欽繇嘗患血症 。 五六年矣 。 骨將枯矣 。 東洞翁肉焉 。 爾後相得而歡篤 。 欽繇於醫事混然途之人也比比耳 。 目其術奏效 。 間聞為其徒辨惑之 。 略曰 。 唐宋來 。 方技家無慮數十 。 丹溪東垣輩稱其時 。 其論著鑿空張虛 。 如其持之有故 。 其言之成理 。 而無益於術 。 投飢餓以土羹乎 。 救決河用枯蘀乎 。 而近世醫 。 或一毒同症 。 而投其劑 。 朝更夕改 。 其莽之設令乎 。 或一毒異症 。 仍貫乎其施 。 其守株刻船乎 。 而或其中 。 非爾力也 。 病者天幸已 。 非然 。 則諺云 。 驅飯上蠅耳 。 豈視越人所論 。 仲景所傳 。 以為周之冕不可冠 。 殷之輅不可乘矣 。 奚不能自開一眼 。 以蹈冥故途甚矣 。 世醫之墨墨也 。 乃使秦張二子 。 謂千歲無知己 。 此胡異乎見表石為鬼兕 。 藏燕石為大寶 。 雖素非芒軔僈楛者 。 面牆使然乎 。 即有一說 。 憚驚人耳 。 換面陳言 。 而丹溪東垣輩 。 之屍之祝 。 及或見讀古方書者 。 又儢儢然猥以徒蔽精神 。 奚乃為此方枘圓鑿 。 安所施之 。 且利之昧心也 。 使志不立 。 彼何論於救濟 。 張氏所謂寧不利於病 。 不拂富家心 。 其簧巧求售 。 如假飾妖娣 。 倚閭求歡者 。 不自知其陋 。 又不恥其恥焉 。 則又何進焉 。 噫 。 即使為則 。 沙汰其砂礫 。 簸揚其秕糠 。 乃不能以一旦遽洗浣世醫舊染 。 夏蟲疑冰 。 不亦類乎 。 亦唯候後世之公言耳 。 蓋詭隨儇子聞此語 。 豈不謂避灶猶煬 。 沾沾背出汗乎 。 詩云 。 我思古人 。 俾無訖兮 。 東洞翁之謂也 。 蓋東洞翁壯年前 。 憤厲激發 。 立志其復古 。 焦心覃思 。 更唐宋失機縱敵之弱謀 。 張秦張應變摧堅之紀律 。 乃遂揭旗幟其道 。 振金鼓其黨 。 亦惟繼絕存亡矣 。 斯亦謂與秦張二氏 。 千歲而比肩也 。 不亦宜乎 。 往年醫斷出 。 則若夫金科玉條乎 。 腐論迂說者 。 瞲然疑之 。 愕然駭之 。 匈匈彈之 。 訑訑拒之 。 或自覺昨非 。 以思改轍 。 而以日莫途遠 。 倒行逆施 。 或闇然自掩 。 寄託遺簪弊履 。 乃巧其遁辭 。 鬻其苦窳者 。 或托神奇其道 。 假儒飾其業 。 乃謂攻異端斯害已者 。 亦有之 。 如思折伯牙之指 。 願摧王良之手者 。 亦有之 。 余聞之人言 。 稍黠者 。 陽排斥東洞 。 譙訶其說 。 陰謄抄其著稿 。 用以為帳秘 。 而緣飾其術 。 往往取其效者 。 亦有之 。 亦惟繫縛於名 。 漠湣於利也 。 雖然 。 醫斷已出 。 牖後進 。 杖心盲 。 乃染指於古 。 或千里負芨 。 委然就學 。 或聞風而弗然興者 。 不為不多矣 。 古人云 。 涉淺水者見蝦 。 其頗深者察魚鱉 。 其尤者觀蛟龍 。 焉知世不有深入於刀圭之道者乎 。 則知東洞者 。 何候後世乎 。 其著藉追踵出 。 則又焉知不有初睥睨者 。 心竊若小巫於翁 。 而神氣竭耶 。 間者刊其類聚方 。 是亦不啻設左右廣 。 而導之前茅也 。 一日謂余曰 。 世謀其著之顯 。 而請其序也 。 或以貴 。 或以名 。 假其熏輝 。 余也不然 。 幸以子之識為則也 。 題一言 。 夫名之剖發於海內 。 此藉自白矣 。 且欽繇不知醫事者也 。 何為重於此舉 。 但書諄誨其徒之緒餘 。 以為序 。 是已 。 已而豈足盡東洞翁乎 。 豈足盡東洞翁乎 。
흠요는 일찍이 혈증을 앓은 지 5, 6년이 되어 뼈가 장차 마르려 하였는데, 동동옹이 살을 붙여 주었다. 그 뒤로 서로 뜻이 맞아 기쁨과 정이 두터워졌다. 흠요는 의술에 관해서는 흐릿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길거리의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을 뿐이다. 그 의술이 효험을 내는 것을 눈으로 보고, 때때로 그 제자들의 의혹을 풀어 주는 말을 들었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당나라와 송나라 이래 방술을 하는 의가가 대략 수십이나 되었고, 단계와 동원 같은 이들은 당대에 이름을 얻었다. 그 논저는 허공을 파고 빈 것을 부풀려, 주장에 근거가 있고 말에 이치가 있는 듯하지만 의술에는 이로움이 없다. 굶주린 이에게 흙국을 주는 것인가, 터진 강물을 마른 풀로 막으려는 것인가? 그런데 근세의 의사들은 혹 같은 독에 같은 증상인데도 약을 투여하면서 아침에 바꾸고 저녁에 고치니, 왕망이 법령을 만드는 것과 같은가? 혹 같은 독이되 증상이 다른데도 시행하는 방법을 줄곧 그대로 고수하니, 그루터기를 지키거나 배에 칼자국을 새기는 것과 같은가? 어쩌다 들어맞더라도 그것은 너의 힘이 아니라 병자가 하늘의 요행을 얻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속담에서 말하는 밥 위의 파리를 쫓는 것일 뿐이다.
어찌 월인이 논한 것과 중경이 전한 것을 보고, 주나라의 면류관은 쓸 수 없고 은나라의 수레는 탈 수 없다고 여기는가? 어찌 스스로 한쪽 눈조차 뜨지 못하고 어두운 옛길을 답습하는가? 세상 의사들의 어두움이 심하여, 마침내 진씨와 장씨 두 분으로 하여금 천 년 동안 지기가 없다고 말하게 한다. 이것이 표석을 귀신이나 외뿔짐승으로 여기고 연석을 큰 보배라 하여 간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본래 거칠고 둔하며 게으르고 조잡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담장을 마주한 듯한 무지가 그렇게 만드는가?
설령 하나의 견해가 있어도 사람들의 귀를 놀라게 할까 꺼려, 묵은 말의 얼굴만 바꾸면서 단계와 동원 같은 이들을 받들어 제사 지낸다. 혹 고방서를 읽는 사람을 보면 또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함부로 말하기를, 헛되이 정신을 가릴 뿐인데 어찌 네모난 장부를 둥근 구멍에 맞추는 짓을 하며 어디에 쓸 것이냐고 한다. 또 이익이 마음을 어둡게 하여 뜻을 세우지 못하게 하니, 저들에게 어찌 구제를 논하겠는가? 장씨가 말한, 차라리 병에는 이롭지 않을지라도 부잣집 마음은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교묘한 말로 팔리기를 구하는 모습은 요염한 여자가 거짓으로 꾸미고 문에 기대어 환심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스스로 그 비루함을 모르고 그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또 무엇을 나아가겠는가?
아아, 위칙으로 하여금 모래와 자갈을 씻어 내고 쭉정이와 겨를 까불어 내게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세상 의사들의 오래된 물듦을 갑자기 씻어 낼 수는 없다. 여름 벌레가 얼음을 의심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다만 후세의 공정한 말을 기다릴 뿐이다. 남을 속이며 아첨하는 경박한 자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찌 부뚜막을 피하고도 여전히 불을 쬔다고 하며 등에 흥건히 땀을 흘리지 않겠는가?
『시』에 “나는 옛사람을 생각하여 그 도가 끊이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으니, 동동옹을 이르는 것이다. 동동옹은 장년 이전부터 분발하고 격려하여 복고에 뜻을 세우고, 마음을 애태우며 깊이 생각하였다. 당송 이래 기회를 잃고 적을 놓아주던 나약한 계책을 바꾸고, 진씨와 장씨가 변화에 응하여 견고한 적진을 꺾던 기율을 펼쳤다. 마침내 그 도의 깃발을 세우고 그 무리의 징과 북을 울렸으니, 끊어진 것을 잇고 없어진 것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또한 진씨와 장씨 두 분과 천 년을 사이에 두고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이르니, 마땅하지 않은가?
지난해 『의단』이 나오자, 썩은 논의와 우활한 학설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의심하고, 깜짝 놀라며 두려워하고, 시끄럽게 비난하고, 거만하게 거절하였다. 혹 스스로 지난 잘못을 깨달아 길을 바꿀 생각을 하면서도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멀다고 하여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시행하였다. 혹 어둡게 스스로를 가리고 버린 비녀와 해진 신발에 의탁하여, 교묘한 핑계를 만들고 형편없는 것을 팔았다. 혹 자기 도의 신기함을 내세우고 유학을 빌려 자기 업을 꾸미면서, 이단을 공격해야 그 해가 그친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백아의 손가락을 꺾고 왕량의 손을 부러뜨리려 하는 것 같은 자도 있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들으니, 조금 교활한 자 가운데는 겉으로 동동을 배척하고 그 학설을 꾸짖으면서도 몰래 그 저술 원고를 베껴 자기 장막 안의 비밀로 삼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술을 꾸며 때때로 효험을 얻는 자도 있다고 한다. 이 또한 이름에 얽매이고 이익에 어두워진 것일 뿐이다.
그렇기는 하나 『의단』이 이미 나와 후진의 눈을 열어 주고 마음이 눈먼 자의 지팡이가 되자, 마침내 옛 의술을 맛보게 되었다. 혹 천 리 길에 책 상자를 지고 와 몸을 낮추어 배우고, 혹 명성을 듣고 불연히(弗然) 일어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얕은 물을 건너는 자는 새우를 보고, 제법 깊이 들어가는 자는 물고기와 자라를 살피며, 더욱 깊이 들어가는 자는 교룡을 본다고 하였다. 세상에 어찌 도규의 도에 깊이 들어가는 사람이 없을 줄 알겠는가? 그렇다면 동동을 알아주는 이를 어찌 후세까지 기다리겠는가? 그 저술들이 뒤이어 나오면, 처음에는 흘겨보던 자가 마음속으로 동동옹 앞에서 작은 무당처럼 느껴 정신과 기세가 다하는 일이 또 어찌 없을 줄 알겠는가?
근래에 『유취방』을 간행하였으니, 이 또한 좌우의 군대를 벌여 놓고 앞의 척후로 인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날 내게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자기 저술을 드러내려 서문을 청할 때, 혹 지위가 높거나 혹 이름이 난 이에게 그 빛을 빌린다. 나는 그렇지 않다. 그대가 위칙을 알고 있으니 다행히 한마디 적어 주게”라고 하였다.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이 책이 스스로 밝혀 줄 것이다. 또 흠요는 의술을 모르는 사람이니, 이 일을 중히 여겨 무엇을 하겠는가? 다만 그 제자들을 간곡히 가르친 말의 남은 것을 적어 서문으로 삼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어찌 동동옹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동동옹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