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脈者 , 本乎營與衛也 , 而營行於脈之中 , 衛行於脈之外 。 苟臟腑和平 , 營衛調暢 , 則脈無形狀之可議矣 。 或者六淫外襲 , 七情內傷 , 則臟腑不和 , 營衛乖謬 , 而二十四脈之名狀 , 層出而疊見矣 。 是故風寒暑濕燥火 , 此六淫也 , 外傷六淫之脈 , 則浮為風 , 緊為寒 , 虛為暑 , 細為濕 , 數為燥 , 洪為火 , 此皆可以脈而別其外感之邪也 。 喜怒憂思悲恐驚者 , 此七情也 , 內傷七情之脈 , 喜則傷心而脈緩 , 怒則傷肝而脈急 , 恐則傷腎而脈沉 , 悲則氣消而脈短 , 驚則氣亂而脈動 , 此皆可以脈而辨其內傷之病也 。 然此特舉其常 , 而以脈病相應者為言也 。 若論其變 , 則有脈不應病 , 病不應脈 , 變出百端 , 而難一一盡憑乎脈者矣 。 試舉一二言之 , 如張仲景云 : 脈浮大 , 邪在表 , 為可汗 。 若脈浮大 , 心下鞕 , 有脈屬臟者 , 攻之 , 不令發汗 , 此又非浮為表邪可汗之脈也 。 又云 : 促脈為陽盛 , 宜用葛根黃芩黃連湯 。 若脈促厥冷為虛脫 , 非灸非溫不可 , 此又非促為陽盛之脈也 。 又曰 : 遲脈為寒 , 沉脈為里 。 若陽明脈遲 , 不惡寒 , 身體濈濈汗出 , 則用大承氣 , 此又非諸遲為寒之脈矣 。 少陰病 , 始得之 , 反發熱而脈沉 , 宜麻黃附子細辛湯汗之 , 此又非沉為在裡之脈矣 。 凡此皆脈難盡憑之明驗也 。 若只憑脈而不問證 , 未免以寒為熱 , 以表為里 , 以陰為陽 , 顛倒錯亂 , 而夭人壽者多矣 。 是以古人治病 , 不專於脈 , 而必兼於審證 , 良有以也 。 奈何世人不明乎此 , 往往有病 , 諱而不言 , 惟以診脈而試醫之能否脈之 , 而所言偶中 , 便視為良醫 , 而傾心付託 , 其於病之根源一無所告 , 藥之宜否亦無所審 , 惟束手聽命於醫 , 因循遂至於死 , 尚亦不悟 , 深可悲矣 。 彼庸俗之人 , 素不嗜學 , 固無足怪 。 奈近世士大夫家 , 亦未免狃於此習 , 是又大可笑也 。 夫定靜安慮 , 格物致知 , 乃 《 大學 》 首章第一義 , 而慮者謂慮事精詳 , 格物者謂窮致事物之理 , 致知者謂推及吾之所知 。 凡此數事 , 學者必嘗究心於此矣 。 先正又言 , 為人子者不可不知醫 。 病臥於床 , 委之庸醫 , 比之不慈不孝 。 夫望聞問切 , 醫家大節目也 。 苟臨病之際 , 惟以切而知之為能 , 其餘三事 , 一切置而不講 , 豈得謂知醫乎 ! 豈得為處事精詳乎 ! 豈得為窮致事物之理 , 而惟極吾之所知乎 ! 且醫之良 , 亦不專於善診一節 。 凡動靜有常 , 舉止不妄 , 存心忠厚 , 發言純篤 , 察病詳審 , 處方精專 , 兼此數者庶可謂之良矣 。 雖據脈言證 , 或有少差 , 然一脈所主非一病 , 故所言未必盡中也 。 若以此而遂棄之 , 所謂以二卵而棄干城之將 , 烏可與智者道哉 ? 姑以浮脈言之 ,《 脈經 》 云 : 浮為風 、 為虛 、 為氣 、 為嘔 、 為厥 、 為痞 、 為脹 、 為滿 、 為不食 、 為熱 、 為內結等類 , 所主不下數十餘病 。 假使診得浮脈 , 彼將斷其為何病耶 ? 苟不兼之以望聞問而欲的知其為何病 , 吾謂戛戛乎其難矣 。 古人以切居望聞問之後 , 則於望聞問之間 , 已得其病情矣 。 不過再診其脈 , 看病應與不應也 。 若脈與病應 , 則吉而易醫 ; 脈與病反 , 則凶而難治 。 以脈參病 , 意蓋如此 , 曷以診脈知病為貴哉 ? 夫 《 脈經 》 一書 , 拳拳示人以診法 , 而開卷入首 , 便言觀形察色 , 彼此參伍 , 以決死生 。 可見望聞問切 , 醫之不可缺一也 。 噫 ! 世稱善脈莫過叔和 , 尚有待於彼此參伍 , 況下於叔和者乎 ! 故專以切脈言病 , 必不能不致於誤也 , 安得為醫之良 ? 抑不特此 , 世人又有以太素脈而言人貴賤窮通者 , 此又妄之甚也 。 予嘗考其義矣 , 夫太者始也 、 初也 , 如太極太乙之太 ; 素者質也 、 本也 , 如繪事後素之素 。 此蓋言始初本質之脈也(破的語) 。 此果何脈耶 , 則必指元氣而言也 。 東垣曰 : 元氣者 , 胃氣之別名 。 胃氣之脈 , 蔡西山所謂不長不短 , 不疏不數 , 不大不小 , 應手沖和 , 意思欣欣 , 難以名狀者是也 。 無病之人 , 皆得此脈 。 以此脈而察人之有病無病則可 , 以此脈而察人之富貴貧賤則不可 。 何也 ? 胃氣之脈 , 難以形容 , 莫能名狀 , 將何以為貴賤窮通之診乎 ! 竊觀其書名雖 《 太素 》, 而其中論述 , 略無一言及於太素之義 。 所作歌括 , 率多俚語 , 全無理趣 。 原其初意 , 不過托此以為徼利之媒 , 後世不察 , 遂相傳習 , 莫有能辨其非者 。 又或為之語曰 : 太素云者 , 指貴賤窮通 , 稟於有生之初而言也 。 然脈可以察而知之 , 非謂脈名太素也 。 予曰 : 固也 。 然則 《 太素 》 之所診者 , 必不出於二十四脈之外矣 。 夫二十四脈皆主病言 , 一脈見則主一病 , 貧賤富貴何從而察之哉 ? 假如浮脈其診為風 , 使太素家診之將言其為風耶 ? 抑言其為貴賤窮通耶 ? 二者不可得兼 。 若言其為風 , 則其所知亦不過病也 。 若遺其病而言其為貴賤窮通 , 則是近而病諸身者尚不能知 , 安得謂之太素 ? 則遠而違諸身者必不能知之也 。 蓋貴賤窮通 , 身外之事 , 與身之血氣了不相干 , 安得以脈而知之乎 ? 況脈之變見無常 , 是以今日診得是脈 , 明日診之而或非 。 春間診得是脈 , 至夏按之而或否 。 彼太素者以片時之尋按 , 而斷一生之休咎 , 殆必無是理 。 然縱使億則屢中 , 亦是捕風捉影 , 彷彿形容 , 安有一定之見哉 。 噫 ! 以脈察病尚不知病之的 , 而猶待乎望聞問 , 況能知其他乎 ? 且脈兆於岐黃 , 演於秦越 , 而詳於叔和 , 遍考 《 素 》、《 難 》、《 脈經 》, 並無一字言及此者 , 非隱之也 , 殆必有不可誣者耳 。 巢氏曰 : 太素者 , 善於相法 , 特假太素以神其術耳 。 誠哉言也 , 足以破天下後世之惑矣 。 又有善伺察者 , 以言甜人 , 陰得其實 , 故於診按之際 , 肆言而為欺妄 , 是又下此一等 , 無足論也 。 雖然人稟天地之氣以生 , 不能無清濁純駁之殊 。 稟之清者 , 血氣清而脈來亦清 , 清則脈形圓淨 , 至數分明 。 吾診乎此 , 但知其主富貴而已 。 若曰何年登科 , 何年升授 , 何年招財 , 何年得子 , 吾皆不得而知矣 。 稟之濁者 , 血氣濁而脈來亦濁 , 濁則脈形不清 , 至數混亂 。 吾診乎此 , 但知其主貧賤而已 。 若曰某時招財 , 某時破財 , 某時損妻 , 某時克子 , 吾亦莫得而知矣 。 又有形濁而脈清者 , 此謂濁中之清 ; 質清而脈濁者 , 此謂清中之濁 。 又有形不甚清 , 脈不甚濁 , 但浮沉各得其位 , 大小不失其等 , 亦主平穩而無大得喪也 。 其他言有所未盡 , 義有所未備 , 學者可以類推 。 是則吾之所謂知人者 , 一本於理而已矣 , 豈敢妄為之說以欺人哉 ! 噫 , 予所以著為是論者 , 蓋以世之有言太素脈者 , 靡不翕然稱美 , 不惟不能以理析 , 又從而延譽於人 , 縱使其言有謬 , 又必陰與之委曲影射 , 此所謂誤己而誤人者也 , 果何益之有哉 ? 又有迎醫服藥者 , 不惟不先言其所苦 , 甚至再三詢叩 , 終於默默 , 至有隱疾而困醫者 , 醫固為其所困 , 不思身亦為醫所困矣 。 此皆世之通患 , 人所共有 , 故予不得不詳論之 , 以致夫丁寧之意 , 俾聾瞽者或有所開發焉 。 孟子曰 : 予豈好辯哉 , 予不得已也 。
맥은 영과 위에 근본을 두며, 영은 맥 안을 운행하고 위는 맥 밖을 운행한다. 장부가 화평하고 영위가 조화롭게 펴지면 맥에 논할 만한 특이한 형상은 없다. 육음이 밖에서 습격하고 칠정이 안을 손상시키면 장부가 조화롭지 못하고 영위가 어긋나 스물네 맥의 이름과 모습이 거듭 나타난다. 풍·한·서·습·조·화는 육음이다. 밖에서 육음에 상한 맥은 부이면 풍, 긴이면 한, 허이면 서, 세이면 습, 삭이면 조, 홍이면 화이니, 모두 맥으로 외감의 사기를 구별할 수 있다. 희·노·우·사·비·공·경은 칠정이다. 안에서 칠정에 상한 맥은 기쁨으로 심을 상하면 완하고, 노여움으로 간을 상하면 급하며, 두려움으로 신을 상하면 침하다. 슬픔으로 기가 소모되면 단하고 놀람으로 기가 어지러워지면 동하니, 모두 맥으로 내상의 병을 가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통상적인 경우만 들어 맥과 병이 서로 응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변화를 논하면 맥이 병에 응하지 않고 병이 맥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변화가 온갖 갈래로 나오므로, 하나하나 모두 맥에 의지하기는 어렵다.
한두 가지를 들어 말해 보자. 장중경은 ‘맥이 부대하면 사기가 표에 있으므로 땀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맥이 부대하고 심하가 단단하며 맥이 장에 속한 경우에는 공격하고 땀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부가 표사이므로 땀낼 수 있다는 맥이 아니다. 또 ‘촉맥은 양이 성한 것이므로 갈근황금황련탕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맥이 촉하고 궐랭하면 허탈이므로 뜸을 뜨고 따뜻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 이는 촉이 양성이라는 맥이 아니다. 또 ‘지맥은 한이고 침맥은 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양명병에서 맥이 지하고 오한이 없으며 몸에 땀이 줄줄 나면 대승기탕을 쓰니, 이는 모든 지맥이 한이라는 것이 아니다. 소음병이 처음 생겼을 때 도리어 열이 나고 맥이 침하면 마황부자세신탕으로 땀내야 하니, 이는 침이 리에 있다는 맥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맥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어렵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맥에만 의지하고 증을 묻지 않으면 한을 열로, 표를 리로, 음을 양으로 여겨 뒤집히고 어지러워져 사람의 수명을 일찍 끊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병을 치료할 때 맥에만 전념하지 않고 반드시 증을 살피는 일을 겸한 데는 참으로 까닭이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밝히지 못하여, 흔히 병이 있어도 숨기고 말하지 않은 채 오직 맥을 짚는 것으로 의사의 능력을 시험한다. 맥을 짚고 한 말이 우연히 들어맞으면 곧 좋은 의사로 여겨 마음을 다해 맡기면서, 병의 근원은 하나도 알려 주지 않고 약이 마땅한지도 살피지 않는다. 손을 놓고 의사의 명령만 따르다가 그대로 죽음에 이르러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니 깊이 슬픈 일이다. 용렬하고 속된 사람은 평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근세 사대부 집안도 이 습관에 익숙해진 것을 면하지 못하니, 이 또한 크게 웃을 일이다. 뜻을 정하고 고요해지고 편안해지고 생각하는 것, 격물하고 치지하는 것은 『대학』 첫 장의 첫째 뜻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일을 정밀하고 상세하게 헤아린다는 말이며, 격물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한다는 말이고, 치지는 내가 아는 바를 끝까지 미루어 넓힌다는 말이다. 이 몇 가지 일은 배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음을 다해 연구해 보았을 것이다. 선현은 또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의술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병들어 침상에 누웠는데 용렬한 의사에게 맡기는 것을 인자하지 못하고 효도하지 못한 데 비하였다. 망·문·문·절은 의가의 큰 절목이다. 병을 대할 때 절진으로 아는 것만을 능력이라 여기고 나머지 세 가지는 모두 버려 논하지 않는다면, 어찌 의술을 안다고 하겠는가! 어찌 일을 정밀하고 상세하게 처리한다고 하겠는가! 어찌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고 내가 아는 바를 극진히 한다고 하겠는가!
또 좋은 의사라는 것은 진맥을 잘하는 한 가지 일에만 달리지 않는다. 움직이고 고요함에 법도가 있고 거동이 망령되지 않으며, 마음 씀이 충후하고 말이 순박하고 독실하며, 병을 자세히 살피고 처방이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한다. 이 몇 가지를 겸해야 거의 좋은 의사라 할 수 있다. 맥에 근거하여 증을 말할 때 조금 차이가 있더라도 한 맥이 주관하는 병은 하나가 아니므로, 말이 반드시 모두 들어맞지는 않는다. 이를 이유로 곧 버린다면 이른바 달걀 두 개 때문에 나라를 지키는 장수를 버리는 것이니, 어찌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우선 부맥으로 말해 보자. 『맥경』에서는 부가 풍·허·기·구토·궐·비·창·만·불식·열·내결 등의 부류가 된다고 하여, 주관하는 것이 수십여 병에 이른다. 부맥을 진찰했다고 가정하면 무엇을 그 병이라고 단정하겠는가? 망진·문진·문진을 겸하지 않고 무슨 병인지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나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겠다. 옛사람은 절진을 망·문·문 뒤에 두었으므로, 망·문·문 사이에서 이미 병정을 파악한 것이다. 다시 맥을 진찰하는 것은 병과 응하는지 응하지 않는지 보려는 데 불과하다. 맥과 병이 응하면 길하여 치료하기 쉽고, 맥과 병이 반대이면 흉하여 치료하기 어렵다. 맥으로 병을 참고한다는 뜻은 이와 같은데, 어찌 진맥하여 병을 아는 것만 귀하게 여기겠는가? 『맥경』은 정성껏 사람에게 진찰법을 보여 주면서도, 책을 펼친 첫머리부터 형체를 보고 안색을 살펴 서로 대조하여 생사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망·문·문·절 가운데 의사가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아! 세상에서 맥에 능하기로 숙화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는데도 서로 대조하기를 기다렸으니, 하물며 숙화보다 못한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맥만 짚어 병을 말하면 반드시 잘못에 이르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좋은 의사라 하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태소맥으로 사람의 귀천과 궁달을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또 망령됨이 심한 것이다. 나는 그 뜻을 상고해 보았다. 태는 시작이고 처음이니 태극·태을의 태와 같고, 소는 바탕이고 근본이니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 뒤에 한다’는 소와 같다. 이는 처음의 본질적인 맥을 말하는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이것이 과연 어떤 맥인가 하면 반드시 원기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동원은 ‘원기는 위기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위기의 맥은 채서산이 말한 ‘길지도 짧지도 않고 드물지도 잦지도 않으며 크지도 작지도 않고, 손에 응하는 것이 조화로우며 뜻이 기쁘고 즐거워 이름 붙여 형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병이 없는 사람은 모두 이 맥을 얻는다. 이 맥으로 사람에게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필 수는 있지만, 부귀빈천을 살필 수는 없다. 어째서인가? 위기의 맥은 형용하기 어렵고 이름 붙여 나타낼 수 없는데, 무엇으로 귀천과 궁달을 진단하겠는가?
그 책을 살펴보니 이름은 『태소』이지만 그 안의 논술에는 태소의 뜻에 미치는 말이 거의 하나도 없다. 지은 노래와 요결은 대부분 비속한 말로서 이치와 뜻이 전혀 없다. 처음 의도를 따져 보면 이에 의탁하여 이익을 구하는 매개로 삼은 데 지나지 않는데, 후세가 살피지 않고 서로 전하여 익혀 그 잘못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또는 이를 위해 ‘태소라는 것은 귀천과 궁달을 삶의 처음에 부여받았다는 뜻이며, 맥을 살펴 알 수 있다는 것이지 맥 이름이 태소라는 말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태소』가 진찰하는 것도 반드시 스물네 맥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스물네 맥은 모두 병을 주관하는 말이어서 한 맥이 보이면 한 병을 주관하는데, 빈천과 부귀를 어디서 살피겠는가? 가령 부맥은 진찰하면 풍이다. 태소가가 이를 진찰하면 풍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귀천과 궁달이라고 말하겠는가? 둘을 겸할 수는 없다. 풍이라고 말하면 그가 아는 것도 병에 불과하다. 그 병을 버리고 귀천과 궁달이라고 말하면, 가까이 몸에 있는 병조차 알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태소라 하겠는가? 멀리 몸에서 벗어난 것은 반드시 알 수 없을 것이다. 귀천과 궁달은 몸 밖의 일로서 몸의 기혈과 전혀 상관없는데 어찌 맥으로 알 수 있겠는가?
더욱이 맥은 변하여 나타나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오늘 진찰하여 이 맥을 얻어도 내일 진찰하면 아닐 수 있고, 봄에 이 맥을 얻어도 여름에 짚으면 아닐 수 있다. 태소가는 잠깐 짚어 보고 한평생의 길흉을 단정하니, 반드시 그런 이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추측하여 여러 번 맞히더라도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잡듯 어렴풋이 형용한 것이니, 어찌 일정한 견해가 있겠는가? 아! 맥으로 병을 살펴도 병의 실체를 알지 못하여 여전히 망·문·문을 기다려야 하는데, 하물며 다른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또 맥학은 기백과 황제에게서 시작하여 진월인에게서 펼쳐지고 숙화에게서 자세해졌다. 『소문』·『난경』·『맥경』을 두루 살펴보아도 이에 관한 글자가 하나도 없으니, 숨긴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밀 수 없는 점이 반드시 있어서일 것이다. 소씨는 ‘태소가는 관상법에 능하면서 태소를 빌려 그 술법을 신묘하게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말로서 천하와 후세의 미혹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 또 엿보고 살피기를 잘하는 자가 말로 사람을 달래 은밀히 실정을 알아낸 뒤, 진찰할 때 함부로 말하여 속이고 망령되게 꾸미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한 등급 더 낮아 논할 가치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은 천지의 기를 받아 태어나므로 청탁과 순수하고 섞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맑은 것을 부여받으면 기혈이 맑고 맥도 맑게 온다. 맑으면 맥의 형태가 둥글고 깨끗하며 뛰는 횟수가 분명하다. 나는 이를 진찰하면 부귀를 주관한다는 것만 알 뿐이다. 몇 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몇 년에 승진하며 몇 년에 재물을 얻고 몇 년에 자식을 얻는지 말하라면 모두 알 수 없다. 탁한 것을 부여받으면 기혈이 탁하고 맥도 탁하게 온다. 탁하면 맥의 형태가 맑지 않고 뛰는 횟수가 혼란하다. 나는 이를 진찰하면 빈천을 주관한다는 것만 알 뿐이다. 어느 때 재물을 얻고 어느 때 재물을 잃으며 어느 때 아내를 잃고 어느 때 자식에게 해가 미치는지 말하라면 역시 알 수 없다. 또 형체는 탁하지만 맥이 맑으면 이를 탁중의 청이라 하고, 바탕은 맑지만 맥이 탁하면 이를 청중의 탁이라 한다. 또 형체가 매우 맑지는 않고 맥이 매우 탁하지도 않으나, 부침이 각각 제자리를 얻고 대소가 등급을 잃지 않으면 역시 평온하여 크게 얻거나 잃는 일이 없음을 주관한다. 그 밖에 말이 다하지 못하고 뜻이 갖추어지지 못한 것은 배우는 사람이 유추할 수 있다. 내가 이른바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한결같이 이치에 근본을 둘 뿐이니, 어찌 감히 망령된 설로 사람을 속이겠는가!
아! 내가 이 논설을 지은 까닭은, 세상에 태소맥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한데 모여 칭찬하면서 이치로 분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명성을 퍼뜨리기 때문이다. 설령 그 말이 틀려도 반드시 은밀히 이리저리 맞추어 끌어다 붙이니, 이것이 이른바 자신도 그르치고 남도 그르치는 것으로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의사를 맞아 약을 먹는 사람이 먼저 괴로운 곳을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두세 번 물어도 끝내 침묵하고, 병을 숨겨 의사를 곤란하게 하기도 한다. 의사가 그의 행동으로 곤란해지기는 하지만, 자신의 몸도 의사 때문에 곤란해짐은 생각하지 못한다. 이는 모두 세상의 공통된 폐단으로 사람들이 함께 지닌 것이므로, 내가 자세히 논하여 거듭 당부하는 뜻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이들도 혹 깨우치는 바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 맹자는 ‘내가 어찌 논변을 좋아하겠는가? 나는 부득이할 뿐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