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醫李君墓誌銘

嘉慶十年秋七月 , 名醫李君卒 。 卒之日 , 予家人兒女咸哀泣 。 湖中農人有泣於路者 , 皆君所活也 。 先是閏月 , 予子女及子婦病 , 瀕於危 , 君活之 。 距君之卒 , 止一月 。 君諱炳 , 字振聲 , 號曰西垣 , 儀徵縣人 , 幼習三世之書 , 苦不能得其蘊 , 乃學易 , 十年而有得 。 曰 : 治病之要 , 不外陰陽消息而已 , 陽生陰死 , 醫為人求其生 , 故必使陽長而陰消 , 用寒涼峻厲 , 則傷其元 , 惟陽主通 , 汗吐下所以亨也 。 利者 , 義之和 , 其德在秋 , 火亢必有以和之 。 火齊白虎 , 所以和也 。 用陰以輔陽 , 非用以伐陽 , 貞元相續 , 而天行所以不已也 。 時予有說 《 易 》 之書 , 謂 《 易 》 之當位 , 即岐伯所云當位 。 君見之 , 欣然曰 : 醫理在易 , 先生可與言醫矣 。 君又曰 : 帝出乎震 , 震為木 , 木者人之所以始也 。 肝膽之氣存則生 , 消則死 , 俗醫嫉肝木如寇仇 , 務制而勝之 。 生氣乃日損 , 而人壽益促 , 君尤所自得者 。 曰 : 肝之本在右 , 而行於左 , 學者駭其言 , 多攻之 。 歙人汪彥超 , 為舉一證曰 : 秦越人書 , 謂肝七葉 , 左三右四 , 右羸其一 , 斯為本乎 。 予亦舉為兩證 , 曰 : 肝為乙木 , 乙為庚妻 , 妻必從夫 , 宜其本在右 。 鄭康成之莊周禮疾醫也 , 言肝氣涼 , 肺氣熱 。 賈公彥申其說 , 云肝在心下近右 , 其氣當秋 , 是肝右之說 , 不始自君矣 。 然予驗之十數年 , 凡右脅痛者 , 君以甘緩之 , 和以芍藥 , 無不應手痊 。 治肺必劇 , 乃知君以積驗得之 。 真能發前人所未言 , 可為後世法也 。 彼攻者 , 烏足以知之 。 君苦 《 金匱 》 無善注 , 乃撰 《 金匱要略 》 注二十二卷 , 能抉其微 , 錄生平治驗之案 , 為西垣診籍 。 惡吳又可 《 瘟疫論 》 之惑人也 , 作 《 辨疫瑣言 》 以糾之 。 謂大黃治疫 , 本於邪律楚材 , 又可竊之 。 而不知其義 , 妄造達原飲 , 用草果 、 黃芩以剝人生氣 , 且疫為陰濁 , 入人口鼻 , 當以芳香勝之 。 立清氣飲 , 用大黃有漬法 , 釀法 , 同煮 , 略煮諸法 , 取其氣而不取其味 , 意尤造於微 。 嗚乎 ! 習醫者多不通經 , 或有假經語以為緣飾者 , 又莫能發其精微以會通於神農黃帝之旨 。 自宋金元明以來 , 能好學深思 , 心知其意者 , 其惟君乎 。 君卒年七十七 , 遺孤止二歲 。 是年九月 , 葬君於蜀岡之陰 。 君為貧人賤士治疾 , 必竭盡心力 , 寒暑莫夜 , 聞召即行 。 而短於伺候富室顯者 , 故身後無餘財 。 胸有定見 , 不善隨眾浮沉 , 病已則戒勿藥 , 不屑以調理為名 , 奔走射利 。 或制一方 , 令服百劑數十劑 , 不更增損 , 均與世俗醫相反 。 而識者遂稀 , 至於生死在呼吸之際 , 人攻君補 , 人塞君通 , 人寒君熱 , 以口舌爭之而不足 , 以身名性命 , 誓而決之 , 手調其藥 , 而坐驗其啜 , 不效不已 , 及其愈也 。 所報或無一錢 , 君以為快 。 嘗往來吳越荊楚之間 , 所交落落 , 然而談論風采 , 間者好之 。 說醫之文 , 簡而有法 , 間為詩歌 , 不甚溺也 。 予既錄其診籍 , 為 《 李翁醫記 》, 復述其生平梗概 , 及學之所得 , 以垂於石銘 。 曰 : 惟人思之 , 知君術之神 。 惟人嫉之 , 知君學之真 。 財利所在 , 護之他人 , 拙於求富 , 巧於濟貧 。 人喜用克 , 君獨以春 , 贈以陽和 , 不殺而仁 , 每乘舴艋 , 泛我湖漘 。 囊中有帙 , 指奧而醇 , 人驚論創 , 實中於倫 , 為語學者 , 維茲有津 , 問而師之 , 以保庶民 。
가경 10년 가을 칠월에 명의 이군이 세상을 떠났다. 돌아간 날 우리 집안의 어른과 아이가 모두 슬피 울었고 호수 지방의 농민 가운데 길에서 우는 이들도 있었으니 모두 군이 살린 사람들이었다. 앞서 윤달에 내 아들과 딸과 며느리가 위태로울 만큼 병들었는데 군이 살려 주었다. 군이 세상을 떠나기 겨우 한 달 전이었다. 군의 휘는 병이고 자는 진성이며 호는 서원으로 의징현 사람이다. 어려서 삼세의 책을 익혔으나 깊은 뜻을 얻지 못함을 괴로워하여 『주역』을 배운 지 십 년 만에 터득하였다. 그는 ‘병을 치료하는 요체는 음양의 소식 밖에 있지 않다. 양은 생이고 음은 사이다. 의사는 사람을 위하여 삶을 구하므로 반드시 양은 자라고 음은 사라지게 해야 한다. 차고 서늘하며 준렬한 약을 쓰면 그 근원을 상한다. 오직 양이 통함을 주관하니 한·토·하는 형통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의의 조화이며 그 덕은 가을에 있다. 화가 지나치면 반드시 조화시킬 것이 있어야 한다. 화제와 백호탕은 조화시키는 방법이다. 음을 써서 양을 돕는 것이지 양을 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다. 정과 원이 서로 이어지므로 하늘의 운행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당시 나에게 『주역』을 풀이한 책이 있었는데 『주역』의 당위가 곧 기백이 말한 당위라고 하였다. 군은 이를 보고 기뻐하며 ‘의리는 역에 있으니 선생과 의술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제는 진에서 나오고 진은 목이다. 목은 사람이 시작되는 근원이다. 간담의 기가 있으면 살고 사라지면 죽는다. 속의들은 간목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제어하고 이기는 데 힘쓰므로 생기가 날로 손상되고 사람의 수명은 더욱 줄어든다’고 하였다. 군이 특히 스스로 터득한 것은 ‘간의 근본은 오른쪽에 있고 왼쪽으로 운행한다’는 말이다. 학자들은 놀라서 많이 공격하였다. 흡현 사람 왕언초는 한 증거를 들어 ‘진월인의 책에 간은 일곱 잎이며 왼쪽 셋, 오른쪽 넷이라 하였으니 오른쪽에 하나가 더 있는 것이 근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도 두 증거를 들었다. 간은 을목이고 을은 경의 아내이므로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하니 근본이 오른쪽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 또 정강성이 『주례』의 질의를 주석하며 간기는 서늘하고 폐기는 뜨겁다고 하였고, 가공언은 이를 펴서 간은 심 아래 오른쪽 가까이 있으며 그 기는 가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간이 오른쪽에 있다는 말은 군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십여 년 경험해 보니 오른쪽 옆구리가 아픈 사람에게 군이 단맛으로 누그러뜨리고 작약으로 조화시키면 손을 대는 대로 낫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폐를 치료하면 반드시 심해졌으니 군이 경험을 쌓아 얻었음을 알았다. 참으로 앞사람이 말하지 못한 것을 밝힐 수 있어 후세의 법이 될 만하다. 공격하는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군은 『금궤』에 좋은 주석이 없음을 괴로워하여 『금궤요략』 주석 22권을 지어 미묘한 뜻을 파헤쳤다. 평생 치료하여 효험을 본 의안을 기록하여 『서원진적』이라 하였다. 오우가의 『온역론』이 사람을 현혹하는 것을 싫어하여 『변역쇄언』을 지어 바로잡았다. 그는 대황으로 역을 치료한 것은 야율초재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우가가 훔치고도 그 뜻은 알지 못하여 함부로 달원음을 만들고 초과·황금으로 사람의 생기를 깎아 낸다고 하였다. 또 역은 음탁하여 사람의 입과 코로 들어오므로 방향성으로 이겨야 한다며 청기음을 세웠다. 대황을 쓰는 데에도 담그는 법·빚는 법·함께 끓이는 법·잠깐 끓이는 법 등이 있어 맛을 취하지 않고 기를 취하였으니 뜻이 특히 정미한 경지에 이르렀다. 아, 의술을 익히는 사람은 대부분 경전에 통하지 않고, 경전의 말을 빌려 꾸미는 이가 있더라도 그 정미함을 밝혀 신농과 황제의 뜻에 회통시키지 못한다. 송·금·원·명 이래 배우기를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으로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오직 군일 것이다. 군은 일흔일곱에 죽었고 남긴 어린 아들은 겨우 두 살이었다. 그해 구월에 촉강의 북쪽에 장사하였다. 군은 가난한 사람과 지위 낮은 선비의 병을 치료할 때 반드시 마음과 힘을 다하였으며, 춥거나 덥거나 저물거나 밤이거나 부르면 곧 갔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집안을 비위 맞추어 섬기는 데에는 서툴렀으므로 사후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가슴에 정견이 있어 무리를 따라 부침하지 못했고 병이 나으면 약을 먹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조리한다는 명목으로 돌아다니며 이익을 좇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한 처방을 만들어 백 첩이나 수십 첩을 먹게 하면서 더하거나 빼지 않으니 모두 세속 의사와 반대였다. 그래서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삶과 죽음이 숨 한 번 사이에 있을 때 남이 공격하면 군은 보하고, 남이 막으면 군은 통하게 하며, 남이 차게 하면 군은 덥혔다. 말로 다투는 것으로 부족하면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맹세하여 결정하고, 손수 약을 조절하며 앉아서 마시는 것을 지켜보아 효과가 없으면 그치지 않았다. 나은 뒤 보답이 한 푼도 없는 경우가 있어도 군은 기쁘게 여겼다. 일찍이 오월과 형초 사이를 오갔으며 사귄 사람은 드물었으나 그의 담론과 풍채를 들은 사람은 좋아하였다. 의술을 말한 글은 간결하고 법도가 있었고 간혹 시가를 지었으나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그의 진료 기록을 모아 『이옹의기』를 만들었고, 다시 생애의 개요와 학문에서 얻은 바를 적어 돌에 새겨 전한다. 명은 이렇다. 사람들이 그리워함으로 군의 의술이 신묘함을 알며, 사람들이 시기함으로 군의 학문이 참됨을 안다. 재물과 이익이 있는 곳은 남에게 맡기고 부를 구하는 데 서투나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데 능하였다. 사람들은 극제하기를 즐기지만 군은 홀로 봄으로써 양화의 기운을 주어 죽이지 않고 어질었다. 늘 작은 배를 타고 우리 호숫가에 떠다녔다. 주머니에는 책이 있어 가리키는 뜻이 깊고 순수하였다. 사람들은 논설이 새롭다고 놀랐으나 실제로 이치에 들어맞았다. 배우는 이들에게 말하노니 여기에 나루가 있으니 묻고 스승으로 삼아 백성을 보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