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芝田先生 , 崞縣人 , 以名進士出宰陝西 , 後升榆林觀察 , 以榆林地瘠 , 故在省遙領之 。 觀察素豪於飲 , 以酒積得吐血疾 。 余在省候補 , 一日招余往視其病 , 談及其病 , 觀察曰 : 吐血數年矣 , 遇鬱益甚 。 已更十數醫 。 或曰思慮傷脾 ; 或曰暴怒傷肝 ; 或曰血熱妄行 。 或效或否 , 而終未拔其根 , 可為吾一治也 。 余見其氣體魁偉 , 面色紅潤 , 食飲兼人 , 知非虛證 。 為一診之 , 則左部沉實 , 非病脈 , 右關沉弦而數 。 乃告曰 , 大人乃有餘病 , 非不足病也 。 如思慮傷脾 , 則當忡怔健忘驚悸 ; 如血熱妄行 , 則當身熱發渴 , 頭暈目眩 ; 如暴怒傷肝 , 則當兩脅膨脹 , 胸膈不開 , 兼發嘔逆 。 今無此諸證 , 則前醫皆誤也 。 以愚見參之 , 必是濕熱內淫 。 熱能瘀血 , 故所吐必血色紫黯 , 且時而成塊 。 胃口多患刺痛 , 小便常赤 , 大便艱澀 , 時亦帶血 。 觀察曰 , 語語不謬 , 當作何治 ? 余曰 : 先以葛花解酲湯清其胃 , 繼用枳朮胃苓丸行其瘀 。 再飲食淡泊以調之 , 不過一月 , 保不再犯矣 。 觀察如言調攝 。 廿日而安 。 後觀察內艱歸里 , 以清風兩袖 , 主講吾汾之西河書院 。 余亦以內艱歸籍 。 相隔六十里 , 文字往還甚密 。
무지전 선생은 곽현 사람으로 이름난 진사로서 섬서의 수령이 되었고 뒤에 유림 관찰로 승진하였다. 유림은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성에서 멀리 관할하였다. 관찰은 평소 술을 호쾌하게 마셨는데 주적으로 토혈병을 얻었다. 내가 성에서 후보로 있을 때 하루는 나를 불러 병을 보게 하였다. 병 이야기가 나오자 관찰이 “피를 토한 지 몇 년 되었고 울적한 일을 만나면 더욱 심합니다. 이미 의사를 십수 명 바꾸었습니다. 어떤 이는 사려로 비를 상하였다고 하고, 어떤 이는 갑작스러운 노여움으로 간을 상하였다고 하며, 어떤 이는 혈열로 피가 함부로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효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으나 끝내 뿌리를 뽑지 못하였으니 나를 한번 치료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기력과 체격이 웅장하고 얼굴빛이 붉고 윤택하며 음식도 보통 사람의 두 배를 먹는 것을 보고 허증이 아님을 알았다. 진맥하니 왼쪽은 침실하여 병맥이 아니고 우관은 침현하면서 삭하였다. 이에 말하였다. “대인께서는 유여병이지 부족병이 아닙니다. 사려로 비를 상하였다면 가슴 두근거림·건망·경계가 있어야 하고, 혈열로 피가 함부로 흐른다면 몸에 열이 나고 목마르며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해야 합니다. 갑작스러운 노여움으로 간을 상하였다면 양쪽 옆구리가 부풀고 가슴과 횡격막이 트이지 않으며 구역도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이런 증상이 전혀 없으니 앞선 의사들은 모두 잘못하였습니다. 제 어리석은 견해로 참작하면 반드시 습열이 안으로 스며든 것입니다. 열은 피를 어혈지게 하므로 토하는 피는 반드시 자줏빛으로 어둡고 때로 덩어리를 이룰 것입니다. 위구가 자주 찌르듯 아프고 소변은 늘 붉으며 대변은 보기 어렵고 때로 피도 섞일 것입니다.” 관찰이 “한마디도 틀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치료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먼저 갈화해정탕으로 위를 맑히고 이어 지출위령환으로 어혈을 운행시킨 뒤 담박한 음식으로 조리하면 한 달 안에 다시 발작하지 않을 것을 보장합니다”라고 하였다. 관찰이 말대로 조섭하여 스무 날 만에 편안해졌다. 뒤에 관찰이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청렴하여 두 소매에 맑은 바람뿐이었으므로 우리 분 땅의 서하서원에서 강학을 맡았다. 나도 모친상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서로 육십 리 떨어져 있었으나 글을 주고받는 일이 매우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