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蓮芳茂才 , 少與余共筆硯 , 後以童軍屢蹶 , 商於楚 。 後失業歸 , 復矢志功名 , 遂入縣癢 。 蓮芳少失怗恃 , 三娶而仍鰥 , 煢無子嗣 。 丙辰余自京歸 , 已敗累矣 。 以憂鬱故 , 腿漸廢 , 目漸瞀 。 然步履出入 , 尚可作字 , 憫其貧 , 攜之入秦 , 經理館事 。 繼 , 余以內艱旋里 , 念蓮芳無依 , 因薦於朝邑主薄馮子安作幕 , 馮亦同鄉 , 又雜職 , 蓮芳雖非素優 , 然小心持算 , 無不井井有條 , 賓東相得 。 而蓮芳私念年逾五旬 , 妻子全無 , 顧影增淒 , 倍形憂鬱 , 明年秋 , 單車而歸 。 余以為賓東不合 , 急視之 , 則蓮芳兩目起外翳 , 腿遲重不可曲伸 , 且馮以缺瘠告病 , 不得不歸矣 。 因求余治其目與腿 。 余診之 , 心肝弦急 , 兩尺似有似無 。 倉卒難顯言 , 因勸曠懷自慰 , 病非旦夕可療 , 靜心凋攝數月 , 再作計議 。 蓮芳聽之 , 而家計寥寥 , 益不自釋 , 目益盲 , 腿益滯 。
무재 이연방은 젊어서 나와 함께 공부하였으나 뒤에 동군(童軍)에서 거듭 실패하여 초 땅에서 장사하였다. 생업을 잃고 돌아와 다시 공명에 뜻을 두고 마침내 현학에 들어갔다. 연방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고 세 번 장가들고도 홀아비로 지냈으며 외로이 자식도 없었다. 병진년 내가 서울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쇠약하였다. 근심과 울적함으로 다리는 점차 못 쓰게 되고 눈은 점차 어두워졌으나, 아직 걸어 다니며 글씨를 쓸 수는 있었다. 가난함을 불쌍히 여겨 진 땅으로 데려가 숙소의 일을 맡겼다. 이어 내가 모친상으로 고향에 돌아가면서 연방이 의지할 데 없음을 생각해 조읍 주부 풍자안의 막객으로 천거하였다. 풍도 동향 사람이며 잡직이었다. 연방은 평소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조심스럽게 계산하여 모든 일을 질서 있게 처리하였으므로 주인과 손님이 서로 잘 맞았다. 그러나 연방은 쉰이 넘도록 아내와 자식이 전혀 없는 것을 속으로 생각하며 제 그림자를 돌아보고 더욱 서글퍼하여 근심이 배가되었다. 이듬해 가을 수레 한 대로 돌아왔다. 나는 주인과 맞지 않는 줄 알고 급히 보러 갔더니 두 눈에 외예가 생기고 다리가 굼뜨고 무거워 굽히거나 펴지 못하였다. 또 풍은 맡은 자리가 궁벽하여 이익이 적으므로 병을 핑계로 물러나 부득이 돌아온 것이었다. 이에 눈과 다리를 치료해 달라고 하였다. 진찰하니 심·간맥이 현급하고 두 척맥은 있는 듯 없는 듯하였다. 갑자기 드러내 말하기 어려워 마음을 넓게 갖고 스스로 위로하라고 권하며 “병은 하루아침에 치료할 수 없으니 마음을 고요히 하고 몇 달 조섭한 뒤 다시 의논합시다”라고 하였다. 연방은 따랐으나 살림이 막막하여 더욱 스스로 풀지 못하였고 눈은 더욱 멀고 다리는 더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