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廣補註黃帝 內 經素問序

啟玄子王冰撰 ( 新校正云 :「 按唐人物志 , 冰仕唐 , 為 太僕令 , 年八十餘 , 以壽終 。」 )
계현자 왕빙이 지었다. (신교정에서 말하였다. “당인물지를 살펴보면, 왕빙은 당나라에서 벼슬하여 태복령이 되었고 여든여 살에 수명을 다하였다.”)
夫釋縛脫艱 , 全 真 導氣 , 拯黎元於仁壽 , 濟羸劣以獲安者 , 非三聖道則不能致之矣 。 孔安國序 《 尚書 》 曰 :「 伏羲 、 神農 、 黃帝之書 , 謂之 《 三墳 》, 言大道也 。」 班固 《 漢書 》〈 藝文志 〉 曰 :「《 黃帝 內 經 》 十八卷 ,《 素問 》 即其經之九卷也 , 兼 《 靈樞 》 九卷 , 迺 其數焉 。」 ( 新校正云 :「 詳王氏此說蓋本皇甫士安 《 甲乙經 》 之序 , 彼云 :『《 七略 》〈 藝文志 〉:「《 黃帝 內 經 》 十八卷 。」』 今 有 《 鍼經 》 九卷 ,《 素問 》 九卷 , 共十八卷 , 即 《 內 經 》 也 , 故王氏遵而用之 。 又 《 素問 》 外九卷 , 漢張仲景及西晉王叔和 《 脈 經 》 只 為 之九卷 , 皇甫士安名 為《 鍼經 》, 亦專名 《 九卷 》, 楊玄操云 :『《 黃帝 內 經 》 二帙 , 帙各九卷 。』 按 《 隋書 》〈 經籍志 〉 謂之 《 九靈 》, 王冰名 為《 靈樞 》。」 )
속박을 풀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며, 진기를 온전히 하고 기를 인도하여 백성을 구제해 어질고 장수하게 하고, 여위고 약한 사람을 도와 편안하게 하는 일은 삼황의 도가 아니면 이룰 수 없다. 공안국은 《상서》의 서문에서 말하였다. “복희·신농·황제의 책을 《삼분》이라 하는데, 대도를 말한 것이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서는 말하였다. “《황제내경》은 열여덟 권이다. 《소문》은 바로 그 경전 가운데 아홉 권이고, 《영추》 아홉 권을 합하면 그 수가 된다.” (신교정에서 말하였다. “왕씨의 이 설명을 자세히 살피면 대개 황보사안의 《갑을경》 서문에 근거하였다. 그 글에는 ‘《칠략》 〈예문지〉에서 「《황제내경》은 열여덟 권이다」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지금 《침경》 아홉 권과 《소문》 아홉 권이 있어 모두 열여덟 권이니 곧 《내경》이다. 그러므로 왕씨가 이를 따라 사용하였다. 또 《소문》 이외의 아홉 권을 한나라 장중경과 서진 왕숙화의 《맥경》에서는 단지 구권이라 하였고, 황보사안은 《침경》이라 명명하였으며 또한 《구권》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다. 양현조는 ‘《황제내경》은 두 질로, 각 질이 아홉 권이다’라고 하였다. 《수서》 〈경적지〉를 살펴보면 《구령》이라 하였고, 왕빙은 《영추》라 명명하였다.”)
雖復年移代革 , 而授學猶存 , 懼非其人 , 而時有所隱 , 故第七一卷 , 師氏藏之 , 今 之奉行 , 惟八卷爾 。 然而其文簡 , 其意慱 , 其理奧 , 其趣深 。 天地之象分 , 陰 陽之候列 , 變化之由表 , 死生之兆彰 , 不謀而遐邇自同 , 勿約而幽明斯契 , 稽其言有徴 , 驗之事不忒 , 誠可謂至道之宗 , 奉生之始矣 。 假若天機迅發 , 妙識玄通 , 蕆謀雖屬乎生知 , 標格亦資于詁訓 , 未 嘗 有行不由逕 , 出不由 戶 者也 。 然刻意研精 , 探微索隱 , 或識契 真 要 , 則目牛無全 , 故動則有成 , 猶鬼神幽 贊, 而命 世 奇 傑 , 時時閒出焉 。 則周有秦公 ( 新校正云 :「 按別本一作 『 和緩 』。」 ) , 漢有淳于公 , 魏有張公 、 華公 , 皆得斯妙道者也 。 咸日新其用 , 大濟蒸人 , 華葉遞榮 , 聲實相副 , 蓋教之著矣 , 亦天之假也 。
비록 세월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었어도 학문의 전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수받을 만한 사람이 아닐 것을 염려하여 때로 감추어 둔 것이 있었으므로, 제칠권 한 권은 스승이 간직하여 지금 통행하는 것은 여덟 권뿐이다. 그러나 그 글은 간결하고 뜻은 넓으며, 이치는 심오하고 취지는 깊다. 천지의 형상이 구분되고 음양의 징후가 나열되며, 변화의 연유가 드러나고 생사의 징조가 밝혀져 있다. 의논하지 않아도 멀고 가까운 곳이 저절로 같아지고, 약속하지 않아도 그윽한 것과 밝은 것이 이에 부합한다. 그 말을 상고하면 증거가 있고 사실에 검증하면 어긋나지 않으니, 진실로 지극한 도의 종지요 생명을 받드는 시초라 할 만하다. 가령 타고난 기틀이 재빠르게 발하여 신묘한 식견으로 현묘한 이치에 통달하더라도, 지혜로운 계획은 비록 태어나면서 아는 데 속하지만 법칙은 또한 훈고에 의지한다. 길을 거치지 않고 가거나 문을 거치지 않고 나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뜻을 집중하고 정밀히 연구하여 미세함을 탐구하고 숨은 것을 찾다가 식견이 참된 요체와 들어맞으면, 소를 보아도 온전한 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므로 움직이면 성취가 있어 마치 귀신이 은밀히 돕는 듯하며,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뛰어난 인재가 때때로 나타난다. 주나라에는 진공이 있었고 (신교정에서 말하였다. “다른 판본에는 ‘화완’이라고 된 것도 있다.”), 한나라에는 순우공이 있었으며, 위나라에는 장공과 화공이 있었으니 모두 이 신묘한 도를 얻은 사람들이다. 모두 날마다 그 활용을 새롭게 하여 많은 백성을 크게 구제하였고, 꽃과 잎이 번갈아 무성하듯 계승되어 명성과 실제가 서로 부합하였다. 이는 가르침이 뚜렷이 드러난 것이며 또한 하늘이 힘을 빌려준 것이다.
冰弱齡慕道 , 夙好養生 , 幸遇 真 經 , 式 為 龜鏡 , 而 世 本紕繆 , 篇目重疊 , 前後不倫 , 文義懸隔 , 施行不易 , 披㑹亦難 , 歲 月 既 淹 , 襲以成弊 , 或一篇重出而別立二名 , 或兩論併吞而都 為 一目 , 或問 答 未已 , 別樹篇題 , 或脫簡不書而云 世 闕 , 重經合而冠鍼服 , 併 〈 方宜 〉 而 為〈 欬篇 〉, 隔 〈 虛 實 〉 而 為〈 逆從 〉, 合 〈 經絡 〉 而 為〈 論要 〉, 節 〈 皮部 〉 為〈 經絡 〉, 退 〈 至教 〉 以先鍼 , 諸如此流 , 不可勝數 。 且將升岱嶽 , 非逕奚 為, 欲詣扶桑 , 無舟莫適 。 乃精勤博訪 , 而并有其人 , 歷十二年 , 方臻理要 , 詢謀得失 , 深遂夙心 。
나 왕빙은 어려서부터 도를 사모하고 일찍이 양생을 좋아하여, 다행히 참된 경전을 만나 이를 거울로 삼았다. 그러나 세상에 전하는 판본은 잘못이 많고 편목이 중복되며, 앞뒤에 질서가 없고 글과 뜻이 서로 동떨어져 있어 시행하기도 쉽지 않고 펼쳐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세월이 오래 흐르며 그대로 답습하여 폐단이 되었다. 한 편이 중복되어 나오면서 두 이름을 따로 세우기도 하고, 두 논을 합쳐 하나의 제목으로 만들기도 하며, 문답이 끝나지 않았는데 별도의 편명을 세우기도 하고, 빠진 책장을 적지 않고 세상에서 없어졌다고 하기도 하였다. 중복된 경문을 합쳐 침복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방의〉를 합쳐 〈해편〉으로 만들며, 〈허실〉을 떼어 〈역종〉으로 만들고, 〈경락〉을 합쳐 〈논요〉로 만들며, 〈피부〉를 잘라 〈경락〉으로 만들고, 〈지교〉를 뒤로 보내 침을 앞에 두는 따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장차 태산에 오르려는데 길이 아니면 어찌하겠으며, 부상에 가려는데 배가 없으면 갈 수 없다. 이에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널리 찾아다녔고, 아울러 적합한 사람도 만났다. 십이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치의 요체에 이르러, 얻고 잃은 것을 묻고 의논하면서 오래 품었던 마음을 깊이 이루었다.
時於先生郭子齋堂 , 受得先師張公秘本 , 文字昭晰 , 義理環周 , 一以參詳 , 群疑冰釋 。 恐散於末學 , 絕彼師資 , 因而撰註 , 用傳不朽 , 兼舊藏之卷 , 合八十一篇二十四卷 , 勒成一部 ( 新校正云 :「 詳 《 素問 》 第七卷亡已 久 矣 。 按皇甫士安 , 晉人也 , 序 《 甲乙經 》 云 :『 亦有亡失 。』《 隋書 》〈 經籍志 〉 載 《 梁士 錄》 亦云 :『 止存八卷 。』 全元起隋人所注本乃無第七 , 王冰唐寶應中人 , 上至晉皇甫謐甘露中 , 已六百餘年 , 而冰自 為 得舊藏之卷 , 今 竊疑之 , 仍觀 〈 天元紀大論 〉、〈 五運行論 〉、〈 六微旨論 〉、〈 氣交變論 〉、〈 五常政論 〉、〈 六元正紀論 〉、〈 至 真 要論 〉 七篇 , 居 今《 素問 》 四卷 , 篇卷浩大 , 不與 《 素問 》 前後篇卷等 , 又且所載之事與 《 素問 》 餘篇略不相通 , 竊疑此七篇乃 《 陰 陽大論 》 之文 , 王氏取以補所亡之卷 , 猶周官亡 〈 冬官 〉 以 〈 考功記 〉 補之之類也 。 又按漢張仲景 《 傷寒論 》〈 序 〉 云 :『 撰用 《 素問 》、《 九卷 》、《 八十一難經 》、《 陰 陽大論 》。』 是 《 素問 》 與 《 陰 陽大論 》 兩 書甚明 , 乃王氏并 《 陰 大論 》 於 《 素問 》 中也 , 要之 《 陰 陽大論 》 亦古醫經 , 終非 《 素問 》 第七矣 。」 ) 。 冀乎究尾明首 , 尋註㑹經 , 開發童蒙 , 宣揚至理而已 。
그때 곽 선생의 재당에서 선사 장공의 비장본을 전해 받았는데, 글자가 분명하고 의리가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이를 가지고 대조하여 자세히 살피자 여러 의문이 얼음처럼 풀렸다. 후학들에게 흩어져 사제의 전승이 끊어질까 염려하여 이에 주석을 지어 영원히 전하고자 하였다. 예전에 간직하던 권을 아울러 팔십일 편, 이십사 권으로 합하여 한 부를 완성하였다. (신교정에서 말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소문》의 제칠권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황보사안은 진나라 사람인데, 《갑을경》 서문에 ‘또한 없어진 것이 있다’고 하였다. 《수서》 〈경적지〉에 실린 《양사록》에서도 ‘다만 여덟 권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수나라 사람 전원기의 주석본에도 제칠권이 없었다. 왕빙은 당나라 보응 연간 사람으로, 거슬러 진나라 황보밀의 감로 연간까지 이미 육백여 년인데, 왕빙 스스로 옛날에 간직하던 권을 얻었다고 하니 지금 삼가 의심스럽다. 또 〈천원기대론〉·〈오운행론〉·〈육미지론〉·〈기교변론〉·〈오상정론〉·〈육원정기론〉·〈지진요론〉 일곱 편을 보면 지금 《소문》의 네 권을 차지한다. 편과 권의 분량이 커서 《소문》의 앞뒤 편권과 같지 않고, 또한 기록된 내용이 《소문》의 나머지 편과 거의 통하지 않는다. 삼가 생각건대 이 일곱 편은 《음양대론》의 글인데 왕씨가 가져다가 없어진 권을 보충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는 주관의 〈동관〉이 없어지자 〈고공기〉로 보충한 것과 같은 부류이다. 또 한나라 장중경의 《상한론》 〈서〉를 살펴보면 ‘《소문》·《구권》·《팔십일난경》·《음양대론》을 사용하여 편찬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소문》과 《음양대론》이 두 책임은 매우 분명한데, 왕씨가 《음대론》을 《소문》 속에 합친 것이다. 요컨대 《음양대론》 역시 옛 의서이지만 끝내 《소문》의 제칠권은 아니다.”) 끝을 궁구하여 처음을 밝히고, 주석을 찾아 경문을 이해하며, 어린 초학자를 깨우치고 지극한 이치를 널리 알리기를 바랄 뿐이다.
其中簡脫文斷 , 義不相接者 , 捜求經論所有 , 遷移以補其處 。 篇目墜缺 , 指事不明者 , 量其意趣 , 加字以昭其義 。 篇論吞并 , 義不相涉 , 闕漏名目者 , 區分事類 , 別目以冠篇首 。 君臣請問 , 禮儀乖失者 , 考校尊卑 , 增益以光其意 。 錯簡碎文 , 前後重疊者 , 詳其指趣 , 削去繁雜 , 以存其要 。 辭理秘密 , 難粗論述者 , 別撰 《 玄珠 》, 以陳其道 ( 新校正云 :「 詳 《 王氏玄珠 》 世 無傳者 , 今 有 《 玄珠 》 十卷 ,《 昭明隱 旨》 三卷 , 蓋後人附託之文也 。 雖非王氏之書 , 亦於 《 素問 》 第十九卷至二十二四卷頗有發明 , 其 《 隱 旨》 三卷與 今 世 所謂 《 天元玉 冊》 者 , 正相表裏而與王冰之義多不同 。」 ) 。 凡所加字 , 皆朱書其文 , 使 今 古必分 , 字不雜糅 。 庶 厥昭彰 聖 旨, 敷暢玄言 , 有如列宿 高 懸 , 奎張不亂 , 深泉淨瀅 , 鱗介咸分 , 君臣無夭枉之期 , 夷夏有延齡之望 。 俾工徒勿誤 , 學者惟明 , 至道流行 , 徽音累屬 , 千載之後 , 方知大聖之慈惠無窮 。 時大唐寶應元年 歲 次壬寅序 。
그 가운데 책장이 빠지고 글이 끊겨 뜻이 이어지지 않는 것은 경론에 있는 내용을 찾아 옮겨 그곳을 보충하였다. 편목이 빠져 지시하는 일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그 뜻과 취지를 헤아려 글자를 더하여 의미를 밝혔다. 편론이 합쳐져 뜻이 서로 관련되지 않거나 명목이 빠진 것은 내용의 부류를 나누어 별도의 제목을 편 첫머리에 붙였다. 임금과 신하가 묻는 데 예의가 어긋난 것은 높고 낮음을 고찰하여 글을 보태 그 뜻을 빛냈다. 책장이 뒤바뀌고 글이 흩어져 앞뒤가 중복된 것은 그 취지를 자세히 살펴 번잡함을 삭제하고 요체를 남겼다. 말과 이치가 은밀하여 거칠게 논술하기 어려운 것은 별도로 《현주》를 지어 그 도를 진술하였다. (신교정에서 말하였다. “《왕씨현주》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다. 지금 《현주》 열 권과 《소명은지》 세 권이 있으나 대개 후대 사람이 이름을 빌려 붙인 글이다. 비록 왕씨의 책은 아니지만 《소문》 제십구권부터 제이십이권까지 네 권을 상당히 밝혀 준다. 그 《은지》 세 권은 지금 세상에서 이른바 《천원옥책》이라 하는 것과 서로 표리를 이루지만 왕빙의 뜻과는 다른 점이 많다.”) 더한 글자는 모두 붉은 글씨로 써서 지금 글과 옛글이 반드시 구별되고 글자가 뒤섞이지 않게 하였다. 바라건대 성인의 뜻을 밝히고 현묘한 말을 널리 펼쳐, 마치 뭇별이 높이 걸려 규성과 장성이 어지럽지 않고 깊은 샘이 맑아 비늘 있는 것과 껍질 있는 것이 모두 분명하듯 되기를 바란다. 임금과 신하가 억울하게 요절할 때가 없고, 이민족과 중국 사람에게 수명을 늘릴 희망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의원들은 잘못하지 않고 배우는 사람들은 명백히 알아, 지극한 도가 유행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계속 이어지면 천 년 뒤에야 비로소 대성인의 자비와 은혜가 무궁함을 알 것이다. 때는 대당 보응 원년, 임인년에 서문을 쓴다.
將仕郎守殿中丞孫 兆 重改誤
장사랑 수전중승 손조가 잘못을 다시 고쳤다.
朝奉郎守國子博士同校正醫書 , 上騎都尉賜緋魚袋 , 高 保衡
조봉랑 수국자박사 동교정의서, 상기도위 사비어대 고보형.
朝奉郎守尚書屯田郎中同校正醫書 , 騎都尉賜緋魚袋 , 孫 奇
조봉랑 수상서둔전낭중 동교정의서, 기도위 사비어대 손기.
朝散大夫守光 祿 卿 , 直秘閣判登聞檢院上護軍 , 林 億
조산대부 수광록경, 직비각 판등문검원 상호군 임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