。 澄字彥道 , 河南陽翟人 , 宋武帝之甥 , 尚書左僕射湛之之子 , 廬江公主之夫 , 齊太宰侍中錄尚書公淵之弟 , 仁宋自駙馬都尉 , 遍歷清顯 , 仕齊至侍中顧右軍將軍 , 永明元年卒( 《 南史 》 云永元元年卒 , 誤也 。 )東昏侯立其女為皇后 , 追贈金紫光祿大夫 , 實永元元年 , 去其卒時已七十年矣 。 遺書題其贈官 , 豈蕭廣得其槨石 , 考之史傳而附題於前乎 ? 叨齊高帝愛子豫章王嶷 , 自江陵赴都得疾日臻 , 帝憂形於色 , 乃大赦天下 , 聞澄傳楊淳秘方 , 召澄治立愈 , 帝喜甚 , 擢澄左氏尚書以寵之 , 其守吳郡也 。 民有李道念 , 以公事至郡 , 澄遙見謂曰 :「 汝有奇疾 。」 道唸曰 :「 某得冷疾五年矣 。」 澄診其脈 , 曰 : 非冷也 , 由多食雞子所致 , 可煮蘇一斗服之 , 即吐物如升許 , 涎裹之動 , 抉涎出視 , 乃一雞雛 , 翅距已具而能走 。 澄曰 : 未也 , 盍服其餘藥從之 , 凡吐十三枚 , 疾乃瘳 , 其妙皆此類也 。 是書幽眇簡切 , 多前人所未發而豈徒哉 。 問子篇稱建平王 , 當是澄之妻之侄景素 , 其生子六 , 即延齡延年輩 。
이상 저징의 유서 한 권은 처음에 소씨 부자가 그 돌을 보호해주어 비로소 온전해졌고, 뒤이어 승려 의감이 종이에 써주어 비로소 보존되었으며, 이제 유계선이 나무판에 새겨주어 비로소 전해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운이 좋다고 하겠다. 저징의 자는 언도이고 하남 양책 사람이다. 송 무제의 생질이며 상서좌복야 담지의 아들이고 여강공주의 남편이며, 제나라 태재·시중·녹상서공 연의 아우이다. 송나라에 벼슬하여 부마도위에서 시작해 청요하고 현달한 관직을 두루 거쳤고, 제나라에서는 시중 겸 우군장군에 이르러 영명 원년에 죽었다. (『남사』가 영원 원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동혼후가 그의 딸을 황후로 세우고 그에게 금자광록대부를 추증한 해가 실로 영원 원년으로, 그가 죽은 때로부터 이미 70년이 지난 뒤이다. 유서에 추증된 관직을 적었으니, 소광이 곽의 돌을 얻은 뒤 역사와 전기를 상고하여 앞에 덧붙여 쓴 것인가? 제 고제의 사랑하는 아들 예장왕 억이 강릉에서 도성으로 오다가 병을 얻어 날로 심해졌다. 황제는 근심을 얼굴에 드러내고 이에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저징이 양순의 비방을 전수했다는 말을 듣고 불러 치료하게 하자 곧 나았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여 저징을 좌씨상서로 발탁하여 총애하였다. 그가 오군을 다스릴 때 이도념이라는 백성이 공무로 군에 왔다. 저징은 멀리서 보고 “너에게 기이한 병이 있다”라고 하였다. 도념은 “저는 냉병을 앓은 지 5년입니다”라고 하였다. 저징은 맥을 짚고 말하였다. “냉병이 아니다. 달걀을 많이 먹어서 생긴 것이니 차조기 한 말을 달여 먹어라.” 곧 한 되쯤 되는 물건을 토했는데 침으로 싸여 움직이고 있었다. 침을 헤쳐 꺼내보니 병아리 한 마리로, 날개와 발톱이 이미 갖추어져 달릴 수 있었다. 저징은 “아직 다 나오지 않았다. 남은 약을 마셔 뒤따라 나오게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모두 열세 마리를 토한 뒤에야 병이 나았다. 그의 신묘함은 모두 이와 같았다. 이 책은 깊고 미묘하며 간결하고 절실하여 앞사람이 밝히지 못한 내용이 많으니, 어찌 공연한 것이겠는가. 「문자」편에서 말한 건평왕은 저징 아내의 조카인 경소일 것이다. 그가 낳은 여섯 아들은 곧 연령·연년 등이다.
云嘉泰元年日南至甘泉寄士丁介跋 。
가태 원년 동짓날, 감천의 기사 정개가 발문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