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高曾祖 , 世業岐黃 , 至先祖儀亭公而名尤噪 , 蘭垣方數十里內 , 活人無算 , 咸稱之為 「 朱三爺 」, 蓋彼時蘭州城小 , 居眾亦不多也 。 猶憶家之南廳懸有涼州教諭孫壽山題贈匾額一方 , 文為 「 丹溪品望 」, 嗣配劉永析先生撰書板朕一幅 , 文日 :「 承家有柏廬格言 , 垂老不忘修己法 ; 救世守椿庭遺教 , 畢生能讀活人書 。」 岩兒時嘗聞先君述及先祖為人治病之狀 : 診脈必反復再三 , 遣藥則審慎斟酌 , 用量即分釐不苟 , 遇邀診 , 雖丙夜必往 , 以未能就診者多屬重症也 , 診次 , 必囑病家務將藥後症狀見告 , 歸家後 , 恆眠竟夜不安枕 , 晨明 , 即傾聽釦環之輕重以判病者之安危 , 其視病者若己之病也如此 。 高祖王父 , 年遠闕聞 ; 惟家之北堂亦懸有甘肅桌司鄧承偉鳴謝先曾祖序東公之匾額 , 題曰 :「 年高德邵 」, 並敘其來蘭前屢有子而屢殤於痘 , 遇痘症則闔家惴惴 , 主篆蘭垣後 , 又有子病痘 , 及延先曾祖而活之之狀於後 , 稱先曾祖為 「 蘭之有道君子 」, 堂東西側系鄧氏撰贈之板聯 , 文為 :「 笑我雪盈顛 , 甚望兒曹娛白髮 ; 是誰春在手 , 竟從人海遇丹溪 。」 是先曾祖亦蘭垣醫之巨擘也 。 此稿乃先曾祖診余閱讀 《 醫學心悟 》 時眉端所記 , 先祖亦有補記 , 約成於清咸豐至光緒間 , 原作於孫習醫繩墨 , 未敢炫術示人 , 世代讀誦 , 書角為圓 , 眉顛字跡已多不可辨識 , 為兔年久湮沒 , 恭謹整錄 , 其闕奪難辨處 , 由岩逐一揣摩校補 , 如有訛謬 , 乃岩之過 , 非原記有誤也 。 顏曰 《 醫學心悟雜症要義 》。 復恐貽人以炫示之誚 , 蛛網塵封者垂三十年 。 轉念活人之術 , 韞櫝而藏 , 何如公諸於世 , 尚可獲匡謬補闕之得 , 又何憾焉 ! 爰商之甘肅中醫學院鄭元成館長 , 復蒙中醫古籍出版社傅景華社長鼎力支持 , 得以刊行 , 古道熱腸 , 歿存銘感 , 倘有能為同道參酌以資涓埃之助者 , 何幸如之 。
돌아가신 고조부와 증조부께서는 대대로 의업을 이어 왔으며, 조부 의정공에 이르러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난주 성 안팎 수십 리에서 살린 사람이 헤아릴 수 없어 모두 ‘주삼야’라고 불렀으니, 당시 난주성은 작고 거주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 남쪽 대청에는 양주 교유 손수산이 써서 준 ‘단계품망’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뒤이어 유영석 선생이 짓고 쓴 판련 한 폭을 곁들였는데, 글은 ‘가업을 이음에 백려의 격언이 있으니, 늙어서도 몸을 닦는 법을 잊지 않네. 세상을 구함에 부친의 유훈을 지켜, 평생 사람 살리는 책을 읽을 수 있네’라고 하였다. 나는 어릴 때 선친께서 조부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시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맥을 짚을 때에는 반드시 거듭 살피고, 약을 낼 때에는 신중히 헤아렸으며, 용량은 분과 리에 이르기까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왕진을 청하면 한밤중이라도 반드시 갔으니, 진찰받으러 오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중증이었기 때문이다. 진찰할 때에는 반드시 약을 먹은 뒤의 증상을 알려 달라고 환자 집에 당부하였고, 집에 돌아오면 늘 밤새 편히 잠들지 못하였다. 날이 밝으면 문고리를 두드리는 소리의 강약에 귀를 기울여 환자의 안위를 가늠하였으니, 환자의 병을 자기 병처럼 여기심이 이와 같았다. 고조부에 관해서는 세월이 오래되어 전해 듣지 못하였다. 다만 집 북쪽 대청에도 감숙 탁사 등승위가 증조부 서동공께 감사하여 보낸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나이가 높고 덕이 높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뒤에는 난주에 오기 전 여러 차례 아들을 두었으나 번번이 두창으로 잃어, 두창이 생기면 온 집안이 두려워하였는데, 난주에서 관직을 맡은 뒤 또 아들이 두창을 앓자 증조부를 모셔 와 살렸다는 경위를 적고, 증조부를 ‘난주의 도를 갖춘 군자’라 일컬었다. 대청 동서쪽에는 등씨가 지어 준 판련이 있었는데, ‘내 머리 가득 눈이 쌓인 것을 웃으며, 자식들이 백발의 나를 즐겁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그 누구의 손에 봄이 있어, 끝내 사람들 가운데서 단계를 만났는가’라고 하였다. 이로 보건대 증조부 역시 난주 의가의 거벽이었다. 이 원고는 증조부께서 진료한 틈에 《의학심오》를 읽으며 책 위쪽 여백에 적은 것이며, 조부께서도 덧붙여 기록하였다. 대략 청나라 함풍에서 광서 연간에 이루어졌으며, 본래 자손들이 의학을 배우는 준칙으로 삼고자 한 것이어서 감히 의술을 자랑하며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대대로 읽어 책 귀퉁이가 둥글어지고 위쪽 여백의 글씨는 이미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많아졌다. 오래되어 사라지는 일을 피하고자 삼가 정리하여 옮겼으며, 빠지거나 알아보기 어려운 곳은 내가 하나씩 헤아려 교정하고 보충하였다. 오류가 있다면 나의 잘못이지 원래 기록의 잘못이 아니다. 제목은 《의학심오잡증요의》라 하였다. 다시 자랑하여 보인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거미줄과 먼지 속에 묻어 둔 지 거의 30년이 되었다. 생각을 돌이켜 보니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상자에 넣어 감춰 두기보다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잘못을 바로잡고 빠진 것을 보충받을 수도 있으니 또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이에 감숙중의학원 정원성 관장과 의논하고, 다시 중의고적출판사 부경화 사장의 힘찬 지원을 받아 간행하게 되었다. 옛 도의를 지키는 따뜻한 마음에 죽어서나 살아서나 깊이 감사한다. 만일 동도들이 참작하는 데 티끌만 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朱太岩謹述
주태암이 삼가 쓰다.
時年七十五歲
이때 나이 75세였다.
一九九一年春
1991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