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溪沈君事述

沈君祖復字禮庵號奉江別署鮐翁先世居浙江湖州宋淳熙進士有開官太常博士立朝抗節著直聲為君遷錫始祖累代高隱不仕祖文炳通申韓家言書工鐘王法父堯甲溷跡商界素精計學君生時父年四十有弟二兆英早卒祖經登丁西科賢書君幼頴梧讀書史過目輒成誦貌魁梧有獨立性伉爽不阿年十二歲執筆論古人不屑拾人牙慧應郡縣試輒冠其曹郡尊長白桐公澤邑候浙江吳公觀樂賞其文錄為門下士(校卷秀水沈太史衛常熟龐主政宗瑚南元陸公正福)有風度端礙芳蘭竟體之譽君為文詞藻富麗才氣磅礴灝瀚惟於風檐寸晷不暇推敲以故屢摘屢躓遂援例納粟為國子生赴鄉闈郁不得志因遨遊古越瀏覽西子湖名勝謁岳王墓憩冷泉亭翛然有瀟灑出塵風致既權寓浙課顧氐子祖瑛昆仲讀閱一載以父衰病旋里應城西高司馬承祖凌明經學攽聘督課兩家弟子凡六七年內顧家計外任學實力培植成名說者咸謂君孝友出於天性云歲甲午前出使英法義比大臣薜星使福成任滿歸國猶子聰彝明府與君交莫逆延校天蓋樓文集者累月適中日失和君傷懷時事淡於進取平昔攻健全學嘗概慕歐西裴乃德龍蒲束及國朝徐大椿為人至是喟然曰大丈夫不為良相定為良醫遂執贄孟河馬徵君文植門下徵君者會應詔入都為今上慈禧皇太后請脈恩賞疊稠聲譽滿天下者也君奉以為師問難質疑洞見癥結所學日益粹更隨侍徵君視盛宮保俞軍門聶中丞龍侍郎吳廉訪諸鉅公疾尤內翰先甲稔君醫理堪深特延聘為蘇垣醫局員因事不果往丁酉歲杪君為弟部署計偕北上遂僑居祟安寺中隱院其地即秋嚴上人退隱處也禪房清曠花木扶疏君小住三椽清雅絕谷居則一僮一劍自隨出則利濟為懷活人無算遐邇傳其名邑宰泗州楊公士晟及守戎皖南汪公福林均心欽之制額以贈君年四十後孑身寂處不問家庭瑣屑及田園生計事惟渴愛才凡邑中留學泰東西各國志士類與研究新學痛論時局雖居恆絕志進取而愛國憂世之心未嘗一日忘比年體贏多病壬寅四月陡染虛列拉疾劇甚某夜氣乘絕魂遊深山石室間四圍峭壁千尋上漏光一線君箕踞兀坐凝氣練神突來一異僧狀貌古樸舉腕破壁攜小里囊負之出頓蘇向母索蔗漿豪飲數十杯病若失因更號曰蔗生留紀念慶更生也丙午夏又腹疾大作屢瀕於卮君弟諸友惶急甚君日甘蔗曾生我以啖我可化險為夷試之信然君精氣神由此益耗筋痹舉發脊粱樞僂自謂風前燭影殆將以醫士終其身矣所著醫通一卷鋤經堂文稿一卷棣華集一卷已刻入家乘某與君弱冠訂交重以年誼於君學行知之有素輒忘其不文略述梗概以告當世之知言者光緒戊申年秋月
심군은 이름이 조복이고 자는 예암이며 호는 봉강이고, 별호는 태옹이다. 선대는 절강 호주에 살았다. 송나라 순희 연간의 진사인 유개는 태상박사를 지냈으며, 조정에서 절개를 굽히지 않아 곧은 명성을 떨쳤다. 그가 심군의 집안에서 무석으로 옮겨 온 시조이다. 여러 대에 걸쳐 고상하게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문병은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설에 통달하였으며, 글씨는 종요와 왕희지의 법에 뛰어났다. 부친 요갑은 상업계에 몸담았고 본래 계산에 밝았다. 심군이 태어났을 때 부친은 마흔 살이었다. 아우가 둘 있었는데 조영은 일찍 죽었고, 조경은 정서(丁西)년 과거의 합격자 명부에 올랐다. 심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경서와 사서를 한 번 보면 곧 외웠다. 용모는 크고 훤칠하였고 자립심이 있었으며, 강직하고 시원스러워 아첨하지 않았다. 열두 살에 붓을 들어 옛사람을 논하면서 남이 한 말을 주워 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군현의 시험에 응시하면 번번이 동료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군수인 장백의 동택 공과 현령인 절강의 오관악 공이 그 문장을 높이 사 문하의 선비로 받아들였다. 시험지를 교열한 이는 수수의 심위 태사, 상숙의 방종호 주정, 남원의 육정복 공이었다. 풍도가 단정하고 난초 향기가 온몸에 가득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심군의 문장은 사조가 풍부하고 화려하며 재기가 웅장하고 드넓었다. 다만 바람 부는 처마 아래 짧은 시험 시간에는 퇴고할 겨를이 없어, 여러 번 뽑혔다가 여러 번 좌절하였다. 마침내 전례에 따라 곡식을 바치고 국자생이 되어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답답해하였다. 이에 옛 월 땅을 유람하며 서자호의 명승을 둘러보고 악왕의 무덤을 참배하고 냉천정에서 쉬었는데, 훌훌 털고 속세를 벗어난 듯한 맑은 풍치가 있었다. 얼마 동안 절강에 머무르며 고씨의 아들 조영 형제에게 글을 가르쳤다. 한 해가 지나 부친이 쇠약하고 병들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성 서쪽의 고승조 사마와 능학반 명경의 초빙을 받아 두 집안 자제들의 학업을 지도한 것이 모두 예닐곱 해였다. 안으로는 집안 살림을 돌보고 밖으로는 교육을 맡아 힘써 인재를 길러 이름을 이루게 하였으므로, 논하는 이들은 모두 심군의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갑오년에 앞서 영국·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에 사신으로 갔던 설복성 대신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의 조카 총이 명부는 심군과 막역한 사이여서, 심군을 초빙하여 여러 달 동안 『천개루문집』을 교열하게 하였다. 마침 중국과 일본이 불화하자 심군은 시국을 상심하여 출세하려는 뜻이 옅어졌다. 평소 건전의 학문을 공부하며 유럽의 배내덕과 용포속, 그리고 우리 조정의 서대춘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는데, 이때 탄식하였다. ‘대장부가 훌륭한 재상이 되지 못하면 반드시 훌륭한 의원이 되어야 한다.’ 마침내 예물을 갖추어 맹하의 마문식 징군 문하에 들어갔다. 징군은 일찍이 조서를 받고 서울에 들어가 지금의 황상과 자희황태후의 맥을 살피고 거듭 두터운 은상과 포상을 받아 명성이 천하에 가득한 이였다. 심군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어려운 문제를 묻고 의문을 따지면서 병의 핵심을 통찰하였고, 배움이 날로 정밀해졌다. 또 징군을 모시고 성공보·유군문·섭중승·용시랑·오염방 등 여러 귀인의 병을 살폈다. 우선갑 내한은 심군이 의학 이치에 매우 깊음을 잘 알아 특별히 소주 의국의 직원으로 초빙하였으나, 일이 생겨 결국 가지 못하였다. 정유년 말에 심군은 아우가 회시에 응시하러 북경으로 가는 일을 마련한 뒤 숭안사 중은원에 거처하였다. 그곳은 바로 추엄 상인이 물러나 은거하던 곳이었다. 선방은 맑고 탁 트였으며 꽃과 나무가 무성하였다. 심군이 잠시 머문 작은 집은 맑고 아취가 있어 속됨을 벗어나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동자 하나와 검 한 자루를 곁에 두었고, 밖에 나가면 남을 이롭게 하고 구제할 마음을 품어 살린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원근에 그 이름이 전해져 현령인 사주의 양사성 공과 수비 장수인 환남의 왕복림 공도 모두 마음으로 존경하고 편액을 만들어 주었다. 심군은 마흔 살 이후 홀로 조용히 지내면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과 전답의 생계 문제는 묻지 않았다. 오직 인재를 목마르듯 아껴, 고을 안에서 동서 여러 나라에 유학하는 뜻있는 사람들과 대개 신학문을 연구하고 시국을 절실하게 논하였다. 평소 출세의 뜻은 끊었어도 나라를 사랑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근년에는 몸이 여위고 병이 많았다. 임인년 4월에 갑자기 허렬라병에 감염되어 매우 위중하였다. 어느 날 밤에는 숨이 끊어질 듯하더니 혼이 깊은 산속 돌방 사이를 떠돌았다. 사방은 천 길 절벽이고 위로 한 줄기 빛만 새어 들어왔다. 심군은 다리를 뻗고 꼿꼿이 앉아 기를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모습이 고풍스럽고 소박한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팔을 들어 벽을 깨뜨리고 작은 주머니를 들고서 그를 업어 나왔다. 곧 정신이 돌아와 어머니에게 사탕수수즙을 달라고 하여 수십 잔을 실컷 마시니 병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이에 다시 살아난 것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뜻에서 호를 자생으로 바꾸었다. 병오년 여름에 다시 복부의 병이 크게 일어나 여러 번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아우와 여러 벗이 몹시 다급해하였다. 심군은 ‘사탕수수가 전에 나를 살렸으니, 그것을 먹이면 위험을 편안함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시험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로부터 심군의 정·기·신은 더욱 소모되고 근비가 거듭 발작하며 등이 굽었다. 스스로 바람 앞의 촛불 그림자와 같으니 아마 의사로서 이 몸을 마칠 것이라고 하였다. 저술한 『의통』 한 권, 『서경당문고』 한 권, 『체화집』 한 권은 이미 집안 족보에 새겨 넣었다. 나는 심군과 약관에 교유를 맺었고 같은 해의 인연도 있어 그의 학문과 행실을 평소부터 잘 알았다. 이에 글이 서툰 것도 잊고 대강을 서술하여 당대에 말을 알아볼 이들에게 알린다. 광서 무신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