戶部郎中胡君荄甫事狀

同治十一年歲在壬申八月十四日荄甫戶部以疾卒於京邸年四十有八訃至培係為文哭之君所著內經校義今刑部尚書潘伯寅先生為刻於都中培系以南方學者不易觀乃重為刊布自念與君少同學長同志知君最深刻既竟因撰次君之行事為狀以乞志傳俾後世有考焉君諱澍字荄甫一字甘伯號石生績溪縣城北人先世三山公諱舜陟宋大觀三年進士歷官徽猷閣待制贈少師宦跡見宋史本傳著有論語義師律陣圓奏議文集詠古詩三山老人語錄仲子苕溪公諱仔知晉陵縣事著有孔子編年苕溪漁隱叢話
동치 11년 임신 8월 14일, 호부의 해보가 병으로 서울 숙소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부고가 오자 배계는 글을 지어 곡하였다. 군의 『내경교의』는 지금 형부상서 반백인 선생이 도성에서 판각하였다. 배계는 남방 학자들이 보기 어려우므로 다시 간행하였다. 군과 어려서 함께 배우고 자라 뜻을 같이하여 가장 깊이 알았으므로 판각을 마친 뒤 군의 행적을 차례로 적어 행장을 만들고 묘지와 전기를 청하여 후세가 상고할 수 있게 한다. 군의 휘는 주, 자는 해보, 다른 자는 감백, 호는 석생이며 적계현 성북 사람이다. 선조 삼산공의 휘는 순척으로 송 대관 3년 진사이며 휘유각대제까지 지내고 소사로 추증되었다. 벼슬 행적은 『송사』 본전에 있고 『논어의』·『사율진원』·『주의문집』·『영고시』·『삼산노인어록』을 지었다. 둘째 아들 초계공의 휘는 자이며 진릉현의 일을 맡았고 『공자편년』·『초계어은총화』를 지었다.
國朝收入
우리 왕조에서 수록한
四庫全書傳至明充寰公諱思伸萬曆乙未進士官至右僉都御史巡撫保定等府提督紫荊等關宦跡見府縣誌著有督撫奏議邊垣圓紀是為君八世祖自充寰公以下人
『사고전서』에 수록하였다. 명대 충환공에 이르니 휘는 사신으로 만력 을미 진사이며 우첨도어사로 보정 등의 부를 순무하고 자형 등의 관을 제독하였다. 벼슬 행적은 부·현지에 있으며 『독무주의』·『변원원기』를 지었다. 군의 8세조이다. 충환공 아래로 우리
國朝潛德弗耀君之曾祖公諱立三貤贈儒林郎祖時未公諱仕未例授登仕郎贈儒林郎晉贈朝議大夫父正暉公諱尚昱例授儒林郎候選直隸州同知贈奉政大夫曾祖母高氏貤贈安人祖母許氏贈安人晉贈恭人母周氏生母程氏俱贈宜人庶母葉氏例封安人州同公性孝友家夙貧慮無以供甘旨乃棄儒而賈柱來江浙間數十年遂致饒裕以好義博施著聞於時邑有善舉無不預焉年五十尚無子七十有子七人人咸謂積善之報君其長也幼穎悟父母奇愛之一日州同公過先君塾中見其所以教培系兄弟者心敬異之乃命君受業焉君時方九齡培系年十二自此以至弱冠凡讀書作文字飲倉居處無不與君共之君沉默寡言所誦讀不煩督責先君視之異於群弟子年十四丁生母程太宜人憂哀毀如成人早有文譽年十六七與邑中知名士結社相酬唱辛丑秋修禊於邑東石照山繪圖賦詩君年最少儕輩皆折服癸卯秋先君膺疾君與培系星夜走二十里求醫藥先君捐館君補被就培系兄弟於苦凷中與同臥起古所謂心喪於君見之甲辰君與培系兄弟讀書郡城之紫陽書院是歲以古學受知於督學季文敏公芝昌補徽州府學生丙午偕培系就試金陵棹邗江覽紅橋竹西諸勝阻風京口登金山寺浮圖培系及半欲止君強捋培系手直竅其巔於是道吳門溯錢塘泛舟西湖經月始返是時購得洪稚存孫開如黃仲則諸先生著述慨然有志其為人開如先生集中有釋人一篇君博稽古訓為之疏通證明嘉定朱亮甫先生右曾見其書曰某行年五十閱人頗多英年嗜學如君者實所罕觀君益自奮勵常思發名成業以顯揚其親未幾周太宜人暨州同公相繼棄卷君營葬事畢乃負笈杭州從溧陽繆武烈公梓習制舉業君弱冠以前所作時藝不甚合繩墨而時有英銳之氣至是武烈公教以古文之法為時文君乃大喜每聞公緒論條記為一編曰尊聞錄心摹手追務竟其學已未舉於鄉庚申春計偕入都至清江道梗折回是歲二月粵匪竄績溪君舊居大廈一夕變為灰燼遺業蕩然杭城旋亦失守君歸則已無家乃攜眷屬奔走浙東西自是烽火驚天幾無所託命矣壬戌杭城再陷君挈幼子良駒間關險難同至蘇州遇救得脫旋由滬上附輪船北上乙丑會試報罷援例授內閣中書尋乞假南歸戊寅會試復不第乃捐陸郎中分發戶部山西司是時仕途冗雜司員需次甚夥君資淺無可自見仍以著書為事不妄與人酬酢體素羸又以更歷憂患精力損耗壬申二月與培系書云嘗以風塵馳逐驗輪號之鐵每歲必銷寸許況以脆薄之身當之無怪其然矣某入都來痔瘡已成痼疾頻發無休而他疾之嬰身者靡月不有年未五十興致索然數年後便料理歸休矣人生能得數十卷書以傳後而有佳子孫以葆守勝於萬戶侯多多矣某思之慕之而東塗西抹迄用無成可懼也此君之絕筆嗚呼君固淡於宦情篤於撰述襄見家竹村先兄郝蘭皋年丈皆官戶部並以絕學名當世竊冀君踵其轍天 奈 何既嗇其遇又嗇其年使君仕宦既不成著書又不就徒抱其所蘊蓄而鬱郁以終斯生人之極哀已君少有至性事父母愉色婉容終身有孺子之慕與諸弟尤友愛少弟祥麟以浙江候補府經歷從戎衢州積勞成疾君得耗促裝赴衢為之稱藥量水衣不解帶者匝月弟歿又為扶櫬歸葬行路誤哀之君身裁中人文弱如不勝衣而遇事有膽略於所親厚同患難托死生毅然引為己任與人交不為崖岸和易溫婉人以是親之然胸中涇渭劃然不肯隨俗俯仰嘗歷數交遊私為籍記而第其甲乙培系戲謂曰君為月旦評乎抑為古今人表乎君笑謝之培系與君客繆武烈公前後六七年與同門餘姚周君雙庚會稽趙君撝叔溧陽王君西坨繆君芷汀稚循昆季以文章道誼相切磋數君俱負舊才然皆雅愛君每考古訂今搜奇選勝非君在不樂也一時經學淹通之士如歸安楊君見山德清戴君子高皆與君一見如舊相識居京師時潘伯寅先生方官戶部侍郎引為文字交潘氏滂喜齋所刻唐釋湛然輔行記君所掇錄也君之援例戶曹也王君西坨厚資之君歿潘司農暨家芸楣比部為之經紀其喪且為歸其旅櫬及其眷屬又為刻其遺書數公風誼為不可及亦君之賢有以致之也君總角能詩初學太白稍長自以為不足傳遂不復作駢體文有齊梁風味亦不多作先君授以段氏說文注顧氏音學五書江氏四聲切韻表諸書遂通聲音訓詁之學後見高郵王氏書益篤嗜之雖在逆旅中塵積滿案暇必展卷翌索每得一義則怡愉累日庚申以後不獲常聚首然每見輒以所心得之相質證娓娓不倦少時所著釋人疏證左傳服氏注義通俗玄疏證俱毀於兵火中年多病因治醫術時有超悟後於都肆得宋刻內經乃以元熊氏本明道藏本及唐以前古書悉心校勘發明古義撰內經校義草創未就今存數十條詁說精確其義例略如王氏讀書雜誌又為從兄印溪校刊先苕溪公孔子編年於本書之外博考先聖事蹟之見於他書者以為之跋極稱賅洽又淮南子一切經音義均有校本又著有墨守編正名錄俱未成君精刻印工篆書得秦漢人遺意至今學者珍之性嗜蓄意每下直輒至琉璃廠書肆搜求善本觸其所好必購得之雖典質不少吝所積至五千余卷嘗自言於春秋慕叔向於西漢慕劉向欲顏所居曰二向堂其志趣如此吾族人丁蕃盛培系與君自始祖以下十五傳皆同祖嗣後各為一支培繫於君為族叔祖君幼受經於先君遂倍相親暱中更多難倚之如左右手遇困阨君恆典衣濟之培係為戚某所齮齕君力為捍蔽不避嫌怨培系性褊急於內外人已閒每不善處多致繆郝君常婉言諷諭當抑鬱不自得時得君一言輒渙然冰釋亦不自知其何心也蓋自少至老數十年共嘗甘苦不以榮枯得喪易其心者惟君一人而已方謂生為我鮑叔死為我巨卿豈意君竟先我而逝耶傷哉君生於道光五年乙酉四月初二日卒葬邑南門外之洪上塘娶周氏封宜人再娶萬氏子二長良恭議敘九品銜周出次良駒國子監生萬出女二俱周出一適李一適孫男人孫女人良駒器宇魁偉舉止頗肖君殆能世其學者
왕조에 들어와 덕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군의 증조 휘 입삼은 유림랑으로 이증되었고 조부 시미공의 휘는 사미로 예에 따라 등사랑을 받고 유림랑으로 추증되었다가 조의대부로 진증되었다. 아버지 정휘공의 휘는 상욱이며 예에 따라 유림랑을 받고 직례주동지 후보였으며 봉정대부로 추증되었다. 증조모 고씨는 안인으로 이증, 조모 허씨는 안인으로 추증되었다가 공인으로 진증, 어머니 주씨와 생모 정씨는 모두 의인으로 추증, 서모 엽씨는 예에 따라 안인으로 봉해졌다. 주동공은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부모에게 좋은 음식을 드리지 못할까 걱정해 유학을 버리고 장사하여 강소·절강을 수십 년 오가며 부유해졌다. 의를 좋아하고 널리 베풀어 당시 이름났으며 고을의 선행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쉰까지 아들이 없다가 일흔에는 아들 일곱을 두어 모두 적선의 보답이라 했으며 군은 맏아들이다. 어려서 영리하여 부모가 특별히 사랑하였다. 어느 날 주동공이 선친의 글방을 지나며 배계 형제에게 가르치는 방식을 보고 경이롭게 여겨 군에게 수업받게 했다. 군은 아홉 살, 배계는 열두 살이었다. 이때부터 스무 살까지 독서·글짓기·음식·거처를 함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군은 말이 적고 조용하며 읽는 일을 재촉할 필요가 없어 선친은 다른 제자와 달리 보았다. 열네 살에 생모 정태의인을 여의어 어른처럼 슬퍼하며 몸을 상하였다. 일찍 문장으로 명성이 있어 열여섯·일곱 살에 고을의 명사들과 모임을 만들어 시를 주고받았다. 신축 가을 고을 동쪽 석조산에서 계제를 행하고 그림과 시를 만들 때 군이 가장 어렸으나 동료들이 모두 감복했다. 계묘 가을 선친이 병들자 군은 배계와 밤중에 20리를 달려 의약을 구했다. 선친이 세상을 떠나자 이불을 가지고 와 상중의 배계 형제와 함께 자고 일어나니 옛날의 심상을 군에게서 보았다. 갑진년에 군과 배계 형제는 군성의 자양서원에서 공부하였다. 그해 고학으로 독학 계문민공 지창의 인정을 받아 휘주부 학생에 보충되었다. 병오년에 배계와 금릉에 시험 보러 가고 한강(邗江)에 배를 띄워 홍교·죽서 등의 명승을 보았다. 경구에서 바람에 막혀 금산사 탑에 올랐는데 배계가 중간에서 그치려 하자 군이 억지로 손을 잡아 정상까지 올랐다. 오문을 거쳐 전당을 거슬러 서호에 배를 띄우고 한 달 뒤 돌아왔다. 이때 홍치존·손개여·황중칙 선생들의 저술을 사서 그 사람됨을 본받을 뜻을 품었다. 개여 선생 문집의 「석인」 한 편을 옛 훈고로 널리 상고하고 소통·증명하였다. 가정의 주량보 선생 우증이 그 책을 보고 “내 나이 쉰에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젊어서 그대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드물다”고 하자 더욱 분발하여 이름과 업적을 세워 부모를 드러내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주태의인과 주동공이 잇따라 돌아가셨다. 장례를 마치고 책을 지고 항주로 가 율양의 무무열공 자에게 과거 문장을 배웠다. 스무 살 전 시예는 법도에 썩 맞지 않았으나 예리한 기상이 있었다. 이제 무열공이 고문의 법으로 시문을 짓게 가르치자 크게 기뻐하여 공의 말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기록해 『존문록』을 만들고 마음으로 본받고 손으로 따라 학문을 끝까지 이루려 힘썼다. 기미년에 향시에 합격하고 경신 봄 회시를 보러 서울로 가다가 청강에서 길이 막혀 돌아왔다. 그해 2월 월비가 적계에 들어와 옛집 큰 건물이 하룻밤에 잿더미가 되고 남은 가업이 없어졌다. 항주도 곧 함락되어 돌아갈 집이 없자 가족을 데리고 절강 동서를 떠돌았다. 이때부터 전쟁의 불길이 하늘을 놀라게 하여 목숨을 맡길 곳이 거의 없었다. 임술년에 항주가 다시 함락되자 어린 아들 양구를 데리고 험난한 길을 지나 소주에 이르러 구원을 받아 탈출하고 상해에서 증기선을 타고 북상했다. 을축 회시에 낙방하고 예에 따라 내각중서를 받았으며 곧 휴가를 청해 남쪽으로 돌아왔다. 무인 회시에도 낙방하여 납연으로 낭중이 되어 호부 산서사에 배속되었다. 당시 벼슬길이 번잡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원이 많아 자격이 얕은 군은 스스로 드러낼 수 없어 여전히 저술에 힘쓰고 함부로 남과 교제하지 않았다. 몸은 본래 여윈 데다 우환을 겪어 정력을 소모했다. 임신 2월 배계에게 보낸 편지에 “풍진 속을 달리며 윤호(輪號)의 쇠를 살피니 해마다 한 치쯤 닳는다. 하물며 연약한 몸으로 감당하니 그렇게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서울에 온 뒤 치창이 고질이 되어 쉴 새 없이 발하고 다른 병도 달마다 없다 할 수 없다. 쉰도 안 되었는데 흥취가 다하여 몇 년 뒤에는 돌아가 쉴 일을 마련하려 한다. 사람이 책 수십 권을 후세에 남기고 좋은 자손이 지켜 준다면 만호후보다 훨씬 낫다. 이를 생각하고 사모하지만 이리저리 써도 아직 이룬 것이 없어 두렵다”고 하였다. 이것이 군의 절필이다. 아, 군은 벼슬에 담담하고 저술에 독실했다. 전에 우리 집 죽촌 형과 학난고 어른이 모두 호부에 벼슬하며 뛰어난 학문으로 당대에 이름난 것을 보아 군도 그 자취를 잇기를 바랐다. 하늘은 어찌 만남도 수명도 아껴 벼슬도 이루지 못하고 저술도 마치지 못한 채 품은 바를 안고 울울하게 생을 마치게 했는가. 지극히 슬픈 일이다. 군은 어려서 지성이 있어 부모를 섬길 때 즐거운 낯빛과 온화한 모습을 지켰고 평생 어린아이의 그리움을 품었다. 동생들에게 특히 우애가 있었다. 막내 상린이 절강 후보 부경력으로 구주에서 종군하다 과로로 병들자 소식을 듣고 급히 가 약과 물을 헤아려 한 달 내내 옷띠도 풀지 않았다. 동생이 죽자 관을 받들고 돌아와 장사하여 길 가는 이도 슬퍼했다. 몸집은 보통이고 문약하여 옷도 감당하지 못할 듯했지만 일을 만나면 담략이 있어 가까운 이와 환난을 함께하고 생사를 맡기는 일을 의연히 자기 책임으로 삼았다. 교제할 때 모나게 굴지 않고 온화하고 쉽게 어울려 사람들이 친했으나 가슴속의 시비는 분명하여 세속을 따라 굽히고 펴지 않았다. 교유한 이를 헤아려 비밀리에 기록하고 등급을 정한 적이 있어 배계가 “월단평을 하는가, 고금인표를 만드는가” 하고 놀리니 웃으며 사양했다. 배계와 군은 무무열공에게 앞뒤로 여섯일곱 해 머물며 동문의 여요 주쌍경, 회계 조휘숙, 율양 왕서타, 무지정·치순 형제와 문장과 도의로 절차탁마하였다. 여러 사람은 뛰어난 재주가 있었지만 모두 군을 사랑하여 고금의 일을 고증하고 기이한 것과 명승을 찾을 때 군이 없으면 즐겁지 않았다. 경학에 깊이 통한 귀안 양견산·덕청 대자고 같은 이도 한 번 만나면 오랜 벗처럼 되었다. 서울에 있을 때 반백인 선생이 호부시랑으로서 문자의 벗으로 삼았다. 반씨 방희재에서 판각한 당 승려 담연의 『보행기』는 군이 추려 기록한 것이다. 군이 예에 따라 호조에 들어갈 때 왕서타가 넉넉히 도왔고, 세상을 떠나자 반사농과 우리 집 운미 비부가 상사를 경영하고 객지의 관과 가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유서도 판각했다. 여러 공의 풍의는 따를 수 없지만 군의 어짊이 이를 이르게 한 것이다. 군은 어린 시절 시를 지어 처음 태백을 배웠으나 조금 자라 후세에 전할 만하지 않다 여겨 더 짓지 않았다. 변려문은 제·양의 풍미가 있었으나 많이 짓지 않았다. 선친이 단씨 『설문주』·고씨 『음학오서』·강씨 『사성절운표』 등을 가르쳐 성음훈고에 통했고 뒤에 고우 왕씨 책을 보고 더욱 즐겼다. 여관에 있어 책상에 먼지가 가득해도 틈나면 책을 펼쳐 탐구하고 한 뜻을 얻으면 여러 날 기뻐했다. 경신 이후 늘 만나지는 못했지만 만날 때마다 얻은 바를 서로 묻고 증명하며 지치지 않았다. 젊어 지은 『석인소증』·『좌전복씨주의』·『통속현소증』은 모두 병화에 소실되었다. 중년에는 병이 많아 의술을 다스리며 때때로 뛰어난 깨달음을 얻었다. 뒤에 서울 책방에서 송각 『내경』을 얻어 원 웅씨본·명 도장본·당 이전 고서를 정성껏 교감하고 고의를 밝혀 『내경교의』를 지었으나 초고도 마치지 못했다. 지금 수십 조가 남아 해석이 정밀하며 의례는 왕씨 『독서잡지』와 비슷하다. 종형 인계를 위해 선조 초계공의 『공자편년』을 교간하고 본서 외의 다른 책에 보이는 공자 행적을 널리 고찰하여 발문을 지으니 매우 갖추어졌다. 『회남자』·『일체경음의』에도 교본이 있으며 『묵수편』·『정명록』은 모두 미완성이다. 인각에 정밀하고 전서를 잘 써 진한의 뜻을 얻어 지금도 학자들이 귀히 여긴다. 책 모으기를 좋아하여 관청에서 나오면 유리창 서점에서 선본을 찾고 좋아하는 책을 만나면 전당잡히더라도 아끼지 않고 반드시 사서 5천여 권을 모았다. 스스로 춘추시대에는 숙향, 서한에는 유향을 사모하여 거처를 이향당이라 이름하고 싶다 했으니 지취가 이러했다. 우리 종족은 번성하여 배계와 군은 시조 아래 15대까지 같은 조상을 두고 뒤에 갈라졌으므로 배계는 군의 족숙조이다. 군이 어려서 선친에게 경을 배워 더욱 친했고 중간의 많은 환난에서 좌우 손처럼 의지했다. 곤경에 처하면 군은 늘 옷을 전당잡혀 도왔다. 배계가 친척 아무개에게 헐뜯길 때 군은 혐의와 원망을 피하지 않고 막아 주었다. 배계는 성미가 좁고 급하여 안팎과 남·자기 사이에서 처리를 잘 못해 잘못이 많았는데 군이 늘 완곡히 타일렀다. 울울하여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때 군의 한마디를 들으면 얼음처럼 풀려 그 마음이 어째서인지 스스로도 몰랐다. 어려서 늙도록 수십 년 감고를 함께하고 영고득실로 마음이 변하지 않은 이는 군 한 사람뿐이다. 살아서는 나의 포숙, 죽어서는 나의 거경이라 생각했는데 어찌 군이 먼저 떠날 줄 알았겠는가. 슬프다. 군은 도광 5년 을유 4월 2일에 태어나 죽은 뒤 고을 남문 밖 홍상당에 장사했다. 주씨와 혼인하여 의인으로 봉했고 다시 만씨와 혼인했다. 아들은 둘로 맏아들 양공은 의서로 구품함을 받았고 주씨 소생이며 둘째 양구는 국자감생으로 만씨 소생이다. 딸 둘은 모두 주씨 소생으로 하나는 이씨, 하나는 손씨에게 출가했다. 남손 인[人], 여손 인[人]이다. 양구는 풍채가 크고 훌륭하며 행동이 군을 닮아 그 학문을 계승할 만하다.
光緒六年歲次庚辰八月族叔祖培系謹狀
광서 6년 경진 8월, 족숙조 배계가 삼가 행장을 쓰다.